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이터널 군이 질문이 너무나도 많아졌군요.”
유마는 거친 숨을 쉬는 진혁을 진정시켰다. 그의 질문은 어려움이 없었지만, 기계가 인간처럼 느껴지는 조화롭지 않은 어색함은 그에게 불편함을 주었다.
“시영의 스크롤… 대체 호야라는 사람은 누구고, 포우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겁니까.”
“천천히, 하나, 하나. 차근차근. 아시겠죠?”
“스크롤… 대체 시영의 스크롤은 무엇입니까. 그것보다도 호야라는 사람은 어떻게 스크롤을 그렇게 간단하게 발동할 수 있던 겁니까. 여인은 대체 누구입니까.”
유마는 그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이터널(진혁)은 너무나도 많은 정보를 얻어버렸고, 그것들을 한 번에 이해하고 싶어 한다. 유마로서도 그를 한 번에 이해시켜주고 싶은 마음만은 굴뚝같았지만, 두서없이 자기 할 말만 하는 이터널에게는 해줄 수 있는 말이 극히 제한되었다.
“시영 군의 스크롤은 예전에 만들었던 10가지의 스크롤입니다. 호야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것보다 스크롤을 어떻게 간단하게 발동할 수 있었다는 거죠? 여인은 대체 어떤 여인을 말하는 겁니까.”
진혁은 되묻기 위해 입을 열고 소리를 내었지만, 혀가 꼬이며 제대로 된 발음을 낼 수 없었다. 그는 숨을 골랐다. 이내 진정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이 왜 이렇게 까지 흥분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터널 군, 아니 진혁 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 겁니까. 천천히 말 하셔도, 당신의 말이라면 충분히 다 대답해 드릴 거고, 제가 알만한 질문만을 해주십시오. 전 호야라는 사람도, 당신이 어떤 여인을 말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진혁은 그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마는 그의 마음을 읽어, 그가 여전히 포우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우(시영)를 가장 처음에 언급한 이유도 그와 관련 있는 스크롤에 대해서 언급한 것도,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였다. 그렇다면 진혁이 말한 여인은 10가지 스크롤을 가장 처음에 사용했던 그녀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야라는 자에 대해서는 유마로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었다.
“호야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특히 은연 중 언급되었던, 스크롤을 간단하게 사용했다는 말은 오히려 이쪽에서 묻고 싶은 정보였다.
“모험가입니다.”
진혁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이해가 쉬운 모습으로 말했다. 그의 특징인 등에 멘 거대한 검집은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유마로서는 호야를 몰랐기에 아예 이해할 수 없었다.
“음… 아무래도 시영 군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괜찮겠죠?”
유마는 눈치껏 웃으며 물었고, 진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보다도 시영 군과 관련이 있는 것들만 물으신다면, 아무래도 진혁 군이 시영 군을 굉장히 신경 쓰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군요.”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신경 쓰는 존재는 시영이 아닌, FOW입니다.”
유마는 진혁의 마음을 읽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FOW. Fantasy Of World. 즉, 세계의 환상이라는 이름이군요. 시영 군 답다면, 시영 군 답군요.”
“확실히 그가 6개월 전의 그 검은 전사가 아니라는 확신을 내렸습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교수님이 증명해주실 거고, 이름을 스스로 짓는다는 건…”
유마는 간단하게도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는 단지 남의 마음을 읽을 뿐이었지만, 이터널과는 오랫동안 지냈었기에 숨겨진 속뜻까지 해석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시영은 확실히 포우가 아니다.] 이 뜻은 유마의 걸작으로 시작했지만, 현재는 그렇게 불리기에는 조금 애로사항이 있다는 의미였다.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는 것.]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특히 이터널은 이 의미에 가장 무게를 두었고, 유마는 그가 자신으로부터, 이터널이라는 구속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고 싶어 하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유마는 간단하게 해석을 끝내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름은 이터널 군이야말로, 아니 진혁 군이야말로 얼마든지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터널 군은 그걸 하지 않았죠. 시영 군은 분명 그만의 어려움에도 이름을 지었습니다. 할 수 있었음에도 안 한 이터널 군이 그를 신경 쓰는 건 조금 위선이라 생각됩니다만?”
유마가 의도적으로 던진 직구에 진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잘못에서 오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
이터널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았다. 그 뿐이었기에 대꾸를 하는 것은 그저 변명거리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저는 누구입니까. 대체 뭐 하는 존재입니까? 어떤 정의를 위한 사람입니까.”
