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W 병원에 연락하여, 가수 호윤에 대해 보호 조치를 한 은호는 다시 연호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의 문을 두어 번 두드린 그녀는 연호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어라? 다휘는 어디 갔어요?”
“회사 대표한테 전화하러. 여기, 정원에 보여.”
연호는 그의 자리 너머로 커다란 창문을 가리켰다. 은호는 고개를 내밀어 창밖의 아래에 보이는 다휘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휘는 정원을 천천히 거닐며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헤에···. 다휘한테 얘기 꺼내셨나 봐요? 당분간 여기에 살라고요.” 은호가 소파에 편하게 앉아 연호를 올려다보았다.
연호는 업무에 집중할 때 쓰는 동그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피며 어깨를 두드렸다.
“했지. 그나저나 다휘랑 꽤 친해진 모양이네. 새벽에 단체 채팅방에다가 ‘다휘의 절친의 스타트 라인에 서있다.’고 하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연호가 기분이 좋은 듯 만면에 미소를 띠운 채 말했다.
그의 말에 은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밤새 이야기를 나눴고, 이런 음침한 남정네들 사이에 여자는 둘 뿐이고. 좋은 친구가 될 조건이잖아요? 착하고 여린 아이더라고요. 우리랑은 떡잎부터가 달라.”
은호가 어딘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호는 그녀의 말에 동감한다는 의미로 가만히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 그래. 요즘 민환이는 옛날 얘기 잘 안하지?”
“네. 많이 나아졌어요. 그나마 휘원 님이 오빠랑 시간 같이 보내주시면서 이 정도로 진전된 건데. 선우 님도 휘원 님께 의지 많이 했고요. 생각보다 뿌리를 깊게 박으셨네요, 휘원 님이.”
은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앞이 깜깜해지고, 고통에 괴로워하는 민환의 모습이 그려졌다.
여태 정서가 불안정해서 힘들어하던 민환이 이제야 안정을 찾은 줄 알았는데, 휘원의 빈자리는 벌써부터 크게 다가왔다.
“··· 장례식장 준비는 했어? 다휘가 친척들은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그냥 간단하게 치르고 싶대. 우리들 정도만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
연호가 일어나 정장 바지에 손을 찔러 넣고 창밖으로 다휘를 지켜보며 말했다.
은호는 두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준비 할게요. 그리고 또 무슨 얘기 하셨어요?” 은호는 창가에 서있는 연호를 바라봤다.
밝은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연호는 다휘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그렸다.
“별 다른 얘기는 안했어. 다휘도 많이 혼란스러운가봐. 너는 새벽에 다휘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한 거야?”
“저는 뭐·· 이곳이 뭘 하는 곳이냐고 물으면서 엄청 무서워하는 표정을 짓기에, 살인은 암살부에서만 한다고 거짓말 친 정도?”
은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조금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더러운 치부를 보여줄 수 없는 자괴감 때문인지,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휘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함께 가지고 있었다.
휘원이 얘기하던 다휘는 마음이 여리고 상처를 쉽게 받는 아이였다.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장면을 봐버린 아이 치고는, 꽤 덤덤한 반응을 하고 있었다.
은호는 분명히 다휘의 속은 끝도 없이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 그래. 다휘만 모르게 하면 돼. 애들 입단속 잘 시키고.”
연호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수도 없이 살인을 해왔고, 끝도 없이 펼쳐진 시체들 속에서 서있었던 적도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간부의 모두가.
보통 일반인에게 가족의 죽음은 일생에서 큰 사건이다.
다휘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겪고 난 후 흐른 시간에 비해 그녀의 감정은 무뎌진 것처럼 빠르게 식었다.
그렇다고 다휘가 현실을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과정이 너무 빠른 것뿐이었다.
은호는 연호의 지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걱정 마세요. 민환 오빠가 안 그래도 로빈 님 도착하시기 전에 입단속 시키겠다고, 전체 긴급 소집 명령 내려서 지금쯤 잔소리하고 있을 거예요.” 은호가 말했다. “먼저 가 볼게요.”
그녀는 연호의 집무실에서 나섰다.
연호는 은호가 나간 후, 천천히 닫히고 있는 집무실의 문을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다휘가 빠르게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생각이 정리가 된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하지만 그녀의 세계가 무너진 것이라면, 무너진 부분에 자신들이 껴들어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이라면···.
조금의 충격만 받아도 전부 깨질 것이다. 다휘의 세계는.
연호는 다시 몸을 돌려 정원 속에서 통화를 끝내고 벤치에 앉아 햇볕을 받고 있는 다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다시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 * *
다휘는 햇볕이 따스한 손길처럼 느껴졌다.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커다란 손 같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벤치는 딱딱했지만, 몸은 햇볕에 녹아서 흐물흐물 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NEU의 대표인 우진은 자신의 전화에 놀란 듯, 기쁘면서도 걱정이 가득했던 목소리였다.
원래 오늘 저녁을 함께 하려고 레스토랑을 예약했다며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그녀는 우진에게 자택근무를 요청함으로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우진은 굉장히 낙담한 목소리로 그녀의 요청을 허락했다. 그리고 근무 조건을 함께 협의했다.
