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거인, 잠을 깨다 (2)

　#5. 2104년 1월. 타이탄의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화성의 검은 장미1000’은 질소가 주성분인 타이탄의 대기 속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흑장미002는 장미 묘목을 옮겨 심는 자매들을 보며 류우의 제안을 놓고 진의를 해석하려 애쓰고 있었다. 류우는 뜻밖의 호의를 베풀어 왔던 것이다.

　 “당신이 그 친구들을 염려하는 만큼 나도 걱정하고 있소. 죽일 만큼 미운 게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은 내 친구요. 내 제안을 잘 생각해 보시오.”

　 흑장미002는 한 때 좋아했던 류우가 아주 악인은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비록 화성의 크류세 요새의 전투에서 친구들을 곤경에 몰아넣은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들 세 사람은 이미 뗄 수 없는 친구 사이였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흑장미002의 생각이었다. 류우가 한때 애인이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현실은 자신이 이미 과거의 흑장미와 같지 않음의 증명이었다. 류우를 목전에 두고도 천 리나 떨어져 있는 타인을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더불어 그의 호의가 믿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확답을 하지 않는 흑장미002를 두고 류우는 침통한 표정으로 장미주를 연거푸 들이킬 뿐 재촉하지 않았다. 흑장미002는 그도 자신과의 사이에 이미 건널 수 없는 다리가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흑장미002의 기억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연정으로 가득하여, 다른 이의 진정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요. 답이 신통하지 않을 경우 내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

　 류우가 타협과 위협의 뜻을 아울러 지닌 몇 마디를 남기고 떠난 뒤에도 흑장미002의 기억은 외길을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의 수술 때에 몽환 중의 상태에서 보았던 기억들…… 장미꽃, 장미정원, 장미 문양의 의상들, 장미꽃잎을 띄운 술, 그리고 꽃에서 얻은 꿀로 술을 빚는 이야기를 하루 종일 늘어놓는 어떤 사람…… 그 환상은 내 잠재의식 속의 사람을 현실 밖으로 끌어낸 마물이었어. 나는 최면에 빠졌던 거야. 본래의 흑장미를 잃고…… 아냐. 흑장미를 그대로 지닌 채로 또 하나의 나를 내 것으로 해버렸던 거야.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최면에 걸렸다고는 해도 나는 지금의 나를 현실로 인정하고 있는 걸. 간디씨의 말대로 감정은 부분이 없는 것일까? 조각이 곧 전체가 되는 것이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더니…….

　 “큰언니. 손님 오셨어요.”

　 엘리자벳의 소리에 흑장미는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반듯한 외모의 청년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인드라 광산의 자유노동자인 오덕양입니다. 간디님의 편지를 갖고 왔습니다.”

　 간디의 편지를 읽은 흑장미는 샤넬과 유라, 엘리자벳을 불러 모았다.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네 여인의 얼굴에 어떤 결의가 떠오르고 있었다.

　#6. 지구력 2104년 3월. 지하 갱내 인드라 광산

　 “방법은 이것뿐이네. 한번 목숨을 버리지 않고서는 우리가 이 유형의 땅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네.”

　 간디가 한 장의 도면을 내놓고 탈주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지하 갱내의 미로 같은 통로를 거미줄 문양처럼 그려놓은 동굴 지도였다.

　 “밖에서 친구들이 돕기로 되어 있네.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우리 친구들도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네.”

　 김진욱은 간디의 설명에 시종 대답이 없었다. 오신이 간디의 설명을 보충하듯 말을 이었다.

　 “수용소 안의 친구들도 돕기로 했습니다. 김진욱의 이름을 나누어 쓴 값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만도 네다섯은 됩니다.”

　 김진욱이라는 이름이 나그네족의 대명사처럼 되어 동명을 쓰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21세기 후반 지구세계의 유행 풍조였다. 김진욱의 가계는 조부 때부터 같은 이름을 써 왔는데, 당대의 김진욱은 제3차 세계대전 격인 지구통일전쟁 때에 대량 발생한 유랑의 무리를 거두어 신념이 있는 나그네족으로 키워 낸 조상들의 덕택에 일찍부터 김진욱가(家)의 본가로 인정을 받아온 터였다.

　 체포되어 지하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들어온 간디는 인드라의 침해로 죽어가던 김진욱을 보고 탄식을 터뜨렸다.

　 “잊지 말게. 우리는 한 영혼을 우주로 띄웠네. 다시 살려낼 것을 기약하여 저질렀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 영혼이 스스로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네.”

　 김진욱이 탈출을 결심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래. 내게는 이모님이 있었어. 원하지 않은 죄수가 되어 죽어 가는 우리보다 천만 배 더 고독하게 살다 가신 분이. 김진욱의 귀에 전날 간디가 했던 말이 생생하게 되새김되고 있었다.

　 “이 타임캡슐은 50년 후에 개봉하기로 하고 발사되는 거야. 우주에 정보를 맡기는 것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우리 50년만 더 살자. 그때쯤 되면 이모님의 생명을 빼앗아간 재생 생명의 급속 노화도 예사 일이 될 걸. 내가 반드시 원인을 밝혀내겠네. 치료법도 찾고. 우리 그때까지 모질게 살아 있기로 하세.”

　#7. 지구력 2104년 4월. 인드라 광산 갱내

　 궤도차가 열 량 이상의 화물차를 끌고 지상을 향해 상승을 시작했다. 첫 번째 화물차에는 인드라 광석을 가둔 납제(鑞製) 캡슐이 가득 쌓여 있었고, 남은 아홉 량에는 광석을 캐는 과정에서 나온 폐기물이 쌓여 있었다. 죽처럼 끈적거리는 액상 폐기물의 주성분은 메탄과 암모니아였다.

