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순정 _6
무릎을 펴고 일어난 그가 차마 내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이불을 만져댔다.
"문자 보낸 거 너 맞아?"
그것부터 확인화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한숨부터 나왔다.
"왜,"
"........."
"왜 그런 문자를 보내."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해,
평소와 달리 조금 날이 서 있는 내 말투에 입술을 깨물던 영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일정이 바쁘다고..."
"내가 너를 모르냐."
매번 나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애가 바쁘다는 이유로 오지 말라고 하는 게.
그럴 수도 있는 일을 왜 우리는 이렇게 그럴 리 없다며 날을 세우는지 모르겠다.
그냥 서로가 조금 더 신경 쓰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있는 걸까.
"아버지 다녀갔지."
내내 찜찜하던 건 이거였다.
아버지가 전에 없던 외근을 했고 그 뒤로 내게 오지 말라고 한 영주의 문자.
그 어딘가에 보이는 찜찜한 접점 같은 것.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던 영주는 잔뜩 놀란 얼굴을 하고는 작게 입을 벌렸다.
"너한테 뭐라고 했어?"
"아, 아닙니다 그런 거."
"다신 나 만나지 말래?"
'후두둑-'
코끝으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슬쩍 영주가 서 있는 흙바닥 언저리를 쳐다보았다.
짙은 갈색으로 군데군데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아- 이제 여기도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할 생각이야?"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뭐가 어쩔 수 없는데."
그냥 화가 났다.
마음이 여린 아이에게 아버지가 무어라 했을지
안 봐도 그냥 뻔한 것 같아서.
그 상처를 고스란히 다 받아내고 또 억지로 하기 싫은 문자를 내게 보낸 영주의 손끝이 얼마나 떨렸을까.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
"거, 거짓말해서 화나셨습니까."
"어. 화 나."
".........."
"그리고 실망했어. 너한테."
덧붙인 내 말에 영주는 거의 울 것처럼 입술을 꾹 깨물고 손에 쥐고 있는 이불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앞머리칼이 비에 젖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내 머리칼에 떨어지는 물 보다 녀석의 머리칼을 적시는 그 빗줄기가 더 신경이 쓰였던 게 사실이다.
"말로만 은호 형님- 하고서는 결국 말 듣는 건 우리 아버지라는 거에 대해서."
"......그, 그건."
네가 하나원 들어가기 전에 나한테 함께 할 수 있냐고 물었지,
나만 대답하면 될 문제가 아니었네.
내가 그렇다 해도 네가 아니라 하면 끝날 것을.
"....간다."
더 이야기했다간 비에 쫄딱 맞고 안 좋은 꼴만 보일 것 같아서 뒤를 돌아 다시 걸어온 길을 빠져나갔다.
뭐가 그리 실망했다고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뒤를 도는 순간 후회했지만 그건 곧 서운한 감정에서 비롯된 거였다.
올 땐 그렇게 빨리 오고 싶어서 택시를 타는 정성까지 보였으면서 갈 때는 마치 의욕을 잃은 사람처럼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걸었다.
이쪽으로 가는 길이 맞는지조차도 모르겠다.
빗줄기는 점점 더 세진다.
셔츠 자락이 몸에 축축하게 달라붙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었다.
마음도 안 좋은데 왜 그렇게 비를 뿌려대냐 무언의 압박이라도 주고 싶었는데,
사정없이 쏟아지는 비는 내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게 했다.
마치 넌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하는 듯이.
'터벅- 터벅.'
물기 젖은 아스팔트를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홍색 이불을 두 손으로 꼭 말아쥐고 어쩔줄 몰라하는 그의 얼굴만 떠올랐다.
물 웅덩이와 함께 아른 거리는 영주의 얼굴, 그리고 쏴아- 하는 시원한 빗소리와 함께 들리는듯한
"은호 형님!"
네 목소리.
비에 젖어도 솜털같이 보드랍기만 한 네 목소리.
헛것이 보이고 들리는 건 네 허상이 만들어 낸 비상식적인 증상들이다.
"은호 형님, 형님!"
그 허상이 너무 또렷이 귓가에 와서 박혔을 땐 무시하기엔 정말 뒤에 와 있는 듯한 섬칫함 마저 들어 결국 고개를 돌렸다.
"하아-"
"야...!"
진짜 손영주다.
영주가 진짜 내 뒤를 따라 뛰어왔다.
