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그 말이 끝나자마자 쇠사슬이 나타나 키리안의 하얀 두 날개를 순식간에 감쌌다. 긴 쇠사슬 줄은 날개를 감고서 키리안의 몸통과 팔을 휘감았다. 완벽히 키리안의 날개와 몸이 결박되자, 키리안은 어떤 보이지 않는 줄에 끌려가듯이 난간 가까이 질질 끌려갔다.
그걸 본 엘리야는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얀 날개가 쇠사슬로 결박된 채 끌려가던 ‘그’의 모습이 엘리야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때와 같은 감정을 느낀 그녀는 몸부림쳤다.
엘리야가 베란다로 나와 키리안의 몸을 두 손으로 붙들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엘리야의 움직임은 키리안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아무 쓸모도 없었다. 엘리야는 공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키리안! 너 대책도 없이 무슨 짓을!”
키리안은 자신이 처한 위급한 상황에 비해, 그저 난감하다는 듯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게요. 수색대가 빨리 와야 할 텐데.”
그걸 본 엘리야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지금 웃을 여유가 있어?”
그 사이에 키리안의 몸은 이제 난간에 완전히 걸쳐 있어서, 조금만 더 뒤로 밀려도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키리안이 엘리야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엘리야 선배, 저는 수색대가 제시간에 올 거라고 믿는데”
“키리안!”
“혹시나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엘리야 선배가 자책하진 않았으면 해요.”
‘지금 남 걱정을 할 때야?’라고 엘리야가 외치려고 했다. 키리안이 엘리야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를 짓는 순간, 그의 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
엘리야는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눈앞에 있었던 키리안이 순식간에 없어진 게 믿기지 않았다. 키리안이 없는데도 난간 너머의 풍경은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햇빛은 여전히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작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지독히도 밝고 조용한 그 속에서 엘리야는 고통에 찬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엘리야가 몸이 천천히 숙이더니, 그녀가 바닥에 완전히 주저앉았을 때였다.
“나이스 캐치~”
키리안을 공주님 안기 자세로 받아 든 천사가 날아올라 엘리야 앞에 착지했다. 그 뒤로 다른 여러 명의 천사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바닥에 꿇어앉은 엘리야를 보고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수사대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몇몇 천사들은 빨리 방으로 들어가 누워있는 악마를 향해 수갑을 채웠다. 키리안을 무사히 받아낸 천사는 키리안을 속박하고 있는 사슬에 손을 얹고는 주문을 외웠다. 여러 주문을 외운 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사내 인정되지 않는 불법 계약은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슬이 풀리고 키리안의 두 날개와 두 팔은 자유를 되찾았다. 키리안은 사슬에서 벗어나자마자 엘리야를 향해 달려왔다. 그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엘리야를 향해 말했다.
“선배 괜찮아요?”
“키리안, 너……!”
엘리야는 원망의 말을 쏟아내며 키리안의 어깨를 주먹으로 몇 번 가볍게 때렸다.
“진짜 위험했잖아! 수사대가 1분이라도 늦게 왔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키리안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야의 타박을 묵묵히 받아주었다. 엘리야가 뭐라고 더 하려 할 때, 그는 엘리야의 주먹 쥔 손을 부드럽게 감싼 뒤 말했다.
“그래도 그냥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엘리야는 발작적으로 키리안에게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엘리야의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엘리야, 그래도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엘리야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키리안이 엘리야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미안해요, 선배. 제가 잘못했어요. 괜찮은 거예요?”
엘리야는 키리안의 손을 내치고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사대 하나가 키리안에게 다가왔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당신 ‘헬퍼’잖아요!”
그 말에 키리안도 놀라며 수사대에게 말했다.
“네? 제가 뭐라고요?”
“당신 저 악마 여성분의 헬퍼인데도, 그분 앞에서 떨어지려고 하셨어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키리안에 수사대 천사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키리안의 이마 쪽을 향해 비추었다. 키리안이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이마에 자리 잡은 십자가 표시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그걸 본 수사대가 말했다.
“헬퍼로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셨나 보네요. 아무튼 저분한테 진정할 시간을 주세요. 자기 눈앞에서 헬퍼가 사라지려 하다니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수사대가 사라지고 나서도 키리안은 멍한 얼굴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이마 쪽 십자가 낙인을 손으로 짚어보더니 중얼거렸다.
“내가 엘리야 선배의 헬퍼라고……?”
수사대 천사들은 여성이 제노에게 걸어놓은 무시무시한 저주를 해제했다. 그러자 키리안의 실적은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엘리야는,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조사를 받고 난 뒤 거의 탈진한 여성에게 다가갔다. 이 여성은 이제 기억을 잃는 조치를 당할 것이다.
엘리야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떨고 있는 그녀를 진심으로 안쓰럽게 여겼다. 불법 계약으로 남에게 저주를 건 그녀는 이제 앞으로 또 불행을 맞이할 확률이 높았다. 다음 천사 담당자는 그녀를 변호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이었다. 엘리야가 여성에게 가까이 가자 그녀는 눈물 젖은 얼굴을 들었다. 그녀가 힘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무소속 악마와 계약한 기억은 지워진다던데, 그럼 제 머릿속에 제노도 아예 지워주실 수 있나요?”
