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아빠 손에 죽은 건, 내가 막 초등학생이 됐을 때, 그러니까, 내가 여덟 살 때야. 맞아, 아빠는 엄마를 사랑했겠지.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임신한 사창가 창녀라도 버리지 않은 거지. 그토록 냉철한 사람이. 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까지 엄마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어. 아빠한테 엄마는 지금까지 죽인 수 많은 사람 중에 하나 일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만나면 한 번 물어보려고. 엄마 기일이 언제인지 아냐고. 하 준아, 너도 부모님하고 어쩌다가 한 번 만나지? 나도 그랬어. 뭐, 그래도 너보단 주기가 짧았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아빠가 만나러 와줘으니까. 만약 정말로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다면, 이해도 가. 커가면서 점점 엄마랑 닮아가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아빠가 엄마를 죽이던건, 아마 비가 오는 날이었을거야. 엄마가 아빠하고 만나서 얘기 한다고 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내가 확실히 기억해.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나는, 창 밖의 빗소리를 들으면서, 밤새 엄마를 기다렸어. 그러다 깜빡 잠들었던 것 같아. 아빠하고 할머니가 와있더라. 할머니는 비 때문에 차가운 몸으로 나를 안더니, 이 어린 것이 밤새 제 어미를 기다렸구나, 하고 울었어. 그때 할머니가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선해. 제 어미, 지 버리고 도망간 것도 모르고 기다렸구나. 할머니는 엄마가 도망간 거라고 믿었어.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자기 아들이 살인자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태니까. 며느리라고 제대로 인정도 안한 여자가 도망간 거라고 믿은 거겠지. 아마, 아빠가 그렇게 할머니에게 전했을 거고. 원래 할머니는 나를 별로 안 좋아했어. 우리 엄마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나를 손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하지만, 그날부터는 엄마한테 버림 받은 불쌍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잘 대해줬지. 마치 친 할머니처럼. 아, 친 할머니 맞구나. 뭐, 그래도 할머니 덕분에 많이 외롭거나, 생활에 문제가 있진 않았어.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나이였으니, 보호자는 당연히 필요했고. 나는 어린 마음에 할머니가 잘 대해주시니까, 참 좋았던 것 같아. 지금도 할머니께는 감사해. 따로 가연이와 살게 된 뒤에도 몇 번 와주셨고. 가연이 한테도 잘 대해 주셨어. 가연이도 친 손녀니까. 물론 가연이 아버지 일은 별로 입 밖에 내고 싶어 하시지 않았고. 나도 삼촌하고 숙모 일인데 많이 속상했는데, 자기 아들하고 며느리 일인데, 오죽하시겠어? 지금도 할머니가 건강하신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엄마를 생각하면 별로 좋아하면 안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은인이라니, 참 얄궂지? 어쨌든 나는 지금도 가끔 엄마를 생각해, 이러면 참 훈훈하고 감동적 일 텐데. 슬프게도 나는 이제 엄마 얼굴도 기억이 잘 안나. 그래도 내가 엄마랑 많이 닮았다니까, 거울을 보면 엄마 얼굴이 약간이나마 보이는 기분이야. 그래서 내가 계속 나 예쁘다, 예쁘다, 자화자찬한 거야. 우리 엄마는 분명 예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그런 엄마 닮은 나도 당연히 많이 예쁘겠지? 가연이 엄마는 가연이랑 헤어질때 팔찌를 주셨잖아. 우리 엄마도 무언가 주신게 있다? 정확히는 아빠랑 엄마가 같이 주신거지만, 이것만큼은 엄마가 주신 거라고 믿고 싶어. 바로 이거야. 뭔지 잘 모르겠어? 내가 가리키고 있는 거. 아랫배가 아니야. 그 안에 자궁. 아직 미숙하고 작은, 더 성장할 내 자궁. 생리를 시작한지도 얼마 안된 자궁이지만, 언젠가 소중한 사람의 아이를 품을 자궁. 물론 이건 엄마가 의도적으로 남긴게 아니지. 어쩌다 보니, 내가 딸이 다보니, 이게 있는 거지. 엄마가 제대로 남긴 건, 이거. 편지 같지? 항상 가지고 다녀. 왠지 부적 같은 느낌이라. 내용은 이래. ‘세정아, 이 편지가 읽혀지고 있다면, 아마 네 아빠가 엄마에게 안 좋은 일을 한 후겠구나. 부디 우리 세정이는 좋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만나으면 해서 짧은 글을 남긴다. 너만은, 소중한 사람의, 소중한 아이를 가지렴. 물론 세정이도, 아빠도 엄마에겐 없어선 안될, 소중한 사람들이란다. 하지만, 엄마는 부디 우리 세정이가 행복했으면, 하고 바란단다. 지지말고 강하게 살아가렴. 언젠간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럼 이만 줄일게. 오늘도 세정을 사랑하는 엄마가.’ 뭐, 이런 내용이야. 조금 슬프지? 엄마도 아빠를 조금이나만 사랑한 것 같긴해. 하지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의미가 사랑 때문인지, 금전적인 부분인지는 나도 잘모르겠어. 그럼 여기서 한 가지 물어도 돼? 하 준아, 너는 진짜로 나를 사랑해 줄 수있어? 이렇게 어린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 우리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서로를 잊게될 수 도 있어. 아니, 아마 잊게 될거야. 하지만, 지금 이렇게 묻고 싶어. 너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해줄 자신있어? 엄마가 남긴 말처럼, 내 자궁에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아이를 만들어 줄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버리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이건 끝까지 함께 해줄수 있어?”
한참 말을 이어가던 세정이, 나에게 그런 물음을 던지자, 일동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벌써 몇 번째 보는지 모를, 눈물 자국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소녀의 얼굴을. 그리고 대답했다.
“물론이지. 이런 부족한 나라도 괜찮다면, 기꺼이 사랑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