“2주에 한번은 회사로 출근해서 총 직원회의에 참석, 자택근무인데도 월급은 오히려 인상이네.”
다휘는 고개를 젖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공중에 말을 흩뜨렸다.
천천히 흘러가는 하얀 구름과 주변에서 나는 꽃의 향기, 일이 급한 것도 아니었고, 꽤 여유로운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곳에 그런 좋지 않은 일로 왔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다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햇볕이 강해서 어둠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여유로운 기분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
.
곧 그녀는 어디선가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오전 중으로 도착한다던 그 사람인가 싶어, 다휘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는 굉장한 미남이 정원 주위를 걸으면서 두리번거리는 것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에도 다휘가 단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은 그렇게 눈을 마주친 채 세상이 멈춘 듯, 함께 바람을 느끼며 서 있었다.
남자는 성큼성큼 다휘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걸어올수록 다휘는 지금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걸까 싶어, 어쩐지 안달이 났다.
“네가 현 다휘?”
남자는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굉장히 생기가 넘치는 눈동자였다.
연한 갈색을 띠는 눈은 어쩐지 그를 이국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네··. 제가 현다휘입니다.” 다휘가 그의 시선을 조금 피하며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다휘를 붙잡으며 들떠서 환히 웃었다.
“뭐야, 실물이 훨씬 낫네!” 그가 소리쳤다.
“ㅇ··예?” 다휘가 당황해서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에게 잡힌 두 어깨 덕분에 멀리는 물러나지 못했다.
“아. 나는 국 로빈이라고 해. 오늘 여기 손님! 아니, 나 여기 소속인데 손님은 아니지. 하여튼, 반가워! 그 힘든 일을 겪고도 이렇게 아름답다니. 그런데 너 중앙 회의실로 가는 길 알아? 내가 길치거든! 지금도 길을 잃었어! 아하하?”
그는 말이 많고,
“왜 여기에 나와 있어? 아, 설마 내 마중이라도 나온 거야? 와! 완전 기뻐. 그럼 이제 출발해볼까?”
굉장히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 * *
“로빈 님! 지금 다휘 표정 보이지 않으세요? 또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셨죠?”
“오, 은호야. 오랜만이네! 표정이 많이 좋아졌구나?”
“제 말 무시하지 마시구요!”
결국 그를 감당할 수도 없고, 중앙 회의실도 모르는 다휘는 은호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전화에 성급히 하던 일을 멈추고 나온 은호는 로빈에게 다짜고짜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러나 굉장히 마이페이스적인 로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방긋 웃었다.
“수상해. 다휘한테 좀 떨어지지 그래요?”
“지금 다휘가 필요한건 사람의 온기거든~”
“그래도 로빈 님은 안 필요하니까, 떨어져서 따라오세요.”
은호와 로빈이 투닥대며 아옹다옹하자, 다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로빈에 대해 겉모습은 굉장히 고급지고 우아했지만, 속은 장난 끼가 가득한 사춘기 시절의 거친 남자아이 같았다.
“왜 매번 오셔도 길을 못 외우세요? 특이해, 정말.”
본관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고, 은호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근데 애들이 나 찾고 있을 텐데.”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은호는 5층을 눌렀다. 그러자 로빈은 생각났다는 듯 작게 구시렁댔다.
“제가 로빈 님 찾았다고 연락해둬서, 해결됐을 거예요.” 은호가 그의 중얼거림에 대답했다.
띵, 하고 기계음이 울림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은호는 다휘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중앙 회의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은호는 커다란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안으로 인도했다.
“로빈 형!”
“연호야!!”
대학의 커다란 강의실처럼 계단식으로 되어있는 수많은 책상들, 그리고 가장 앞쪽이자 아래 부분에 앉아 있는 연호는 문을 열고 들어온 세 사람을 향해 방긋 웃으며 뛰어갔다.
로빈과 연호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방방 뛰고 있었고, 다휘는 그들의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무슨 상황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휘야, 무시해. 저 둘은 형제나 다름없거든. 한 3주 만에 만난건가?”
은호는 벙 쪄있는 다휘를 향해 충고를 남겼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가장 앞줄의 책상에 함께 앉았다.
“난리 났네. 저 바보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중절모를 쓴 도담은 픽 하고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도담의 말을 들은 로빈과 연호는 어깨동무를 한 채, 도담에게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연호는 그에게 끌려갔다고 본 게 맞지만.
“이씨! 도담 형! 나 할 말 있어!!”
“뭐, 임마.”
로빈은 리무진에서 수행원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 견혜혁이랑 화해 안 할 거야! 아니지, 걔가 잘못 한 거거든?!”
“어쩌라고?”
그리고 로빈의 투덜거림은 도담의 단 한 마디에 막혔다.
연호는 그를 토닥이며 “형, 자리에 앉으세요··.” 라고 속삭였다.
“흠·· 다들 자리에 착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이 아수라장에서 민환은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회의장의 맨 앞에는 bloody ellipse의 간부들과 다휘, 로빈이 앉아있었고, 그 뒷줄로는 각 부서에서 한 자리씩 맡고 있는 사람들이 회의장을 가득 채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