엘리야는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악마와 엮인 일만 지워질 뿐, 당신의 인생에 남아있는 기억엔 손대지 못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녀는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 사이에 자신의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제노와 함께했던 시절은 어찌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거예요. 내가 세상에서 가치 있는 존재 같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그 기억을 통째로 지워버리고 싶어요. 그렇게 행복했던 때가 지금은 그렇게 변했네요.”
여자는 궁금하다는 듯이 엘리야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악마님은 그런 기억 없어요? 당시엔 행복했는데, 지금은 떠올리기만 해도 너무 괴롭게 하는 기억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엘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입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도 심장에 무수한 철조각들이 굴러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는 기억이 존재했다. 그녀는 그 기억을 상기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말했다.
“있기야, 있죠. 저도…….”
여자는 엘리야의 반응을 보고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제노는 항상 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했어요. 예뻐, 귀여워 사랑스러워……. 이런 말을 끊임없이 해줬거든요. 물론 가끔 자신을 위해서 부탁을 하기도 했는데,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난 그를 사랑하니까. 원래 사랑은 맞춰가는 거잖아요?”
엘리야는 그녀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여자는 괴로워하는 얼굴을 하고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는 점점 제노를 위한 완벽한 여자가 되어가던 중이었어요. 그리고 난 그런 내 모습이 좋았고요. 그런데 제노가 갑자기 제 인생에서 사라진 거예요.”
무릎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자는 멍한 눈을 한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제 인생의 목적 자체가 사라진 거예요. 이제 뭘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걸요.”
엘리야가 말없이 여자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여자는 엘리야의 손길에 자신을 맡긴 채, 울먹이면서 말했다.
“왜 내가 힘들 때는 어떤 천사도 날 돕지 않았죠?”
“…….”
“내가 갑자기 제노와 헤어지게 되는 시련을 받게 된 건, 절 담당한 악마가 이겨서였나요? 만약 그렇다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까지 세상에 버림받은 것 같은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여자는 어깨를 들썩여 가며 애처롭게 흐느꼈다. 엘리야가 그녀의 둥근 어깨를 조용히 어루만진 뒤 말했다.
“회사에 일하는 우리들도, 왜 신이 인간에게 행운 또는 불행을 내리기로 결정하는지는 모릅니다. 저희도 결과만 전해 들을 뿐이거든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요.”
여성은 눈물 젖은 눈을 들어 엘리야를 응시했다. 여성의 차디찬 손을 잡아주며 엘리야는 힘주어 말했다.
“그때 당시에 당신을 열심히 변호해주는 천사가 분명 있었을 거예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것만은 잊지 말아요.”
*
"사람이 차에 치였어!”
"앰뷸런스를 불러!”
구름이 잔뜩 끼고 가느다란 비가 내리는 날씨인 날이었다. 차에 치인 여성이 팔다리가 꺾인 채 횡단보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의 연갈색 빛이 도는 곱슬머리는 피에 물들어져 원래 색을 알기 어려웠다. 몇몇 사람들은 그녀의 옆에서 소리를 지르며 119를 찾았지만, 길을 건너는 대다수의 사람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여성을 피해서 지나갔다.
검은 정장을 입은 키가 큰 사내가 여성 바로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에, 밤하늘 같은 흑발을 지닌 사내는 마치 살아있는 인형처럼 박제된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 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읊조렸다.
“불행밖에 없는 삶을 살았네. 정말 말 그대로, 천사조차 없는 삶이었어.”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쓰러져 있는 여성의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겨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여성의 눈이 겨우 위를 향했다. 그걸 눈치챈 남성이 그녀의 눈높이에 맞게 더욱 몸을 구부려 앉았다. 그녀를 응시하는 그의 눈엔 안타까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의식이 흐려져 가면서도 여성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누구길래 날 이렇게 안타깝게 바라보는 거지?’
“이대로 죽기는 아쉽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어조는 마치 그녀를 위로하는 듯했다. 한번 그와 눈이 마주친 여성은 남성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금안에 여성의 상처투성이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나랑 계약하지 않을래?”
그렇게 말하고서 그는 그녀의 손등 위에 키스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성의 눈엔 생명력이 꺼져가고 있었다. 차에 치인 여성은 힘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걸 본 그는 망설이지 않고 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그가 손짓하자 깃펜이 나타났고 붉은 잉크로 글이 써졌다. 붉은 잉크가 저 누워있는 여성의 ‘피’라는 사실은 악마만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서명까지 휘갈기자 남성은 두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보랏빛 불이 양피지를 순식간에 태웠다.
“계약 성사.”
중얼거린 남성이 여자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그 순간 그녀 몸에 있던 상처가 물에 씻긴 듯이 회복되었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성의 손을 잡고 멀쩡히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섰다. 어안이 벙벙해진 여자의 손을 잡고 남성이 말했다.
“이로써, 네 죽을 운명이 폐기되고 그 위에 나와의 계약을 덧씌웠어. 그런데 아직 계약이 완벽하게 된 건 아니야. 계약의 마지막 조건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여성이 입을 벌려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려고 했다. 이때 남성이 눈을 접고 곱게 웃으며 말했다.
“헬레네.”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들은 헬레네의 눈빛이 떨렸다. 헬레네는 바보같이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았냐고 질문하기보다, 다른 걸 묻는 걸 택했다.
“그럼 네 이름은?”
그 말을 들은 남성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름다운 그의 웃음은 마치 이브를 뱀이 유혹하듯 매혹적이었다. 그는 헬레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루시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