갓을 쓴 선비가 대문을 넘고 문을 또 넘어 안채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더니 찾는 사람이 없었던지 이젠 크게 소리치며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초희야~ 초희야 어디 있느냐?"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누군가를 찾는 선비는 허 봉, 초희의 친 오빠였다. 초희를 애타게 찾는 그녀의 오빠 허봉 뒤로 생긋 웃으며 초희가 나타났다.
걱정하던 것도 잠시 얼굴과 옷에 흙을 묻힌 동생 초희를 보며 허봉은 또 한 번 초희의 호기심을 알 수 있었다.
"얘, 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니?"
"꽃들이 너무 아름답길래 잠시 뒤뜰에서 꽃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저 보기만 한 것이냐?"
초희가 분명 얌전히 꽃들만 본 건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지만 허봉은 다시 물어보았다.
"예..? 아.. 꽃 위에 어여쁜 나비들이 있기에 잡으려다 좀 넘어졌습니다.헤헷!"
초희는 들켰다는 듯이 멋쩍게 웃으며 이실직고 했다.
초희의 해맑은 미소를 보며, 허봉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상 이것 저것에 관심이 많은 동생이었다. 또한 그 호기심으로 관찰해낸 세상을 문장으로 곧잘 표현해내는 초희였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그 시대 여인의 몸으로 난 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허봉도 아는 사실이었고 그녀의 재능을 아는 아버지 허엽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초희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녀자가..그리 험하게 넘어지고 흙투성이가 되어서야 되겠느냐. 흙이 묻어 의복이 다 못쓰게 됐구나."
"예...송구합니다. 헌데 어찌 그리 저를 찾으십니까?"
"옷을 갈아입고 오너라. 손곡 오라비가 왔으니.."
"손곡께서요? 허면 균이는요? 균이도 벌써 준비를 마쳤습니까?"
"당연하지. 둘은 벌써 수업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구나"
"안..안됩니다! 금방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허둥지둥 대며 방으로 들어가는 초희를 보며 허봉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손곡 이달은 그의 동무였다. 그 또한 서자 출신이라는 한계에 부딫혀 꿈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한 사내였다. 허봉은 그런 그에게 동생 초희와 허균을 부탁했다. 자신의 동무 이달을 그렇게나마 위로하고 싶었다. 남동생인 허균에게도 문학가적 기질을 키워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누이동생 초희에게 배움의 기회라도 주고 싶었다. 그만큼 허 봉은 다른 오라비 보다 초희에 대한 애정이 컸고 연민도 컸다.
***
몇 해 전이었다. 가족들이 다 모인 곳에서 초희는 8살이라는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시를 써냈다.
"이게 진정 네가 쓴 글이냐?"
처음 초희의 시를 이 달에게 보여줬을 때, 이 달은 깜짝 놀라 옆에 있던 초희에게 물었다.
초희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헌데, 저는 제 글이 훌륭한 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
"아직 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니, 너무 과찬하지 마셔요."
"허허허. 겸손하기까지 하는 구나!"
초희가 나간 후, 손곡은 초희가 쓴 광한전 백옥루 상랑문을 나직이 읊조렸다.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어영차, 서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비단 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으니, 날 저문 뒤에 학 타고 돌아가길 재촉한다. 어영차, 북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북해 아득하고 아득해 북극성에 젖어 드는데,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물이 높이 치솟아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이 어둑하다. 어영차. 위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그 소리를 들은 허 봉이 손곡에게 물었다.
"어떤가? 재능이 아까운 아이일세. 스승이 되어주게."
"...알겠네. 나도 부족하지만 초희의 재능을 잘 키워봄세."
그렇게 손곡은 초희의 작문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
"오라버니!준비를 다 끝냈습니다. 어서 가요!!"
준비를 끝 마쳤다며 갑자기 방문을 뛰쳐나온 초희는 오라비인 자신보다 앞서 벌써 뜰문에 나가 있었다. 잠시 깊은 생각을 버려두고 허봉은 그런 초희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