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성은 서책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운종가 구경을 하고 싶어서였다. 들뜬 마음을 가득 안고, 성은 봉수와 함께 길을 나섰다.
“너는 운종가를 가봤느냐?”
“아니요.”
“가보고 싶지 않더냐?”
“사람 많은 곳은 싫어서요.”
“나는 보고 싶구나. 진정, 백성의 삶이 모인 곳이 아니더냐?”
“굳이?”
“스읍! 잔말 말고, 잘 따르기나 해라.”
“길은 아십니까?”
“봉수야.”
“예.”
“궐 밖 생활이 편하지?”
“그럴 리가요. 소인이 당연히 길을 안내해야지요. 예.”
“그래. 잘 안내해 보아라.”
***
“거 보세요. 아무도 없죠?”
“진짜네? 왜지?”
유아는 연실과 혜빈의 사가로 가는 길목에 들어섰다. 정말 인적이라곤 눈을 씻고도 없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사람이 보였다.
“어! 저기 사람 있네!”
“그럴 리가? 어머나! 진짜네?”
연실은 입을 실룩거리며 유아의 뒤를 따랐다. 유아와 연실을 마주한 것은 성과 봉수였다. 이 두 남자도 마주 오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봉수가 멀리서 보이는 연실의 실루엣을 보고 갸웃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외관을 잊을 리가 없었다.
“아! 그때 그!”
“응?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저하.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저하께서 출궁하신 이후로, 처음 웃음을 보이신 그 날.”
성은 봉수의 말에 멀리서 다가오는 여인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큰 덩치의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 성은 그때가 떠올랐다.
“그때 느티나무 아래서 울던 아이가 아니냐?”
“기억나십니까?”
“왜 또 여길 왔지?”
“그러게 말입니다.”
“궁금하구나.”
네 사람은 점차 가까워졌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용건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이 가는 길이 특별한 길이라 그 용건이 궁금할 참이었다.
“멈춰라.”
봉수가 지나치던 유아와 연실을 막아섰다. 연실이 뾰로통하게 답했다.
“왜 그러오?”
“어딜 가는 겐가?”
“전에 그 이상한 놈이네? 남이사. 어딜 가던 말 걸지 말랬지.”
“무, 뭐? 네 이년!”
“뭐? 이년? 네 이노옴!”
연실은 봉수의 호통에 되레 더 큰 소리로 맞받아쳤다.
“이, 이놈?”
“그래. 이놈! 옷만 번지르르 비단 걸친다고, 몸종이 정승 판서라도 된다디?”
“무, 뭐라?! 이, 천한 것이 어딜 비교하고! 내가!-”
“그만 하거라!”
성은 봉수의 말을 막았다. 유아도 연실을 잡아 당겨 싸움을 말렸다.
“괜한 의도는 아니니, 오해 말아라. 가는 길이 궁금하여 물어보고 싶었을 뿐.”
성의 말에 유아가 답했다.
“못 갈 곳이라도 가는 줄 아셨나봅니다.”
“이곳의 끝엔 혜빈마마의 사저가 있을 뿐이니, 혹여 아는 자인가 하여 물어보았다.”
“그러는 분은, 저 사저에서 나오시는 길이십니까?”
“그렇다.”
“내가 너를 본 적이 없다. 어느 집안의 사람이냐?”
“그러는 그 쪽은 뉘십니까?”
“나? 나는-”
“혜빈마마의 먼 사촌 조카 되시네.”
성은 놀란 눈으로 봉수를 쳐다보았다. 봉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깨를 으쓱했다. 성은 난감했다.
“아... 외척이시구나. 저는-”
“그나저나, 전엔 왜 울었느냐?”
성은 유아가 어떤 집안의 누구이냐는 것보다 그대 왜 그렇게도 서럽게 울었는지가 궁금했다.
“전에? 제가 우는 걸 보셨습니까?”
“그래. 보았다.”
“아...”
“왜 울었느냐?”
“그냥. 슬퍼서요.
성은 잠시 멍해졌다. 유아는 성에게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까와는 반대 길이었다.
“그럼 이만.”
성은 봉수와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이 두 남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운종가로 향하는 길은 오로지 하나 뿐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네 사람의 행선지가 같아졌다. 유아가 성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
“운종가로 가십니까?”
“너는?”
“저도 운종가로 갑니다. 저는 거의 매일 가지요. 거기 스승이 있어서요.”
“스승? 선비가 시장에 있단 말이냐?”
“에이~ 어디 선비에게만 배움을 받나요? 거기 백씨네 책방이라고, 운종가에서 젤루 유명한 책방 주인이 제 스승입니다.”
“책방 주인이 스승이라. 엉뚱하군.”
