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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노미
작가 : 정진교
작품등록일 : 2020.9.23

1919년에 태어나신 나의 할머니 오노미와 남편 정진화 그리고 그 동생들 윤화, 남화, 석이, 민화, 태화, 정화 이야기.

그때 노미는 열아홉 아리따운 소녀였고, 남편 정화와 여섯 도련님들은 스물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의 근동에 소문난 꽃같은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노미의 꽃길같은 시집살이는 정말 꽃길만 같을 줄 알았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 대신 여섯도련님들의 어린 어머니 노릇을 하며 한명 한명 제짝을 찾아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대는 일제강점기. 아프고 어두운 시절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들과 소중한 사람들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또 잃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노미의 가족들은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고,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절 누구보다 찬란했고,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으며, 아팠지만 따듯했고, 슬펐지만 행복했다.

공출, 가뭄, 강제징용, 그리고 빼앗긴 소녀들... 아파서 부끄러워서 또 몰라서
아무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이야기이기에 감히 시작해보려 한다.

저는 작가 정진교입니다.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22화 쇠붙이
작성일 : 20-09-29 06:13     조회 : 34     추천 : 0     분량 : 7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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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2화 쇠붙이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 년 중 가장 바쁘고 가장 좋은 시기였다. 가장 중요한 농사인 벼농사가 마무리되는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들은 어느새 누렇게 익은 벼들로 황금 물결을 이루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배부르고 뿌듯하고 흐뭇한 광경이 있을까. 지금이야 그저 먹을 것들을 마트에서 사면 되고 입을 것들은 그저 홈쇼핑에서 고르면 되지만 그때는 내가 먹을 것은 내가 심어서 키워서 거두어야 했고, 내가 입을 것은 겨우내 베틀을 돌려 짠 천으로 직접 지어 입어야 했다.

 

 6월이면 보리와 밀을 거두고, 9월이면 쌀을 거두어 일 년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하늘이, 땅이 도와주지 않으시면 그저 굶을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나마도 험악한 시대를 만나 6월 공출, 9월 공출로 농사지은 것들을 대부분 다 일본에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정화는 요즘 신나는 일이 생겼다. 집에서 키우는 암소가 새끼를 낳은 것이다. 부모님과 진화는 동생들 교육문제로 요즘 고민이 많았다.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학교에 아들들을 보내는 것도 마땅치 않았고, 그렇다고 내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은 채 무식쟁이 농사꾼으로만 키울 수도 없었다.

 

 영특한 남화와 정화가 특히 더 마음에 걸렸다. 몇 해 전 남화 공부 시킬 몫으로 소를 키워 팔았다. 그리고 만주든 일본이든 남화를 보내어 공부시키리라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태어난 송아지는 정화 몫이었다. 어떻게든 정화만은 중학교를 마치게 하고 부산에 있는 친척 집에 보내 고등교육을 받게 할 계획이었다. 아버지는 이번 송아지는 정화 몫이니 정화가 책임지고 잘 키우라고 하셨다.

 

 

