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도련님 일어나세요. 서두르셔야 해요.”
들뜬 분녀 목소리가 들려 눈을 떴더니, 분녀가 강이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니, 밤새 설레서 못주무신 거예요? 왜 이렇게 졸고 계세요.”
‘내가 졸았다고? 아, 이건?’
지난번 혼례식에서 봤던, 신부가 입고 있던 혼례복을 강이가 입고 있었다.
‘뭐야? 나 지금, 꿈속이야?’
거울을 보니, 화사하게 꽃단장한 얼굴에 연지곤지가 찍혀있었다.
“분녀야 이게 다 뭐야? 내가 왜 이걸 입고 있고, 얼굴은 또?”
“뭐긴 뭐예요. 도련님 혼례 올리니까, 입은 거죠.”
“혼례? 내가 혼례를?”
“그리도 좋으세요?”
“아니, 놀라서. 내가, 남자인 내가 신부옷을 입어서...”
“도련님, 아니 이제 아씨죠. 아씨. 혼례식 날 신부가 너무 웃어도 보기 안좋아요.”
“...........”
분녀가 이끄는 데로 강이가 문밖으로 나갔는데, 마당에는 화사하게 봄꽃이 만발하고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있었다.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는, 그야말로 화창한 봄날이에요 아씨. 혼례 올리기 참으로 적당한 날씨죠?”
분녀가 신난 듯 강이를 이끌고 혼례장으로 가고 있었지만, 강이는 여전히 이게 뭔 일인가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신부 입장이오~~~”
웃음이 나는 걸 억지로 참으며 신랑 맞은편으로 강이는 걸어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강이는 그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배시시 보일 듯 말 듯,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강이야!”
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봤더니,
‘어, 혁이다’
사람들 틈에 환하게 웃는 혁이가 보였다.
“곱고 어여쁘다 강이야.”
‘가만 있어봐. 혁이?’
강이는 그 순간, 당황하면서 신랑 쪽을 바라봤다. 신랑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혁은 아니었다.
‘뭐야, 내 신랑이 혁이 아니었어? 이게 어찌된 일이야?’
놀라고 당황한 강이가 다시 혁을 돌아봤다. 혁이 환하게 웃고 있는 건 맞는데,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슬퍼보였다.
“혁아!”
“강이야!”
강이는 혁을 잡으려고 손을 쭈욱 뻗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혁을 잡을 수가 없었고 두 사람 손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혁아. 혁아!”
강이가 혁의 이름을 부르며 벌떡 일어나 사방을 살폈다.
‘여긴 어디지? 아, 내 방이구나. 다행이다, 꿈이었어.’
후~ 강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 *
“도련님, 혁이 도련님 좋아하시죠?”
새벽에 가슴을 싸매던 분녀가 강이를 빤히 쳐다보며 얘기했다.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사람 마음은요,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가슴, 여기 마음으로 느끼는 거지.”
“분녀 니가 내 마음을 어찌 알아?”
“도련님 그거 아세요? 도련님, 어제 목욕할 때도 계속 혁이 도련님 얘기만 하셨어요.”
“내가?”
“네에. 근데, 오늘 저 보자마자 또, 혁이 꿈을 꿨어 부터 시작해, 혁이 오늘은 산에 올까 안올까? 계속해서 혁이 혁이 혁이.... 혁이 도련님 얘기뿐이잖아요. 이 세상에 혁이 도련님만 사는 것처럼.”
“내가 그랬어?”
“네. 뭐 좋아하면 자꾸 그 사람만 보이고, 그 사람 얘기만 하게 되고, 저도 그 마음 알아요.”
“그 마음이 뭔데?”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요. 저도 정남이가 좋거든요.”
“분녀 너, 사부 좋아해?”
“모르셨어요? 서운한대요. 제가 매일 정남이 멋있다고 얘기했는데.”
“나도 사부가 멋있어. 그럼 좋아하는 거야?”
“저는 정남이가 칼 휘두르며 땀 흘리는 모습을 보면 요기, 요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요. 도련님도 혁이 도련님 보면 여기 가슴이 뛰지 않아요?”