양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던 그는 비에 젖은 머리칼을 좌우로 털더니 손에 들린 우산을 펼쳐보였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내게 씌워준다.
저는 다 맞고 있으면서.
"영주야."
"형님 비 맞고 가는 게 싫어서요."
"........"
내게만 씌워진 그 우산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영주의 손을 잡아 그 쪽으로 밀어주었다.
우리는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함께 비를 피하게 되었다.
"형님 다 쓰십-"
막 영주가 내게 우산을 다 기울이려고 할 쯤에 하늘에서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리고 곧 이어 번쩍거리며 궂은 빗줄기에 힘을 실었다.
영주가 놀라서 두 귀를 막고는 쪼그려 앉았고 덕분에 우산은 저만치 나뒹굴어 우리 둘은 비를 쫄딱 맞게 되었다.
"일단 일어나봐,"
"그렇게 우뚝 섰다가 벼락을 맞으면 어찌합니까."
그 와중에 벼락 맞을 걱정이나 하고 있는 영주가 귀여워 피식거릴뻔했다.
저만치 떨어진 우산을 재빨리 주워들고는 그의 하얀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가까이 보이는 정자쪽으로 뛰었다.
그나마 비를 피할 수 있는 은신처는 딱 저것뿐이라.
"형님 쫄딱 젖었습니다."
"너도."
여전히 우르르 쾅쾅 하는 번개 소리에 긴장한 영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난 그에게로 다가가 잔뜩 젖은 머리칼을 털어주었다. 이미 젖어 다 들러붙은 티셔츠도 탈탈, 소용없는 손짓으로 털어주었다.
"조금만 그치면 가자."
"네."
무릎을 굽히고 정자에 앉았다.
온몸이 젖어서 찝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얼굴로 자꾸 흐르는 빗물들을 대충 소매로 닦아냈다.
징글징글하게 쏟아붓네.
덕분에 영주와 다시 만날 수는 있었지만-
문득 모진 말을 하고 간 나에게 다시 와준 영주에 궁금해져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왜 따라 온 거야."
".........."
"진짜 비 맞고 갈까 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손영주가 별안간 말을 아끼더니 이내 무릎에 이마를 댄다.
그리고 잘게 떨리는 그 어깨를 보니,
"너 울어?"
".....흐흑."
"야, 야-"
왜 울어,
울거면 아까 울었어야지 않냐고 당황해서 그러자 그가 고개를 두어 번 젓고는 슬며시 나를 쳐다보았다.
빗물과 눈물에 얼굴이 전부 얼룩졌다.
그래도 그가 하얀 것 정도는 변함이 없었다.
유난히 눈이 크다는 사실도.
"형님이 저를 다시 안 볼 것 같아서 무서웠습니다."
"........"
"그래서 뛰어 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 말 듣지 않은 거요.
입술을 꾹 깨물고는 다시 눈물을 터뜨린 그가 코를 훌쩍인다.
그 눈물에 서운한 마음이 보상됐다고 말하면 나 너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손영주,"
".........."
"영주야."
손영주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한다.
나는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주다가 볼 쪽으로 내려가 그 보드라운 살결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울지마,
영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큰 눈에 나를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
그게 촉매제가 될 줄은 몰랐다.
내 이성의 끈이 영주의 집요한 시선으로 끊어질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널 부르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조금 더 일찍 불러보았거나.
"혀, 형님....?"
"....피하지 마."
두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지며 영주가 정말 내 코 앞으로 다가왔을때 고개를 틀어 빗물에 젖은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영주의 어깨가 놀라 흠칫 움직이고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슬쩍 어루면서 계속해서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그냥 입맞춤. 그 이상도 아니었다.
"........."
물기를 머금은 두 입술이 떨어졌고 손영주가 눈을 꾹 감은 모습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뒤늦게 꽉 다문 입술에 내가 녀석을 놀라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영주야?"
"........."
"영주야 눈 떠."
그제야 잔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뜬 영주가 꽉 쥔 양손을 펼치더니 제 얼굴을 가려버린다.
"저, 저는 가보겠습니다."
무작정 일어나서 다시 빗속으로 들어가려는 손영주의 팔목을 재빨리 잡았다.
야, 천둥번개 무섭다고 할 땐 언제고 이 빗속을 헤쳐간다는거야-
"......노, 놓아 주십시오."
"됐어."
내가 갈게.
넌 비 좀 그치면 가.
내 쪽은 제대로 쳐다도 못 보는 영주에 내가 먼저 정자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