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설마 아니겠지 싶어서……. 라파엘은 이 회사의 삼 대 천사 중 한 명이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술 한 잔을 더 주문하던 비비안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키리안의 말을 채갔다.
“시간의 형벌에 갇혀 있지.”
비비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라파엘이라는 이름은 불리지 않는지 오래야. 언급되는 것조차 거의 금기시되는 분위기 때문에, 간간이 ‘에로스’라고 돌려서 불러.”
비비안이 주문한 술이 나왔다. 아까 마시던 밝은 색감의 술과는 달리, 이번에는 굉장히 검붉은 술이었다. 키리안은 저 술이 굉장히 도수가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비안이 키리안을 향해 물었다.
“왜 에로스라고 불리는지 알아?”
라파엘에 대해서는 그동안 언급으로만 들었던 키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에로스는 인간인 프시케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의 분노를 샀잖아.”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은 라파엘이 왜 형벌을 받았는지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천상계의 금기를 깼군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비비안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이 술잔을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며 마저 말했다.
“문제는 라파엘이 엘리야가 제일 믿고 따랐던 파트너였다는 거야. 당연하지, 자신의 헬퍼였는데……. 엘리야가 1위도 자발적으로 몇 번 내어 줄 정도였어.
게다가 라파엘은 인간을 사랑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그 인간에게 행운을 일방적으로 몰아주고 있었다는 게 밝혀졌어. 그건 이 회사의 규칙을 완전히 깬 거지. 그러니 엘리야의 배신감이 컸겠지.”
키리안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비안도 침묵을 지켰다. 고요해진 바 안에서 키리안이 말했다.
"시간의 형벌에서 빠져나온 천사나 악마가 있던가요?"
“없지.”
눈썹이 아래로 쳐진 채로 그녀는 습관적인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술잔을 빙글빙글 자신의 손 위에서 놀리는 비비안의 눈은 슬퍼 보였다.
“그 형벌에서 빠져나오면 신을 뛰어넘는 '전능'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니까.”
비비안은 그때 일을 회고했다. 자신이 존경하던 선배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쇠사슬에서 구속되어, 지옥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라파엘의 위로 쇠 방망이가 가차 없이 라파엘의 날개를 꺾었다. 재판은 지옥에서 비공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그럼에도 그녀는 너무나 무력했다. 끌려가기 직전 비비안과 눈이 마주친 라파엘은 입 모양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가 만든 팀을 부탁해.’
비비안은 그날 이후로 라파엘 선배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비비안은 오늘 키리안에게 엘리야에 한한 라파엘의 정보를 다 알려줬다.
하지만 라파엘이 천사 악마 간 중재팀을 만든 선배라는 건 끝까지 알려주지 않을 것이었다.
*
구름이 잔뜩 끼어, 가느다란 초승달마저도 아예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밤하늘 아래, 가브리엘은 영혼을 빼앗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개를 떨군 가브리엘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가브리엘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탄 쓰레기들 위에 놓여 있는 시체였다. 업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 가브리엘은 사내 쓰레기 소각장을 지나가다가 소각장에서 삐죽 나와 있는 두 다리를 발견했다. 다리 옆엔 피에 젖은 깃털들이 더럽게 뭉쳐져 있었다. 피비린내와 유황 냄새에 가브리엘은 황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 게 지금 펼쳐지고 있는 풍경이었다.
피해자의 얼굴을 확인한 가브리엘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천사는 회사 내에서 범죄에 대한 재판이 있을 때마다 판결을 주관하는 판사였다. 물론 그의 판결은 대부분 신의 뜻으로 이뤄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천사가 회사 내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컸다.
“세상에……”
지팡이를 어깨에 걸친 가브리엘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붉은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청록색 눈을 빛내며 가브리엘이 중얼거렸다.
“악마들에게 너무 불리하게 되었는걸.”
엠은 가브리엘에게 확인받을 서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었다. 일에 열중해 있는 가브리엘의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엠이 봤을 땐, 가브리엘은 출근하면서부터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가브리엘은 오늘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신경질이 난 표정으로 밀려있던 일을 묵묵히 처리했다. 엠은 가브리엘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찾기 위해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엠은 가브리엘이 얼마나 미남인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날렵한 턱에 오뚝한 콧날을 가진 얼굴을 보며 엠은 신이 가브리엘을 창조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많이 들였을지 생각했다. 일하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가브리엘의 이마를 스쳤다. 그로 인해 그가 약간 눈을 찡그리는데, 그 모습조차도 마치 예술가가 일부러 그렇게 창조한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엠은 어느새 가브리엘의 풍성한 속눈썹에서 그의 윗입술까지 훑어내려 보고 있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를 기계적으로 읽던 가브리엘은 두통에 잠시 눈을 감았다.
‘소각장에서 본 시체가 계속 떠오르는군…….’
그는 끔찍한 시체의 잔상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 문제는 자칫하면 그동안 쌓아왔던 회사의 새로운 방침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일이었다. 천사들과 악마들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질 것이라 예상한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이때 가브리엘의 시야 안에 맑은 차가 담긴 찻잔이 불쑥 들어왔다. 시나몬 향이 가브리엘의 코를 스쳤다.
“저……. 가브리엘 님 컨디션 안 좋아 보이시는데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엠이 쭈뼛거리는 태도로 차를 가브리엘 앞으로 내밀었다. 그걸 본 가브리엘은 내내 인상을 쓰고 있던 얼굴을 피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맙긴 한데……. 저는 시나몬 향을 그렇게 안 좋아해서요.”
“아, 그…… 그러신가요?”
엠은 자신의 까탈스러운 상사를 보며 속으로 볼멘소리를 했다.
‘그냥 성의 보고 얌전히 먹을 것이지 말이 많아.’