“아니, 안뛰는데!”
“에이, 가슴이 안뛰는데, 하루죙일 혁이 도련님 얘기뿐이에요? 멋있다는 정남이 얘긴 한번도 안하면서?”
“내가 혁이 얘길 하루죙일 했다고? ”
“엿 먹을 때도, 이거 혁이도 좋아하는데...하나 줘야겠다 하시고, 날이 좋으면 혁이가 좋아하는 날이네... 비가 오면, 혁이가 또 빗속을 뛰겠구나...하시잖아요.”
“그게 뭐? 있는 사실을 말하는 건데!”
“네에~~..”
“진짜야. 혁이 엿 좋아해. 비도 좋아하고. 비만 오면 저자거리에서 미친놈처럼 마구마구 뛴다니까.”
“도련님, 도련님이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응.”
“맛있는 거 보면 딱 그 사람 생각나고, 좋은 거 보면 주고 싶고, 며칠 안보면 또 막 보고 싶고, 생각나고, 그러면 좋아하는 거예요. 남녀 마음으로.”
분녀가 가슴을 단단히 싸매는 동안 강이는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내가 혁을 좋아한다고? 당연히 좋아하지. 근데, 그게 남녀 마음이라고?’
강이는 혁을 그저 친구로 친하고 정겹게 지낸다고 생각했지, 한번도 남녀의 마음이라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래, 분녀 말대로, 난 지금 그 녀석이 왜 방에만 처박혀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야.’
사실, 혁이 계속 안나오자,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는 것도 같고, 매사 화도 나고 강이의 짜증도 부쩍 늘긴 했다.
‘이게 좋아하는 건가? 친구 사이는 원래 궁금하고 그렇잖아.’
그때까지도 강이는 자기 마음 상태가, 혁을 향한 자기 감정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 * * * *
“좋아한다, 안좋아한다, 좋아한다, 안좋아한다. 거봐! 안좋아한다잖아. 내가 혁이를 무슨...”
산 중턱에 올라가는 돌다리에서 강이는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어 물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안좋아한다. 좋아한다”
강이는 다시 꽃잎을 떼어내며 다시 중얼댔다.
“안좋아한다. 좋아한다! 어! 이번엔 좋아한다네?”
물에 흘러가는 꽃잎을 멍하니 보던 강이는, 물에 손을 집어넣고 물장난을 쳤다. 송사리라도 잡는 냥 물을 마구 튀기는데, 제법 짜증이 묻어났다.
“웁퍼 웁퍼”
강이는 한참동안 세수를 하다가 멍하니 물속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비춰보고 있었다. 강이 얼굴이 물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이 아른아른 거렸다.
‘내가 혁이를 좋아한다고? 말도 안돼.’
그때 강이 얼굴 말고 다른 얼굴도 아른아른 거리기 시작했다.
“뭐해, 여기서!”
“아 깜짝이야!”
강이가 깜짝 놀라 주저앉으며 옆을 보니, 혁이었다. 청량한 봄햇살에 비친 혁의 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강이는 눈을 비비고 다시 혁을 바라봤다.
“뭘 그렇게 놀래?”
“아니, 아니...”
‘기다리던 날은 안오고, 안왔을 거라고 체념한 날은 와 있네.’
“여기서 뭐해? 한참 기다렸잖아. 맨날 이렇게 노닥거린 거야, 여기서?”
“아니, 아니야. 내가 맨날 얼마나 열심히 무예를 익혔는데.”
펄쩍 뛰는 강이가 귀여워 혁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혁이 원래 저렇게 웃었나? 심장 떨리게 웃네...’
‘어, 나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강이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가슴을 만졌다.
“상처는 다 낫고? 어디 봐.”
혁은 강이 다리를 보자며 다가왔다.
“참 일찍도 묻는다. 집으로 찾아가도 그렇게 냉대하더니.”
“봐봐. 확실히 다 난 거야?”
“다 나았어. 괜찮아. 넌? 고뿔은?”
“보다시피.”
