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박고 꺼이꺼이 흐느끼는 척 하고 있을 때 옆에서 꽃향기가 코를 간질이자 이마를 박은 상태로 슬쩍 고개만 방향을 트니, 얼굴 옆에 색색의 꽃다발이 보였다.
“응?”
언제 나갔다 왔었는지 바이안이 궁 밖에 핀 꽃을 꺾어왔다.
“모두 세나가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니까. 이걸로 조금만 참아줘.”
그러면서 예쁘게 웃고 있는 바이안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세이나는 헤 입을 벌렸다.
‘꽃보다 오빠가 더 화사한뎁쇼?’
참 반짝반짝하며 잘도 웃는 구나 생각하며, 그의 작은 배려가 싫지는 않은지 꽃다발을 잡고 꽃잎을 괜히 만지작댔다.
“두 번째로 받아보네. 꽃..”
“그런가?”
“카카리아에서 손톱에 흙이 끼고 손에 풀로 잔뜩 더러워져도 예쁘다고 고생하면서 잔뜩 가져와줬었잖아.”
“색색별로였지.”
“나중엔 위험한데 갔다 왔다며 엄마한테 혼났지만.”
서로에게 정말 행복한 매일이 있었던 과거를 회상하며 작게 미소를 주고받았다.
둘만의 세계로 가 있던 잠깐의 시간에 꽃과 어울리는 꽃병을 챙겨온 히데아가 세이나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역시 히데아야. 누구보다도 빠르다니까.”
“그게 제 일인걸요.”
평소라면 세이나에게서 꽃다발을 받고 히데아 본인이 장식해 놓는 것이 맞지만 분위기상 세이나가 직접 꽃병에 꽃을 장식 하게 놓아두었다.
“아~ 평소처럼 에바라도 놀러오면 좋겠는데..”
수시로 자신을 만나러 오는 에바가 오늘따라 그리워졌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황후는 에바가 어떤 목적으로 대륙에 내려가고 싶은 것인지 알게 된 뒤로 에바를 은근히 밀어주고 있었지만 황제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에바가 어떤 방식으로 구워삶았는지 갑자기 허락을 받아내고는 대뜸 대륙으로 내려가 버렸다.
물론 몇일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황후마마의 입으로 듣고 황제폐하가 쓰러지시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고 세이나는 새삼 감탄했다.
에바 입장에서는 나름 솔직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오해하기에 딱 좋은 말을 퍼부었고, 황후가 세이나에게 전해준 대화는 이랬다.
대륙의 문화인 찜꽁으로 케리프님과 자신은 몸도 마음도 이미 하나다라고 소리치며 대들었다는데, 부모의 입에 거품 물려주기에는 딱 좋은 말이었다.
천공의 땅으로 올라온 뒤에 세이나가 철저하게 가르쳐서 이제는 그런 것이 아닌 단지 비유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에바지만,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녀의 속에 은근히 여우가 숨어 있을 지도 몰랐다.
물론 황제폐하도 황후마마도 대륙의 지상인들의 문화나 행동을 전부 알지는 못하기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애지중지하면서 곱게 키운 딸이 한 번도 보지 못한 호랑말코 같은 자식한테 코가 꿰였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황족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고귀해서 결혼 전까지는 정조를 지키는 것이 당연한데, 그 정조를 주었다는 식의 오해성이 짙은 발언을 하면 하늘과 땅차이의 신분을 넘어서 케리프의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었다.
후에 무시무시하게 으르렁 댈 황제폐하를 마주하게 될 케리프가 내심 안쓰럽게 느껴져 세이나는 조용히 그의 명복을 슬쩍 빌어주었다.
“케리프씨가 에바에게 마음이 생길지는 모르겠는데..”
“그가 마음이 안 생겨도 에바가 이미 그런 식으로 선언을 해버렸으니, 책임지라고 강제 결혼행이 되겠지.”
바이안도 상황의 전황을 같이 들어서 아는지라 세이나와 같이 명복을 빌어주면서 덧붙였다.
“서로 마음이 통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몸과 마음이 하나다라고 외친 시점에서 이미 글렀어.”
“그렇겠지. 내가 아는 황제폐하면 아마도 권력적인 협박을 해서라도 결혼 시킬 듯 보이는데?”
“그래도 케리프, 그라면 분명 자상하게 대해 줄 테니, 걱정 없잖아.”
케리프에 대한 신뢰가 바이안의 입에서 자연히 나왔다.
“헤~ 그럼 케리프씨는 나중에 반에게 형님 하는 거야?”
“형님... 동갑인데, 어색해지겠군.”
신분의 차이로 존대와 하대하는 사이라도 로도스에 있으면서 무척 가까워졌고, 이미 론과 바이안에게는 케리프는 믿을 수 있는 친구 사이로 발전한 상태였다.
그런데 동생인 에바가 엮여서 이제는 친구가 자신에게 형님이라며 고개를 숙일 것을 생각하니 인간관계에 면역력이 약한 바이안에게는 퍽 난감했다.
대륙의 제일 남단의 로도스의 작은 도시는 몇일 전에 또 한 번 많은 수의 귀족들이 내려오는 것을 빛과 함께 목도했다.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고급 진 옷을 통일해서 입은 시종들과 시녀들의 틈에 누가 보더라도 빛이 나는 금발에 예쁜 드레스로 중무장한 에바가 나타나 당당하게 케리프의 자택으로 행군 아닌 행군을 하였고, 케리프는 다른 의미의 식은땀을 흘리며 갑자기 쳐들어온 에바황녀를 맞이했다.
그 덕분에 도시 사람들은 숙덕숙덕 거리며 여러 추측들을 남발하는 사단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에바는 케리프가 늘 있는 그의 집무실의 문을 슬쩍 열고 고개만 빠끔히 내밀어 케리프를 보고 있었다.