 요즘 남자들은 틈만 나면 마을 공터에 모여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풍물 연습을 했다. 추석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풍물 소리를 듣는 것은 설레고 흥겨운 일이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우면 여기저기 캐럴이 흘러 흥겨운 기분이 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이제 드디어 추석이 내일이다. 추석에 먹으려고 안 따고 남겨둔 누런 호박들을 따다 속을 긁어서 호박지짐이를 했다. 지짐이 좋아하는 도련님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커다란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호박 꼭지에 들기름을 찍어 솥뚜껑에 휘휘 바른 후 밀가루와 섞은 호박속을 한 국자씩 떠서 기름에 지지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맛있는 호박지짐이가 되었다. 막 지져낸 호박지짐이는 채반에 놓아두는데 돌아서면 그사이 누가 가지고 갔는지 없다. 노미는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그저 누가 먹었으려니 하고는 또 호박 반죽을 지져낼 뿐이다. 그 뜨거운 것을 태화가 쥐고 뛰어다니면 그걸 뺏겠다고 민화랑 정화가 쫓아다녔다. 먹는 것에 영 관심이 없는 남화랑 윤화도 오늘만큼은 젓가락을 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네 명절은 전과 함께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녁을 일찍 먹고 치운 후 식구들이 모두 둘러앉아 송편을 빚었다. 미순이랑 미순이 어머니까지 건너오셔서 송편을 빚었다. 노미는 시집와서 처음 치르는 명절이라 잔뜩 긴장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나 싶어 마음만 바쁜데 정작 이 집 남자들은 익숙한 듯 알아서들 고기를 사 오고, 제기(제사에 쓰는 그릇)들을 꺼내어 닦았다. 몸이 좀 나아지신 어머니도 송편 빚는 자리에 함께 앉으셨다.

 

 “성님, 이번 가을에는 공출이 좀 덜해야 할 틴디라.”

 

 하며 미순이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게 말일세. 명절이 와도 반갑지 않은 것이 놈들 위세가 날이 갈수록 포악하니....”

 

 어느새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지 30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진화네 동네는 큰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바닷가 외딴 동네였기에 지금까지 크게 일본의 포악을 겪지 않았었다. 하지만 일본의 중일전쟁이 길어질수록 전쟁물자를 대는 일이 더 어려워지고 있었던 일본은 조선의 구석구석까지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그래, 동상, 우리 미순이 언제 보내주려나?”

 

 하고 진화 어머니가 미순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미순이 갑자기 자기 얘기가 나오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지야 형님이 언능 데리고 가시믄 좋지라.”

 

 하며 미순이 어머니는 진심 반가운 눈치다.

 

 “그래도 석이 혼인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나?”

 

 하고 진화 어머니가 말하자,

 

 “그렇지 않아도 지 고향에 말을 넣어놓았어라. 곧 기별이 올 것이요.”

 

 했다.

 

 “조무래기 같던 녀석들이 언제 이만치 커가 시집 장가 가는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네.”

 

 하며 진화 어머니는 흐뭇하게 웃으셨다.

 

 “그저, 우리 진화 색시 같은 사람만 있으믄 내 더 바랄 것이 없어라.”

 

 하며 석이 어머니는 노미를 바라보며 은근히 웃으셨다.

 

 “우리 석이가 여 형수를 월매나 좋아라 하고 따르는지, 형수님 같은 사람만 있으믄 당장 내일이라도 장개간다 했어라.”

 

 하며 석이 어머니는 석이 닮은 눈으로 웃으셨다.

 

 “눈이 그리 높으면 장개가기가 겁나 어려불틴디.”

 

 하고 미순이 거들었다. 어머니들이 모두 하하하 하고 웃으셨다.

 

 

 다음 날, 새벽 꼬꼬닭이 우는 것을 신호로 집집이 토란국을 끓이고 각색 지짐이를 부쳐내는 냄새로 가득해지면, 손님들이 오시고, 홍동백서로 제사상을 차리고,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며 추석 차례를 지낸다.

 

 장난꾸러기 도련님들도 오늘만은 어르신들 앞에서 한없이 의젓하게 예를 갖추어 모든 순서를 치러냈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들과도 얘기를 나누고 동네 이웃들과도 먹을 것을 나누며 인사를 다닌다. 그렇게 추석 명절은 추석날을 중심으로 사나흘씩 이어지는 흥겨운 시기였다.

 

 집마다 차례를 지내고 났을 때쯤, 드디어 풍물놀이를 알리는 징소리와 함께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장 아재가 깃발을 앞세우고 동네를 돌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 깃발을 따라 마을을 돌며 복을 기원하고, 홍색 청색 노란색 띠를 두르고 상모를 쓴 남자들이 각자 악기들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진화네 남자들도 모두 풍물패 옷으로 갈아입고 각자 자기 악기들을 들고 나섰다. 오늘을 위해 가장 열심히 연습한 정화가 노미의 응원을 받으며 제일 신나서 뛰쳐나갔다.