가브리엘은 한쪽 손에 턱을 괸 채 부드럽게 말했다.
“왜 하필 시나몬 차로 가져왔어요?”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들고 온 건데, 가브리엘이 진지하게 물어서 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냥 이게 집중력에 좋을 것 같아서…….”
그 순간 엠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바늘로 쑤셔 넣는 것과 같은 두통을 느꼈다. 엄습하는 고통에 엠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엠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그냥 먹어요.’
누가 말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이 그저 툭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 목소리 뒤엔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고 엠은 더욱 어지러움을 느꼈다. 가브리엘은 안색이 창백해진 엠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장난친 거예요. 사실 좋아해요. 아니, 좋아하게 되었다는 게 정확하려나.”
가브리엘의 목소리를 듣자 신기하게도 엠은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엠은 미소 짓는 가브리엘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가브리엘은 음미하듯이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을 내려놓는 가브리엘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여, 엠은 속으로 뿌듯했다. 가브리엘은 엠의 손에서 구겨지고 있는 서류를 가져갔다. 단숨에 서명을 마친 가브리엘은 싱글싱글 웃으며 엠을 향해 말했다.
“간단한 서류인데. 왜 바로 안 오고 얼굴 보고 있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엠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그는 속으로 가브리엘을 샌드백으로 만들어 때리는 상상을 했다.
‘아니……. 이 양반 알면서 모른 척하고 있던 거야? 즐겼네, 즐겼어.’
“물론, 저도 제 얼굴이 완벽한 건 압니다만.”
가브리엘의 말을 듣자마자 엠은 못 참고 소리를 빽 질렀다.
“와! 천사가 이렇게 양심 없어도 돼요?”
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쿵쿵거리며 달아나 문을 열었다. 엠의 등 뒤에 대고 가브리엘이 물었다.
“어디 가요?”
“화장실이요!”
엠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쾅-! 소리를 내며 크게 닫혔다. 가브리엘은 문을 열고 나가던 엠의 귀가 새빨개져 있던 걸 떠올렸다. 가브리엘은 얼굴을 손에 묻은 채 키득거리며 웃었다. 웃고 난 뒤 그는 차를 한 모금 더 느릿하게 마셨다. 시나몬 향을 맡으며 그는 어느새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은 내 어떤 점이 좋아서 만나? 물론 너무 많아서 고르기 어렵겠…….’
‘외모요. 외모’
‘뭐?’
‘가브리엘 님은 외모 말고는 볼 게 없어요. 어휴. 내가 아깝지. 그러니까 그 얼굴 관리 잘해요.’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중얼거렸다.
“내 얼굴이 제일 좋다고 했었는데.”
*
자신의 업무를 마치자마자 가브리엘은 미카엘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문을 세게 닫으며 들어오는 가브리엘을 보고 미카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브리엘은 미카엘의 표정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차분한 걸 보고 속에서 열불이 났다. 흥분한 얼굴로 가브리엘은 침착함을 유지하는 미카엘을 향해 다가갔다.
“어쩌자고 그전에도 천사가 살해당한 걸 숨겼어! 일은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 나중에 갑자기 밝혀지게 되면 악마들이 엄청나게 피해를 볼 텐데!”
“그 전 사건은 분명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어.”
“이젠 아냐, 두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났잖아. 연쇄살인 사건이면 다음 피해자가 언제 생겨날지 모른다고. 이젠 수사관 인력을 늘려서라도 그들에게 맡겨야 해.”
가브리엘의 말에도 미카엘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잠자코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 미카엘을 보고 가브리엘이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왜 망설이는 건데!”
“…….”
“설마…… 신께서 명령하신 거라도 있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미카엘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분함을 내내 유지하던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진 순간이었다. 미카엘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께서 이 일을 수사대가 맡지 않으시길 원하셔. 공식적으로 사건을 해결하기보다는, 비밀리에 처리되는 걸 바라셨어.”
“그래서 사건 관련된 보고서들이 다 엉망이었군. 여기 오기 전에 한 번 읽어봤는데, 피해자에 대한 정보가 대부분 극비처리 되어 있었어. 대천사 직위인데도 볼 수 없는 정보가 흔하지 않은데 말이지.”
“극비로 처리되어 있는 부분의 정보는 나도 알지 못해. 그 정보를 알고 있는 건 신뿐이야, 맹세하지.”
그 말을 들은 가브리엘은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서 날카롭게 추리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이 혹시 다 신과 어떤 일이 연관된 자들인가? 신께서 이 피해자들의 신변을 공개하지 않잖아.”
“가브리엘, 쓸데없는 추측은 하지 마. 그래도 이번 두 번째 피해자의 신변은 어느 정도 정보를 공개하셨어.”
“아무리 생각해도 수사대에 맡겨야 할 일인데, 이건.”
“이미 내가 그전에 몇몇 믿을만한 악마와 천사에게 사건을 맡겼어.”
그 말을 들은 가브리엘은 코웃음을 쳤다. 가브리엘은 미카엘이 누구보다 신의 뜻을 따를 천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겐 어떤 말도 없이 자신의 선에서 일을 처리한 것일 테다. 그는 항복의 의미로 양손을 든 뒤 말했다.
“신과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군. 라파엘도 사실 신의 명령 한 마디에 끌려가게 되었잖아.”
“가브리엘, 말조심해. 라파엘은 헬레네에 대한 비리를 저질렀으니 형벌을 받아야 했어.”
“그런데 이상하지 않았어? 라파엘이 그랬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나? 난 그걸 본 적도 없었는데, 단지 신의 명령 한 마디에 라파엘이 끌려가고 재판 과정도 엉망이었다는 거 너도 알잖아.”
가브리엘의 그 말에 미카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가브리엘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가브리엘도 미카엘의 그런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