“황녀님. 그러지 마시고 들어오십시오.”
부드러운 미소에 에바의 얼굴이 홍조를 띄우며 두 손을 뒤로 돌려서 깍지를 끼고 손가락을 꼼지락 대면서 머뭇머뭇 들어갔다.
“불편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자연스럽게 차를 타서 그녀의 앞에 놓아주며 마주 앉아 묻는 케리프의 자상함에 에바의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없어요.”
확 고개를 쳐들고 외치던 에바는 다시금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케리프는 그런 에바를 귀여운 동생을 보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
처음에야 황녀의 이해가 되지 않는 많은 행동에 자신이 싫은 것이리라 짐작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케리프가 아무리 연예고자라도 현자라고 불리는 이였고, 세이나가 인정하는 지식인답게 그녀의 행동이나 말투의 의도를 이번에 함께 지내며 거의 다 파악이 끝나자,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하늘같은 황녀를 감히 귀엽다고 생각했다.
에바는 계속 보내주지 않는 아바마마가 미워서 큰소리로 케리프와의 관계를 일부러 과장시켜서 멋대로 선언한 후에 당당히 내려온 것은 좋았지만, 막상 도착해서 케리프와 마주하고 보니 그 용기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직 이렇다 할 것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일전에 도시 구경은 제대로 하지 못하셨지요? 모처럼 내려 오셨는데 안에만 계시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자신의 집에 콕 박혀만 있는 에바를 챙겨주었지만, 에바는 고개만 숙이고 눈을 떼룩떼룩 굴리기만 했다.
“혹, 나가시는 것이 어려우신 것이라면, 황녀님만 괜찮으시다면 소인이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케리프의 말에 빠른 속도로 숙였던 고개가 올라와 반색하며 좋아하는 에바와 동시에 그녀의 호위를 하는 기사들의 따가운 시선이 함께 꽂혔다.
천공의 땅에서도 정점에 있는 황족인 그녀가 좋아해 주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황녀가 함께 있어 살기가 없다 뿐이지 무시무시한 시선들에 케리프는 새롭게 영문을 모르는 것이 생겼다.
기사들이 저리도 케리프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다름 아닌, 황제폐하의 노기 섞인 명 때문이었다.
황녀가 내려가 있는 동안에 케리프라는 놈팽이가 또 나쁜 손을 뻗지 못하게 감시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서 세밀하게 보고하라는 명령이었다.
특히 제일 강조 되어있는 것이 단둘이 있는 상황은 절대로 만들지 마라였다.
그 명령만으로도 기사들에게 케리프에 대한 인식은 꽃같이 가련하고 어여쁜 자신들의 황녀님을 채간 못된 놈이 되어버렸으니 어련할까.
단지, 황녀님이 자신들도 한 눈에 알기 쉽게 부끄러워하고 좋아하고 계시니까 참는다는 듯했다.
황제가 홀로 술을 마시며 중얼 대는 그의 독백을 호위하던 기사가 듣고 그의 입으로 퍼진 소문도 한 몫하고 있었는데 이미 때는 늦어서 황녀가 성인이 되는 1년 뒤에 혼인을 시킨다는 것이다.
하찮은 지상인중에 한명인 케리프를 몰래 제거하는 방법을 구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로도스에서는 아무도 날 뛸 수가 없었다.
대현자가 아끼는 도시에, 케리프는 그 분의 친구였고, 2황자가 아끼는 사람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니 잘 못 건드리면 삼대가 멸할 것이 자명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시선으로 압박을 주는 것과 머릿속으로 벌을 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정작, 케리프는 천공의 땅에서 자신이 황제에게 어떤 사람으로 인상이 박혀있는지는 알지 못해서 고스란히 적의를 인내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고, 후에 그가 죽고 화장을 한다면 사리가 한바가지는 나올 것이었다.
그의 인생이 어떤 선택권도 없이 이미 정해져버렸고, 혼삿길이 막힌 것은 그는 아직 몰랐다.
어찌 되었든, 에바만 신나는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성사되었다.
요즘 할아범은 자신의 방으로 매일같이 찾아오는 기사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도 힘들어 죽겠는데, 삼삼오오 모여서 자신들이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돌아가며 할아범을 찾아대니 그의 인생 처음으로 몸이 야윌 것 같았다.
“이보게. 저것들 좀 쫒아내 주게. 이제는 힘들어 죽것어.”
“허허허 열정이 가득한 젊은이들을 쫒아낼 힘이 나한테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친구인 남작에게 애처롭게 부탁해 보아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니 역정이 난다.
“마누라가 그것도 못하나?”
“허, 허허허허”
예전에 세이나가 부부 아니냐며 마누라가 누구야? 라고 농을 던져서 자신이라고 했던 남작의 말을 이럴 때 사용하는 할아범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러지 말고 그만 받아주지 그러나?”
“다 늙어서 힘도 읎는디, 무얼 한다고.. 끌끌”
꿈틀대는 근육이 아직도 전성기라며 외치고 있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데, 또 나이 먹은 것을 빌미로 엄살을 피웠다.
그때, 할아범을 찾아온 세 명의 기사들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했다.
“어르신 부탁드립니다. 한번이라도 좋으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어구구 허리야~ 삭신이이야~”
그들의 정중한 행동에 할아범은 주먹으로 허리를 통통 치며 과장스럽게 힘겨운 척 했다.
손녀딸의 빽을 빼면 보잘 것 없는 지상인인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얼마나 받는다고 다들 이러는 건가? 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들을 생각이 없었다.
현재 현궁에 있는 공백의 기사단에서 할아범 붐이 일고 있었기에 확실히 통할 리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