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안.”

　“네?”

　“원래…… 모든 천사 동료들에게도 이렇게 잘 해줘?”

　이렇게 말하는 엘리야의 두 뺨은 터질 듯이 붉었지만, 키리안을 향한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키리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그도 곧 차분한 얼굴로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키리안이 엘리야에게 몇 발걸음 더 다가갔다. 엘리야만을 바라보던 키리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엘리야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설마…… 그렇다는 건,”

　띠리리리-

　이때였다. 엘리야의 방 쪽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듣자 키리안은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허겁지겁 말했다.

　“제,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어, 잠깐만. 키리안!”

　엘리야가 채 말리기도 전에 키리안이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가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엘리야의 방으로 향했다. 그걸 엘리야가 급하게 키리안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

　“키리안 잠깐…….”

　키리안의 한쪽 발이 엘리야의 방문턱을 넘어갔을 때였다. 숙소 전체의 불에 붉은 빛이 돌면서, 곧이어 쩌렁쩌렁한 경보음이 온 집안에 퍼졌다.

　왜애애애애앵-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허가되지 않은 곳에 외부인이 침입했습니다.”

　당황한 키리안이 뒷걸음을 친 뒤 엘리야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키리안 바로 뒤에 선 엘리야는 자신의 한 손을 이마에 얹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가 빠르게 손을 휘저어 자신의 방에 걸려 있는 경계 사이렌 마법을 해제하는 주문을 외웠다.

　경계 사이렌 마법이 풀리자 둘 사이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전화 벨소리는 이미 끊어진지 오래였다. 엘리야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게 물든 채로 키리안을 바라보지 못했다. 키리안도 엘리야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선배 허락 없이 멋대로 방에 들어가서 죄송해요.”

　“아냐……. 폰 갖다 주려고 한 거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는 곧 이어 다시 둘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눈치를 보는 성격이 아닌 엘리야인데도 이번 침묵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엘리야가 어렵게 먼저 말을 꺼냈다.

　“키리안.”

　“…네.”

　“방금 그 경계 사이렌 마법은…… 내가 너를 잘 모르고, 우리가 합숙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걸어둔 거야.”

　“아, 선배 방금 마법 저는 신경 안 써요. 그리고 당연히 하셔야죠.”

　엘리야는 키리안의 말을 듣고 그래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편안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어색한 공기만이 둘 사이를 메꿨다. 엘리야는 경보음이 울리기 전에 자신들이 하던 이야기가 뭐였는지도 까먹고 말았다. 엘리야는 침묵을 깨기 위해 억지로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그런 마법 안 걸어뒀어?”

　“저는 딱히 안 했어요. 엘리야 선배가 제 방에 들어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어, 어…… 응……. 그렇지.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되지.”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키리안과 엘리야의 두 얼굴은 계속해서 붉은 빛이었다. 엘리야와 키리안은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질 못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나고 키리안이 쭈뼛거리며 말을 걸었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선배. 뒷정리는 제가 마저 할 테니까 안녕히 들어가세요.”

　“어, 그래 키리안. 고마워. 잘 자고.”

　“네, 선배. 좋은 밤 되세요.”

　엘리야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 뻣뻣한 동작으로 방에 들어갔다. 각자의 방에 들어간 둘은 문을 닫자마자 동시에 생각했다.

　‘망한 것 같다…….’

　다음날, 키리안보다 출근 준비를 먼저 마친 엘리야는 현관에 서서 키리안을 기다렸다. 정장을 다 갖춰 입은 키리안이 허겁지겁 빠르게 현관으로 다가왔다. 신발장에 기대어 서서 키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리야가 말했다.

　“키리안, 잠깐만”

　“네?”

　“넥타이가 비뚤어졌네.”

　엘리야가 키리안의 푸른 넥타이를 바르게 고정시켜 주었다. 키리안은 집중한 눈빛을 한 채 자신의 넥타이를 바르게 매주는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다 되었는지 엘리야가 고개를 들곤 키리안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엘리야와 눈이 마주친 키리안의 흰 뺨이 한순간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엘리야가 키리안의 어깨를 툭툭 쳐준 뒤 말했다.

　“가자.”

　키리안은 먼저 문을 열고 나가는 엘리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네.”

　*

　‘이거 운명 같은 일 맞지?’

　비비안은 새로 온 신입 악마에게 천사 파트너를 소개해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앞에는 놀란 얼굴로 입을 벌리는 신입 악마가 서 있었다. 비비안의 통보를 들은 그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네? 제가 삼대 천사 중, 그것도 가브리엘 천사님과 파트너라고요?”

　비비안은 은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물결치고, 투명한 보라색 눈을 가진 신입사원을 응시했다. 가브리엘과 파트너를 하게 된 신입 악마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니 가브리엘 천사님은 중간 점검을 주로 맞고 계시지 않아요? 저희랑 같이 현역으로 뛰시는 분일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저처럼 완전 새파란 신입이랑요!”

　그렇게 말하는 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비비안은 그런 그를 보며 겁에 질린 하얀 비숑을 연상했다. 서류를 다 읽은 비비안은 상황이 이해가 간다는 얼굴을 했다. 엠은 비비안이 자신을 향해 천천히 미소를 짓는 게 의아했다. 그녀는 엠의 어깨를 위로하듯 툭툭 두드려준 뒤 상냥하게 말했다.