 

 

 진화네 동네 풍물놀이는 멀리서도 구경 온다고 하더니 정말 공터에는 낯선 이들도 많이 보였다. 삼십 명 남짓한 동네 남자들이 다 모이자 대열을 갖추더니 드디어 꽹과리 소리를 시작으로 풍물놀이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보는 풍물놀이에 모두 가슴이 뛰었다. 노미는 시집오던 날 잠시 도련님들 풍물 솜씨를 구경하긴 했지만 이렇게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은 처음이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째쟁 째쟁’ 하는 꽹과리 소리, ‘두둥 두둥 두둥둥.’ 하는 북소리, 그 사이로 천지를 울리는 징소리, 날아갈 듯 흥을 돋우는 장구 소리와 귀를 사로잡는 태평소 소리 속에 일곱 소년들이 섞여 있었다.

 

 “언니, 언니, 진화 오라버니 좀 보시오. 좀처럼 풍물 잘 안 잡는디, 오늘은 징을 들었어라.”

 

 하고 미순이 진화를 가리켰다. 눈이 마주치자 진화가 노미를 향해 찡긋하고 웃는다. 노미는 부끄러워서 눈을 피했다. 미순이는 혹시라도 윤화가 자기를 봐줄까 하고 계속 꽹과리 든 윤화 만 바라보는데 윤화는 째려보지조차 않는다. 미순이 좀 서운하다.

 

 어느새 모여 있는 여인들 사이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온다. 태화가 태평소를 부는 사이사이 빙긋 웃을 때마다 ‘어머나.’하고 넘어가는 소녀들도 있고, 민화가 장구채를 휘두르며 어깨춤을 출 때마다 ‘아이고!’하고 소리치는 여인들도 있다. 꽹과리를 든 석이가 한 번씩 마당 중앙을 휘몰아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탄성을 질렀다.

 

 키 크고 점잖은 어린 훈장님인 줄만 알았던 남화가 북을 두드리는 소리는 심장을 뜨겁게 했다. 조르르 앉아있는 서당 제자들이 박수를 치며 남화의 북소리에 맞추어 어깨짓을 했다.

 

 정화는 줄을 단 상모를 돌리며 소고를 신나게 쳤다. 특히 어린 소녀들이 정화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를 보냈다.

 

 연주는 어느새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석이 태화 민화 이렇게 셋이 중앙에서 휘돌기 시작하자 모인 사람들의 탄성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화가 제일 긴 상모를 돌렸다. 꽤나 오래 연습하더니 제일 어려운 기술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양반집 자제들이 풍물을 한다고 아버지는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지만, 조선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우리 것을 지키는 일에 양반 상놈이 어디 있느냐고 진화가 아버지를 설득했다고 했다.

 

 

 그때였다. 마을 어귀에서 요란한 엔진소리가 들려오더니 희뿌연 먼지를 날리며 트럭 서너 대가 맹렬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공출트럭이었다. 사람들이 미처 피할 틈도 없이 트럭들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서 포위하듯이 섰다. 그리고 몽둥이를 든 수십 명의 남자들과 총칼을 든 일본군과 순사들이 내렸다.

 

 트럭에서 내린 일본 대장이 제일 먼저 중앙에 있던 깃발을 뺏어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발로 밟았다. 그는 뭐라고 째지는 일본말로 소리를 쳤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풍물패들은 순간 몽둥이를 든 남자들과 총을 든 일본군들에게 제압당했다. 그 일본 대장 옆에 있던 완장을 찬 조선인 남자가 일본 대장의 말을 전했다.