이터널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마를 바라보았다. 유마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진혁 군은 진혁 군입니다. 진혁이라는 사람의 정의를 위한 존재. 그것뿐입니다.”
유마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진혁은 혼란스러워 할 뿐이었다.
“진혁 군이 존재 가치를 ‘이터널’이라 생각한다면, 당신의 존재는 그저 고유마라는 과학자의 걸작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터널과 포우. 두 전사들은 제 걸작들일 뿐이죠. 하지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전사들을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마의 말에 진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 그것이 가장 사람답습니다. 사실 며칠 전에 진혁 군과 ‘이터널 시스템’의 존재에 대해 잠시 말다툼을 했을 때는 솔직히 조금 기뻤습니다. 그 동안 진혁 군이라는 사람은 그야말로 ‘기계’와 다를 것이 없는 딱딱한 사람이었죠. 하지만, 당신과 서로 반대되는 가치관으로 사람답게 말다툼을 하다니…”
진혁은 그때, 유마가 자신을 이터널이 아닌 진혁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이름’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었기에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치사하군요. 대등하게 생각한다면서, 원하는 정보는 하나도 알려주지 않고…”
“실은 시영 군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었습니다.”
갑작스런 고백에 진혁은 유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상황에선 아무래도 당시 상황에서는 의식 불명 사건의 해결이 더 우선이었고, 그랬기에 그에게 그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D-Zero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준다고 말했었죠. 뭐, 엄밀히 따지자면 못 알려준 게 맞겠지만요.”
“그럼 그 중요한 정보라는 게…”
“D-Zero와 이상 세계 현상을 해방기를 소유한 사람과 그 주변 사람들을 제외한, 즉, 75% 정도의 사람들이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진혁은 그에게 간간히 들어왔기에 별로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오히려 무서웠다. 전례 없는 자연재해였지만, 약 4분의 3 정도의 사람들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잊어버렸다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적응하기 힘들었다.
“시영 군의 전례가 있기에, 전 진혁 군에게 한 가지 부탁을 드릴 거고, 그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원하는 정보를 모두 알려드리겠습니다.”
유마의 제안은 시영을 위한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 물건은 지금부터 만들 것이었다. 진혁의 궁금증은 며칠이나 지나야 해소될 것이었지만, 기다림은 익숙했다. 그는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유마가 시영에게 선물을 주는 이유는 이터널과의 대화로 몇 가지가 확실해졌기 때문이었다.
첫째, 시영은 포우(검은 전사)가 아니다. 이것은 그가 검은색으로 변한 적 없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고, 본인이 확실하게 6개월 전의 포우가 아니라고 강조했기에 확실하다 볼 수 있었다.
둘째, 시영은 굉장히 많은 것들을 이어받았고, 그 때문에 짐의 무게가 상당하다. 단적으로 스크롤을 메모리 사양으로 6장이나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여섯 사람의 의지와 꿈을 짊어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정황상 10장 중 4장은 소실, 그럼에도 과반수의 의지를 이어받은 것은 보통일은 아니다.
셋째,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일체 거짓이 없는 사실이라면, 시영은 여섯 사람의 의지만이 아닌, 포우의 의지도 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의지도 본인이 원해서 이었다고 보기 힘들었다.
포우의 힘은 해방기, 여섯 사람의 의지는 스크롤에 있었다. 시영은 이것을 누군가에게 받았다라고 말했고, 그렇다면 그 어떤 것도 선택했다고 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넷째, 이유가 어떻게 됐든 해방기, 스크롤의 제작자 유마는 시영의 부담을 덜어줄 의무가 있다. 관련 없이 살 수도 있었던 시영은 어떻게 되었든 엮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랬기에 유마로서는 그걸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
서둘러 그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던 유마는 며칠 밤을 샐 각오를 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어 따분해진 진혁은 유마를 돕기 위해 그가 필요한 것은 없는지 살펴봤다. 하지만 너무나도 집중한 나머지 유마는 진혁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때 바닥에 떨어진 문서 여러 개가 진혁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흐트러진 문서를 정리하던 중, 진혁은 ‘로켓’이라는 문서에서 ‘은광식’이라는 이름을 읽었다. 그는 잠시 유마를 바라보았다. 유마는 여전히 진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보였다. 그랬기에 진혁은 망설임 없이 로켓 문서를 펼쳐들었다.
‘이 사람이 새로 올 교수님의 조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