　"가브리엘님은 파트너로서 나쁘지 않아요. 천사들 중에서는 악마를 잘 존중해주는 편이거든요. 물론 모든 이에게 엄한 천사로 소문이 나있긴 하지만…….“

　비비안은 엠의 얼굴이 새파래지는 걸 지켜봤다. 그녀는 엠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신참에게 이런 파트너가 붙는다는 건 어떤 운명이 작용한 거일 수도 있죠."

　"운명이요…?“

　이때였다. 벨벳같이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비비안과 엠의 사이를 가로질렀다.

　"우리는 운명이라는 일을 담당하는 부서 사원들인데 이 정도는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지 않아?“

　붉은색 머리칼로 쉼표 머리 스타일을 한 남성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독보적으로 미남인 그는 여유가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엠은 그의 짙은 청록색 눈이 자신을 꿰뚫는 것 같다고 느꼈다. 엠은 그가 들고 있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지팡이를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가브리엘 대천사님.”

　비비안도 가브리엘의 등장에 놀란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가브리엘에게 말했다.

　“대천사님이 여기에 직접 오실 정도로 한가하신 줄 몰랐네요. 미카엘 님께 보고할까 봐요.”

　“비비안, 그렇게 빡빡하게 굴 거야? 네가 내 파트너를 데려오는 게 늦어서 말이지. 내가 모시러 왔어.”

　엠은 가브리엘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포스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가브리엘이 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럼, 가죠. 오늘 해야 할 일이 수두룩해요.”

　엄청난 부담감에 엠은 비비안을 보며 도움의 눈빛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비비안의 손인사뿐이었다. 엠은 가브리엘에게 끌려가면서도 애처로운 눈빛으로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비비안은 그런 엠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퇴근하고 바에서 만나게 될 것 같은데?”

　*

　퇴근을 한 비비안은 바에 들어가서 키리안을 발견했다. 그녀가 키리안의 옆에 앉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바른 사나이였던 키리안이 이젠 여기에 매번 출석이야?”

　“아, 비비안 님.”

　비비안은 키리안의 얼굴이 많이 밝아진 걸 알아차렸다. 전에 이곳에서 만났을 때는 그렇게 죽을 듯이 울상을 하고 술을 마시고 있더니, 지금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비비안은 예상치 못한 키리안의 반응을 보곤 말했다.

　“뭐야, 좋은 일이라도 있어?”

　“제가 여기서 전에 비비안 님이랑 술 마셨던 거 기억하세요?”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그때의 키리안은 엘리야의 헬퍼가 되었는데도 그녀가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때의 엘리야는 심지어 키리안과 같이 헬퍼 등록을 하는 중에도 그에게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한 뒤엔 엘리야가 아예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일이 많았다. 키리안은 적막한 숙소에 있는 걸 견딜 수 없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이 곳에서 비비안과 술을 마시게 될 일이 잦았던 것이었다. 키리안이 비비안에게 말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죠. 헬퍼로 발현만 되면 그 상대와 저절로 가까워지는 줄 알았다고.”

　“그 말 듣고 내가 어떤 관계든 노력은 필요하다고 말했지, 아마.”

　“그쵸. 노력이 필요한 건 당연해요. 그런데 선배…….”

　키리안이 마시던 술잔을 바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비비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엘리야 선배의 헬퍼로 발현하고 나서 운명을 믿게 된 것 같아요.”

　“어떻게?”

　“사실 처음에는 엘리야 선배가 어려웠고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을지 막막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저희 관계가 많이 좋아졌다고 느끼는 중이에요. 역시 저희가 헬퍼로 엮인 이상 좋은 관계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키리안은 자신에게 점점 마음을 열어가는 엘리야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엔 키리안이 자신에게 말을 걸기만 해도 불편해하는 게 다 드러나는 그녀였다. 하지만 이제 엘리야는 자기 전에 키리안이 그녀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잠시 손을 잡는 것도 순순히 허락했다.

　키리안의 말을 듣고 비비안은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비비안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장면이 있었다. 비비안이 엘리야에게 새로운 헬퍼가 필요하지 않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엘리야는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비비안님. 앞으로 제 인생에 헬퍼는 없을 거예요. 이제야, 겨우 헬퍼 없이 살게 되었는데…….’

　단호하게 말하던 엘리야의 얼굴을 떠올리던 비비안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엘리야가 너한테 마음을 열었다고?”

　비비안의 말을 들은 키리안은 찬 물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그의 눈빛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키리안이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서 비비안에게 말했다.

　“헬퍼는 신이 저 상대를 도와야 한다고 사명을 준 관계니까요.”

　“어…….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엘리야는…….”

　비비안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목이 타는지 술잔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키리안이 의아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건 비비안이었다. 비비안이 먼저 말했다.

　“키리안, 헬퍼 관계가 운명적인 것 같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나도 여기에 입사해서 헬퍼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어. 아주 낭만적이라고 생각했고.”

　비비안은 술을 입에 조금 넘기고 키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키리안에게 돌연 질문을 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들어. 왜 헬퍼는 천사에게만 발현될까? 악마 헬퍼는 없잖아.”

　“어? 그렇네요.”

　키리안이 고민에 빠지고 비비안은 술잔을 들이키며 침묵을 지켰다. 바에 흘러나오는 노래가 바뀔 때쯤 키리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 왜 엘리야 선배가 저한테 마음을 연 것 같다고 했을 때 놀라신 거죠? 혹시 엘리야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말을 들은 비비안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술을 마셨다. 키리안은 비비안이 자신에게 어떤 말이든 꺼내길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비비안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그게 키리안, 엘리야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