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이 자길 좋아해주길 바란 게 아니었다.
‘혁은 날 남자로 아니까, 좋아할 순 없겠지.’
하지만,
‘그 처자를 잊으려고 떠났으면서, 잊고 왔어야지!’
강이가 바란 건 그거였다.
‘근데, 아직도 그 처자가 마음속에 있는 거야?’
당장 혁이 혼례를 올려도 가슴 아프겠지만, 그 처자 때문에 혼례를 거부한다는 말에 강이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래도 혁아, 네가 나이도 있고...”
방 안에선 혁과 도균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세상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차후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
“지금은 그 처자를 잊지 못해 가슴 아프겠지만, 다른 사람과 살 부비며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잊혀질 것이다.”
“아버지!”
“.........”
“제가 세운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 제 인생에 혼례는 없습니다.”
“혼례는 너의 인생이지만, 내 인생이기도 하다. 부모의 인생엔 자식 인생도 포함,”
“아버지, 제가 세운 목표를 이루면, 그때..”
“음...”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심 좋겠습니다.”
“세상 구경 다녀와 얼마 안된 너한테 혼례 얘긴 성급했을 수도 있구나. 차차 생각해보고,”
“아버지 뜻에 따르지 못해 죄송하지만...정말 혼례 생각은 없습니다.”
혁의 뜻은 너무도 단호했다.
“오늘 얘긴 여기까지 하자꾸나.”
“제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다시 얘기하자는 데도! 나가 보거라.”
“전 여자가 싫습니다.”
“..........?”
“여자는 다 싫다구요.”
“............”
“만약, 제 뜻과 상관없이 아버지가 혼례를 진행하신다면, 전 다시 세상구경을 떠날 것입니다. 그땐 아예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마터면 강이는 주저앉을 뻔 했다.
‘뭐 여자가 싫다고?’
단호한 혁의 말에 강이는 더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 처자가 그렇게 가슴에 남은 거야? 여자가 싫어질 정도로?’
강이는 혁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발길을 돌렸다.
‘여자는 다 싫어? 그럼 내가 여자인 걸 알게 되면, 나도??’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 고운 치마를 입고 혁 앞에 나타나서 말할 거야. 내가 사실은 여자였다고’
아버지가 계획한 일이 성공해서, 여자로 마음 편하게 살아갈 날을 기대하며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싫다니! 여자는 다 싫다니!’
혁이 뱉어낸 말 한마디에 강이는 세상을 다 잃은 듯, 가슴이 텅 비고, 의욕이 없어졌다.
‘그 처자가 머슴하고 도망친 게, 그렇게 배신감이, 상처가, 컸던 거야? 여잔 다 싫을 정도로? 그 처자가 아직도 그렇게 좋은 거네?’
아직도 잊지 못해, 여자가 싫다고 외치는 혁이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래, 매일 그 처자를 보러갈 정도로, 혁이 많이 좋아하긴 했었어...’
또 한편으론 혁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래, 사람 마음이란 게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잖아. 날 봐. 다른 여자 못잊는 혁이 뭐 좋다고 이렇게 속상해하고......’
“휴우~~ ”
강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푹 터져 나왔다.
‘복도 많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도망쳤는데, 그리워해주는 사내도 있고... ’
강이는 그 처자가 부럽기도 하고,
‘그래도 그렇지. 오랫동안 떠돌았으면서, 그 처자를 못잊고 와?’
혁한테 화도 나고, 이런 저런 감정이 뒤섞인 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하아~~ 달은 왜 저렇게 밝은 거야?’
넋 놓고 달을 바라보며 걷는데, 돌부리가 발에 채이자,
“에잇!”
힘껏 차버렸다.
“아얏!”
하지만 발가락이 너무 아파 붙잡고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아?”
언제 달려왔는지 헉헉대는 혁이 강이 발을 살폈다.
“깜짝이야!”
혁을 올려다보는데
“저는 여자가 싫습니다. 여자는 다 싫다구요.”
혁이 했던 말이 생각나
“사내자식이 이 정돈 뭐...당연히 괜찮지.”