　 “타이탄은 한 차례 생명을 낳을 뻔한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 초기 지구의 바다와 같은 복합 물질이 지하에 보존되어 인드라의 자연 중화를 막은 듯해.

　 독성이 심화된 건 당연하지. 그래서 우리가 한 번 죽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세.”

　 메탄과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감탕 속에 김진욱을 비롯한 타이탄의 유형수들이 숨어 있었다. 그들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방호복은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시켜 줄만큼의 산소가 공급되도록 조정되어 있었다.

　 “산소가 줄어들어 죽는 것과 구함을 받는 것의 경쟁이군요. 우리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로미오를 찾아 나선 줄리엣이로군요.”

　 간디에 대해서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오신의 말이었다. 그는 인드라에 중독되어 사경에 있었던 것을 때마침 갱내로 끌려 온 간디에 의해 구함 받은 적이 있었다.

　#8. 타이탄. 같은 달.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류우가 경호원들과 함께 머물기 시작한 이후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은 평소의 반절도 안 되는 술손님이 들어 한적한 상태였다. 류우의 경호원들은 총기를 뽑는 시범을 보이거나 술잔을 목표로 사격 연습을 하는 등의 행패를 부려 손님을 쫓았다. 타이탄행정청의 관리들과 무역상들과 상선의 선원들이 대부분인 일반 손님들이 드물게 보이는 이유였다.

　 류우가 차지한 자리는 흑장미002가 술손님들을 맞는 메인테이블의 정면이었다. 류우와 흑장미002는 한 차례 소동을 벌여 지구계 언론들의 주목을 샀고, 때문에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지구계의 세상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류우는 수시로 타이탄의 인드라 광산이 지구계 인류의 막장임을 강조하여 흑장미002를 설득하려 들었다.

　 “인드라의 독성은 상대를 가리지 않아요. 타이탄의 주점은 지옥문 앞에 꽃가게를 연 격, 그 친구들의 목숨을 보장할 테니, 화성행을 생각해 보기를.”

　 흑장미002의 답변은 한결 같았다.

　 “저는 제가 있을 곳을 찾았습니다.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에 흑장미가 있는데, 왜 시비가 될까요.”

　 한없이 평화로운, 그러나 흔들림이 없는 어조였다. 그러한 흑장미002의 태도에 격분한 류우는 “반드시 데려 가겠다”고 호언한 후 날마다 찾아와 시위를 했다.

　 류우는 경호원들의 행패를 방관하여 술손님들을 막았다. 흑장미002와 대화를 청하는 손님은 예외 없이 류우의 경호원들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류우는 자신이 흑장미002의 연인임을 언론에 과시하여 지구계 인류 전체가 알도록 하고 있었다.

　 그 날 류우의 경호원들과 시비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한 무리의 무역선원들이었다. 선원들은 평소에도 가장 왈패에 속하는 골수 주당들이었는데, 그 날은 특히 흑장미002를 비롯한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여주인들에게 극성스럽게 굴어 류우의 경호원들을 격분시켰다.

　 류우의 경호원들은 고르고 고른 전투의 명인들이었다. 격투기와 사격술, 육탄전을 위한 총검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손에 익지 않은 전쟁 기술은 없었다. 당연히 선원들은 일방적으로 몰매를 맞고 길게 드러누웠다.

　 선원들의 응원군이 온 것은 잠시 후였다. 몰매를 맞은 선원들 중 하나가 공항으로 달려가 동료들을 끌고 온 것이었다. 싸움은 더욱 확대되어 주점 안은 깨진 술병과 부셔진 집기 등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두 번째 싸움 역시 류우의 경호원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응원군으로 달려온 선원들 역시 전문 싸움꾼들은 못되어서 전쟁 기술을 직업적으로 익힌 류우의 경호원들에게 초주검이 될 만큼 두들겨 맞았다.

　 선원들의 큰 무리가 또 다시 ‘언제나 장미…’로 몰려가는 양을 보고서도 행정청의 관리들과 지구우주군 타이탄 주둔군 사령부에서는 관여치 않았다. 류우와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여주인과의 관계는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있었고, ‘언제나 장미…’를 류우의 부하들에게 점령당한 원한까지 겹쳐 타이탄의 주민들은 선원들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류우의 선부(先父)인 선대 류우가 지구연방의 정계에 심어 놓은 인맥 때문에 월권을 눈감아 주고 있던 타이탄 경비 경찰 측에서도 눈총을 보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타이탄의 질서를 지켜야 하는 책임이 있었으므로 즉각 병력을 출동시켜 선원들의 뒤를 따랐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은 타이탄 세계 전역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시민들은 경비 경찰의 개입으로 난동을 부리던 선원들이 끌려나오는 장면을 보며 류우의 위세에 혀를 내둘렀다. 난동의 또 다른 주역인 류우의 경호원들은 승자로서 여전히 ‘언제나 장미…’를 점령하고 있었다.

　 타이탄의 시민들이 주둔군사령부의 병력과 경비 경찰의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음을 확인한 것은 잠시 후였다. 언론에 보도에 의하면 인드라 광산의 지하 갱을 탈출한 일단의 유형수들이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을 점령했다고 하였다. 그들은 난동 선원들을 응원하는 무리에 섞여 잠입한 후, 류우와 그의 경호원들을 비롯한 술손들을 인질로 잡고 타이탄을 떠날 수 있는 우주선을 내주기를 청하고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