 

 “황국신민으로 하나가 되어 성전을 치러야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감히 조선의 음악을 하며 놀이판을 열다니! 이것은 천황폐하의 위업을 정면으로 훼방하는 악질적인 짓이다!”

 

 그러자 더 격앙된 목소리로 일본 대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뭐라고 고함을 쳤다.

 

 “다 죽고 싶나!”

 

 하고 옆에 서 있는 완장 찬 사내가 더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그러면서 그 일본 대장은 남화가 들고 있던 북을 빼앗아 발로 밟아 부숴버렸다. 북은 내동댕이쳐지며 ‘두둥둥’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 북은 발에 밟혀 찢어지면서도 마지막까지 ‘우두둥 둥둥 턱’하는 북다운 소리를 내었다. 모여 있는 모두가 순간 ‘으악!’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완장 찬 사내는 그조차 허락하지 않고

 

 “조용히 하라!”

 

 고 고함쳤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입을 딱 다물고는 벌벌 떨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 대장까지 와서 설치는 것을 보니 이번 공출은 아무래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추수가 끝난 동네마다 곤욕을 치렀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진화네 동네 차례인 모양이었다.

 

 공출은 언제나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쳤다. 시간이나 날짜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은 추수 때가 되면 다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공출에 벌벌 떨어야 했다. 그들은 장부에 적은 대로 가져간다고 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이 정해질 리가 없었다. 그저 밉보이면 많이 빼앗기고, 줄이라도 대고 있으면 좀 사정을 봐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공출은 평소와 달랐다. 그저 완장 찬 면직원들이랑 순사들이 하던 공출에 일본 대장이랑 군인들까지 합세했다. 단단히 벼르고 온 것이었다.

 

 윤화가 벌떡 일어나려는 것을 곁에 있던 진화가 어깨를 눌러 말렸다. 아재들 속에 섞여 있던 도련님들 표정을 살피며 노미는 조마조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미순이도 윤화가 일어서려다 진화가 말리는 것을 보았다. 미순이 노미의 팔을 움켜잡았다. 미순이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도련님들 표정을 보며 노미는 아무도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대장은 이번에는 석이가 들고 있던 꽹과리를 획 낚아챘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으며 일본말로 대장은 이번에는 석이가 들고 있던 꽹과리를 획 낚아챘다. 그리고 비릿하게 웃으며 일본말로 무어라고 말했다. 그것을 완장찬 사내가 조선말로 바꾸어 말해주었다.

 

 “놋쇠와 철은 모두 공출대상인 것을 모르나?”

 

 대장은 부하들에게 놋쇠로 된 악기들을 모두 빼앗으라고 명령했다. 풍물패들은 그 자리에서 악기들을 모두 빼앗겼다. 그리고 들고 있던 장구와 북은 모두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찢기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 악기들은 빼앗기고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제가 가진 아름다운 소리들을 내었다. 그 악기들이 내는 마지막 소리였다. 그 악기들이 내는 마지막 음악이었다.

 

 그렇게 빼앗긴 징 꽹과리들이 트럭에 실렸다. 그리고 누군가

 

 “공출이다!”

 

 라고 소리쳤다. 몽둥이를 든 남자들과 총을 든 일본군들이 마을로 흩어졌고 모여 있던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모두 각자의 집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누군가

 

 “놈들이 소 잡아간다!”

 

 고 소리쳤다. 순간 정화가 벌떡 일어나 몸에 두른 삼색 띠를 펄럭이며 제일 먼저 집으로 뛰기 시작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정화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진화와 다른 동생들도 노미와 미순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집이 쌀가마니들이 실려 나왔고, 소들이 끌려 나왔다. 그리고 놋쇠 부서지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쨍그랑거리며 들려왔다.

 

 가족들이 집에 도착하니 이미 일본군들과 몽둥이 든 남자들이 있는 대로 놋쇠 그릇, 솥단지들을 마당 한가운데 내동댕이치고 있었다. 거기에는 노미가 시집오며 가져온 얼마 쓰지도 않은 유기그릇들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새끼를 낳아 아직 거동이 편치 않은 진화네 암소가 끌려 나왔다. 태화가 순간,

 

 “황순아!”