아프긴 했지만, 강이는 괜찮은 척 혁을 바라봤다.
“왔다가, 왜 그냥 가?”
“아저씨랑 얘기가 길어지는 거 같아서....검만 놓고 왔지.”
“같이 가자. 집까지... ”
“혼자 갈 수 있어.”
“가, 밤길 위험해.”
“매일 다니는 길인데, 눈 감고도 가 이 길은.”
“그래, 그럼. 난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돼서.”
머뭇대던 혁은 자기 집 쪽으로 되돌아갔다.
‘칫! 가란다고 정말 가냐?’
손 흔들며 돌아가는 혁을 본 강이는 집으로 향했다.
사실 혁은 요즘 고민에 휩싸였다.
‘예전엔 어떻게 했었지?’
세상구경하고 돌아온 뒤, 강이를 대할 때마다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내가 예전에 집까지 데려다줬었나? 그냥 혼자 가게 뒀나?’
‘어깨동무는 아무 때나 했었나?’
‘여자 혼자 밤길 위험하진 않을까?’
강이 걱정에 노심초사하면서도 마음대로 행동할 순 없었다. 혹시나 자기가 좋아한다는 걸 눈치 채면 곤란했다. 게다가
‘강이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걸... 강이가 알면 안되잖아...’
혹여 들킬까, 모든 게 조심스러워 아무 행동도 못했고, 그런 행동들은 강이를 더욱 서운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깜깜한데 혼자 가게 하는 건...’
그러다 미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라버니 밤길 조심해요. 앞집 도령이 도둑들한테 당해서, 옷이며 신발을 다 뺏겼대요. 알몸으로 집에 왔다지 뭐예요. 하긴 오라버니가 어디 가서 때림 때렸지, 맞고 오진 않으니....”
그 생각에 이르자 혁은 마음이 급해져 오던 길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리는데,
“퍽퍽!”
“으악!”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이야~~~!!!”
혁은 강이를 부르며 쫓아갔는데, 다행히 도둑들이 아니라, 무예 연습하는 이들이었다.
‘아 다행이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강이네 집 쪽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간다!’
저 멀리 강이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자 혁은 달리던 걸 멈추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돌부리를 걷어찬 발가락이 아픈지 강이는 절뚝이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까, 여자 몸으로...’
짠한 마음에 혁은 강이 등만 바라보며 따라가고 있었다.
* * * * *
강이야!
세상구경 하며
너를 보지 못해 괴로웠지만
너 때문에 힘을 냈고,
너 때문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어.
이 땅에 태어났다 해서
죽을 때까지 꼭 만난다는 보장이 없는데
그날 산적 수레에 네가 올라탄 것이,
우리 아버지들이 죽마고우인 것이
이 얼마나 대단한 인연인지.
함께 자라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운명 같아.
너와 나의 만남은,
내 일생일대에 가장 큰 행운이고
가장 멋진 일이야.
네 조그만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감히 난 짐작도 못하겠지만
내 인생,
너와 함께 하기 위해
뜨거운 불속이든,
차가운 얼음 속이든,
그 길이 어떤 길이든
달려볼게.
절대 말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너를 향한 내 마음들
거사를 이뤄내면,
마음껏 표현하며 살아갈 거야.
그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열심히, 치열하게 준비할 거야.
* * * * *
강이 뒷모습을 보며 혁은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나 꼭 해낼 거야! 널 위해, 나를 위해’
천천히 걷는 강이 뒤를 혁이 천천히 따라가고, 두 사람 뒤를 밝은 달이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뭐야 니들!”
웬 사내 셋이 강이 앞에 나타나 앞을 가로 막고 섰다.
“야~ 곱상하게 생긴 도련님이네..”
“뭐 가진 있음 쪼매만 내놔 보시지요”
“없는데, 가진 거?”
강이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봤다.
“도련님, 눈빛으로 먼저 제압하세요. 두려워도, 그 두려움이 얼굴에 보여선 안됩니다. 절대.”
사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강이는 두려운 마음을 감추며 매섭게 쏘아봤다.
“어, 이 도련님 눈에 힘 빡 주구~~”
“가진 게 없음... 그럼 옷이라도 벗으시지, 곱상한 도련님~!”