“무슨 사내자식이 비 쪼금 맞았다고 기지배처럼, 아니 기지배는 취소..암튼 아프고 그래? 열흘이나 넘게!”
“그러게.”
“꾀병이었지?”
“..........”
“맞구나 꾀병?”
“응 꾀병이었어..”
웬일로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며 혁은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 평소 같았음 발끈하면서 장난쳐야 혁다운 건데.....왜저래?’
“같이 가~~”
강이가 혁을 쫓아가며 혁의 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뭐지 이 느낌은?’
강이는 뭔가 모르게 달라진 혁의 모습에, 뭔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 혁이 진짜 뭔가 이상해.’
혁이 달라지긴 했다. 평소에 장난을 잘 치더라도, 검 앞에 서면 냉정한 혁이었다.
“야, 칼 맞고 싶어? 정신 안차리고 뭐해!!”
사부보다 더 호되게 강이를 혼내던 혁이었다. 하지만, 열닷새 만에 나타난 혁은 전혀 딴 사람처럼, 낯설게 굴었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칼을 잡아서 그런가, 어설프다 그치? 다시 해보자.”
‘아니 아니, 지금 내가 실수한 건데?’
강이가 잘못한 건데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뭔가 장난끼도 없어지고 말도 잘 없고...왜 저래 대체?’
뭔가 달라진 혁의 모습에 강이는 당황스럽고,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프고 나더니, 어디가 이상해진 거야?’
강이는 왠지 불안해지기 시작했기에 훈련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하자.”
“왜 오랜만인데, 더 해.”
칼을 내려놓는 강이한테 혁은 계속 하자며 칼을 들이댔다.
“아니야, 다리가 또 욱신거리는 거 같애. 오늘은 그만할래.”
“어디 봐. 다 낫다더니.”
“괜찮아. 그냥 좀 쑤실 뿐이야. 쉬면 될 거야.”
“정말 괜찮겠어?”
“응.”
강이는 칼을 내려놓고 개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았다.
‘내가 왜 자꾸 혁의 눈치를 보지?’
강이는 처음으로 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혁의 눈치를 보면서 말하고 행동한 적 없는데, 이상하게 오늘 따라 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왜 자꾸 힐끔거리며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혁아, 너 좀 달라진 거 같아. 내가 알던 혁이 아니고.”
“그래?”
“장난도 안치고, 뭐랄까. 아무튼, 뭔가 달라진 거 같아.”
“달라져야지. 어른이 되려면.”
“어른? 갑자기 웬 어른?”
“이따 말하려 했는데... 나 혼례 올려, 강이야.”
“뭐라고?”
“장가간다고.”
“..............?”
“아버지가 건넛마을 처자와 혼례를 올리자 하셨어.”
“뭐어?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자기도 모르게 강이는 그 말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니, 그러니까, 내말은, 그럼 나는 누구랑 노냐고 이제.”
“혼례 올린다고 못만나는 것도 아니고.”
우르르 쾅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강이 머릿속이, 마음속이 딱 그랬다.
‘혁이 혼례를 올린다고?’
오늘 아침 꿈이 스쳐지나갔다.
‘꿈에선 내가 혼례를 올리고 있었는데....혁이 니가 혼례를?’
혁은 개경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열여섯이면 가정을 이루고, 집안도 일으킬 때가 됐지.”
“.............”
“무과시험도 치러서 아버지한테 보답도 하고... 우리집 전답 팔아 올라온 거 얘기했었지? 아버지 소원이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거잖아...”
“......”
“혼례를 올리면 아무래도 책임감이 생겨서 더 낫지 싶어서...”
“..................”
강이 머릿속은 충격으로 혁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이 어땠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그냥 넋 나간 채로 돌아왔다.
“왜 진지를 그냥 다 남기셨어요. 속이 안좋으세요?”
저녁도 몇 숟가락 뜯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혼례를 올린다고?’
강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어쩌고 혼례를..’
이불을 뒤집어 쓴 강이는 아무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분녀 말이 맞았어. 좋아하고 있었어. 좋아하고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