 

 하고 불렀다. 황순이는 애타게 목놓아 울었다. 새끼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끼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화가 먼저 도착해 어딘가로 숨긴 모양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화가 또 움찔하며 나서려는 걸 진화가 다시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윤화는 그런 형을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귀가 타는 듯이 빨개지기는 진화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내 석이 형네 가볼게.”

 

 하며 민화가 석이 네로 뛰었다. 남자가 석이뿐이니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남화도 따라 뛰었다. 뛰어가기 전 남화는 진화를, 윤화를 바라보았다. 형제들은 서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야 한다고 눈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온 집 안을 이 잡듯이 뒤진 놈들은 곳간에 있던 곡식들을 한 톨도 남김없이 가져갔다. 집 안에 쇠붙이란 쇠붙이는 부지깽이까지도 탈탈 털어 갔다. 그리고 장독대 옆에 씻어서 엎어놓은 청자 요강까지 들고 갔다. 도대체 그건 뭐 하려고 들고 가는지 노미는 이후로 공출이 온다, 일본놈들이 떴다고만 하면 요강부터 숨겼다.

 

 커다란 무쇠솥을 세 개나 들고 가면서 한 일본군인이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다. 그들이 떠드는 일본말 속에서 ‘탱크’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들이 지금 탱크 어쩌고저쩌고한 거 맞지?”

 

 하고 진화가 노미에게 물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대충 다 알아들은 노미는 기가 막혔다.

 

 “야, 저 솥으로 탱크를 만들 수 있겠다고 좋아하네예.”

 

 그렇게 실려 가는 솥단지들을 바라보며 진화가 말했다.

 

 “사람을 먹여 살리던 쇠붙이가 사람 죽이는 쇠붙이가 되겠구나.”

 

 노미는 그때 터질 듯이 이글거리던 진화의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긴 것이 분해서만이 아니었다. 진화의 말대로 세상이 서로 죽이는 일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공출 트럭이 한가득 쌀가마니와 쇠붙이, 그리고 목놓아 우는 동네 소들을 다 싣고 사라진 후, 온 동네는 여기저기 곡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분을 못 이긴 어머니는 결국 자리에 쓰러지셨고, 즐거워야 할 추석 명절이 갑자기 곡소리 가득한 지옥이 되었다. 다행히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지만 다친 이들은 꽤 많았다.

 

 석이와 함께 돌아온 민화와 남화의 표정도 처참했다. 석이도 소를 빼앗겼다. 도대체 정화는 송아지를 데리고 어디에 숨은 것일까. 태화와 민화는 정화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집 뒤 텃밭에 쌓아둔 수숫대 생각이 났다. 거기다 싶어 식구들 모두 그리고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숫대를 헤치고 보니 그 안에 정화가 송아지를 끌어안고 눈물범벅이 된 채 울고 있었다.

 

 “정화야.”

 

 하고 진화가 안타깝게 불렀다.

 

 “큰형!”

 

 하며 정화는 진화에게 매달려 엉엉 통곡을 했다. 아직 젖도 안 뗀 어린 송아지를 앞으로 어미 없이 어찌 키울지 앞이 캄캄했다.

 

 “다들 땅 팔 수 있는 것들 가지고 모이라. 메주 뜨는 방 바닥을 파야겠다.”

 

 하고 진화가 동생들을 향해 말했다.

 

 “방바닥은 와예?”

 

 하고 민화가 물었다.

 

 “소를 잡아가는 놈들이 사람은 안 잡아가겠나?”

 

 소년들은 아직 삼색 띠를 두른 풍물패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손에 들었던 악기들은 모두 빼앗긴 채였다. 앞으로 무엇을 더 빼앗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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