“미안하지만, 이 옷은 우리 어머님이 한땀 한땀 정성껏 지어주신 옷이라 안되겠는데.”
“어쭈 요것 봐라. 한주먹도 안돼 보이는 놈이, 좋게 말하니, 말을 못알아 쳐먹으시네”
“한주먹은 니들도 안돼 보이는데?”
배짱 튕기며 강이는 그들을 노려봤고, 슬슬 강이 주변을 맴도는 도둑들은 들고 있는 곡괭이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내 저 놈들을!’
마음이 급해진 혁은 쏜살같이 달려가는데, 혁이 한발 늦었다.
“으윽!”
“악!”
“퍽!”
순식간에, 빛의 속도로 강이는 그들을 제압하고 무릎 꿇게 만들었다.
‘와, 엄청 늘었구나. 실력이!’
달려가던 혁은 발걸음을 멈추고 감탄하며 바라보고 섰다.
“니들이 요즘 우리 동네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놈들이지?”
“잘못했습니다요.”
“다시 한 번 이동네 얼씬 거리면, 그땐 뼈도 못추릴 줄 알아”
“예..에...”
강이는 그들이 들고 있던 곡괭이를 멀리 집어던지고, 그들이 들고 있던 보퉁이에서 밧줄을 꺼내 그들을 하나로 꽁꽁 묶었다.
“맘 좋은 사람 만나면, 풀어달래라..... 가! 나쁜 짓좀 그만하고.”
강이는 그들의 엉덩이를 뻥 찼고, 묶인 채로 그들은 이리저리 방향을 못찾고 있었다.
‘제법인데 이강이!’
기특한 마음에 강이를 부르려는데,
“도련님!”
어느 새 정남이 달려와 강이 앞에 목례하고 섰다. 정남을 본 도둑들은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부!”
정남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강이를 보자, 혁은 마음속에서 뭔가 치밀어오는 게 느껴졌다.
‘뭐야, 왜 저렇게 환하게 웃어. 칫!’
혁은 질투 나서 두 사람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섰다.
“다친 덴 없으세요 도련님?”
“멀쩡해. 사부도 만난 적 있어?”
“예, 며칠 전에... 얼씬도 말랬는데...”
“.....”
“근데, 어딜 다녀오십니까?”
“어..혁이네...”
“저녁 진지 차려졌는데...걱정하고 계십니다.”
“먼저 드시라 하지.”
“드시고 계실 겁니다.”
“사부도 먹지.. 또 날 찾아 나선 거야? 가자 얼른.”
강이가 앞서 걸어가는데,
“다리는 왜 저세요, 다치셨어요?”
“아니,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어디 좀 보세요.”
“괜찮다니까.”
“업히세요, 도련님”
정남이 업히라며 쭈그리고 앉았다.
“괜찮아.”
“업히시래두요!”
정남이 재촉하자, 혁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치솟았다.
‘사부는 강이가 여잔 거 모르나? 아니지, 모를 리 없잖아. 근데 왜 자꾸 업어줘?’
강이가 정남한테 업힐까 싶어, 더 이상 가만 있지 못하고 혁은 소리쳤다.
“강이야!”
강이와 정남이 돌아봤다.
“혁아... 집에 간 거 아녔어?”
“까먹었던 말이 생각나서...”
“무슨 말?”
“어, 그게...”
혁은 정남을 쳐다봤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정남이 목례를 하고 집으로 향하자
“기다리지 말고 먹어 사부~!”
“예 도련님.”
강이가 정남을 바라보는데, 혁은 강이 눈을 계속 쳐다봤다.
‘왜 이렇게 챙겨?’
혁은 괜한 질투심에 강이를 빤히 쳐다보는데, 강이도 혁을 올려다봤다.
“뭐야 까먹은 말이?”
“어, 그게...”
혁은 딱히 할 말이 없어 머뭇대면서도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게 있었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무슨 말인데 그래?”
“강이야.”
“어, 말해.”
‘니 마음이... 니 마음은 어디로 향해 있는 거야? 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