“도련님은 귀한 집에서 자라서, 이해하지 못하시겠네요.”
“너는 아니란 것이냐?”
“저는 운종가에서 자랐으니까요. 전 부모가 많아요. 연실이도 엄마고, 운종가 식구들도 다 어머니고, 아버지죠.”
“부모가 없느냐?”
“아니요. 저도 나름, 꽤 있는 집안 자식이에요.”
“헌데, 노비와 상인들을 부모로 여긴다?”
“그 깊은 세계를 이해하시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엔 없습니다.”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무시당해 본 적도 없이, 귀하게 자라셨군요.”
“뭐라? 건방지구나. 쫑알대는 것을 다 들어주니 여간.”
“쪼, 쫑알? 허! 쫑알거려서 민폐였다면 죄송하고요, 운종가 다 왔고요.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쫑알쫑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네 사람은 운종가에 도착했다. 참 사람은 언제나 많은 곳이었다. 유아는 연실과 함께 익숙하게 책방으로 향했다. 지나가며 아는 상인들과 인사도 하고, 엿도 얻어먹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반면, 성과 봉수는 멍해졌다. 이 사람들을 뚫고 어디부터 어떻게 가야할 지도 몰랐다. 미아가 된 것 같았다.
“책방이 어디라더냐?”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봉수가 가게 상인들에게 묻는 동안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은 성을 이리치고 저리 쳤다. 어린 성이 이리저리 치이는 동안 봉수는 물어도 가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황이 참으로 난감해졌다.
“퍽 난감하구나.”
“저하. 알아냈습니다. 가시지요.”
“왜들 이리 치는 것이냐?”
“사람이 많아 그런가봅니다. 옥체 보존 하소서.”
“벌써 멍이 든 것 같다. 어깨가 아리는 구나.”
***
인파를 뚫고 유아는 책방에 도착했다.
“스승님. 오늘 사람 엄청 많네요?”
“놀이패가 온다니 그런가봅니다.”
“놀이패요?”
“저기 마당에서 놀 참이던데?”
유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저는 그럼, 잠시 옆집에 다녀올게요.”
“2층 창고에서 구경하시려고?”
유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 가게로 옮겨갔다.
“이모~오~!”
그 사이, 부채장수 신씨는 연실에게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연실이.”
“왜요?”
연실은 신씨가 몸을 비비꼬며 수줍게 말을 걸어도, 퉁명스레 답했다.
“이거.”
신씨가 부채 하나를 연실에게 건넸다.
“이거 왜요?”
“자네 주려고,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왜?”
“자네만을 위한, 내- 으헉!”
“백씨! 이보게! 급해!”
신씨가 고백을 채 끝내지도 못했는데, 그런 신씨를 퍽 치고 백씨네 책방으로 규수가 들어갔다. 상당히 다급해보였다. 신씨는 몸이 마른 편이라 연실이 곁에 서 있으면 더욱 가냘파 보였는데, 본의 아닌 여인의 공격에 신씨가 어느새 연실의 품에 안겨있었다.
“어머...”
“하... 지금 뭐하자는 거야?”
“나는 그저-”
“오라버니. 지금 손이 어딜 향하고 있는 거야?”
“응? 그게 무슨? 으헉!”
본의 아니게 신씨의 손이 연실의 가슴팍에 살포시 올라가 있었고, 알아챈 신씨는 화들짝 놀라 연실에게서 떨어졌다.
“이런 변태!”
“연실이! 연실이, 그게 아니고. 이게 의도치 않은 사고가- 연실이! 연실이!!”
연실은 화가 난 채 자리를 박차고 걸음을 옮겼다. 신씨는 장사도 팽개치고 연실을 뒤따랐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방물장수 청씨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 급하게 뛰어 들어간 규수는 백씨와 지하 동굴로 사라졌다.
“여기가 맞느냐?”
주인인 백씨가 없는 사이, 성이 봉수와 겨우 인파를 뚫고 책방 앞에 다다랐다.
“왔구나!”
봉수는 청씨에게 물었다.
“이곳이 백씨네 책방이 맞소?”
“예. 맞습니다만.”
성과 봉수는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책방은 넓고, 다양한 종류의 책이 가득했다. 성은 궐에 있을 때도 가장 좋아하던 공간이 왕실 서고였다. 누구나 함부로 이렇게 많은 책을 가질 수 없으니, 가득 모인 서책을 보고 있자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참으로 많구나. 왕실 서고만큼이나 많아.”
“그러하옵니다.”
책방으로 돌아온 유아는 다시 성과 봉수를 마주하게 되었다.
“어?”
“어?”
“여긴 어떻게?”
“너야 말로 어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