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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월계수의 기억
작가 : 나호
작품등록일 : 2019.9.23

생일을 앞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소년의 이야기.
정통 판타지.

 
11화 잃어버리다(11)
작성일 : 19-10-16 15:18     조회 : 210     추천 : 0     분량 : 8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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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에녹스가 그랜들리만 호수에 갈 것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으면 항상 그곳으로 가고 뭔가 기쁜 일이 있어도 그는 그곳으로 갔다. 그랜들리만 호수와 월계수 나무는 에녹스에게 그런 존재였다.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거나 그는 그곳으로 가 마음을 나누었다.

 

 때문에 시자크는 그랜들리만 호수로 향하고 있었다. 에녹스가 항상 있던 그곳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는 호수에 없었다.

 

 시선이 가는 곳이 하나있었다. 숲앞이었다. 그앞에서, 작은 사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자세히보니 에녹스였다. 한편 상대방은 너무 어둡게 입고 있어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시자크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켈른 피아델리아. 그말고는 없었다. 역시 벨킨이 죽은 것도 저 녀석의 짓이란 말인가.

 

 에녹스가 켈른의 검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에녹스!"

 

 그를 불렀지만 듣지 못한 기색이었다. 시자크는 그에게로 뛰어갔다. 그러자 보였다. 켈른의 뒤에 있는 붉은 눈의 거대한 뱀괴물이. 시자크는 그것 또한 슈뮤즈라 짐작했다.

 

 피가 튀겼다. 켈른의 검에서 난 피였다. 그 피는 에녹스의 것이었다. 그가 다시 외쳤다.

 

 "에녹스!"

 

 시자크는 뱀의 형태를 한 슈뮤즈의 머리가 에녹스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 그것에 검을 내찔렀다.

 

 슈뮤즈가 작게 그르렁 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검에 베인 비늘에서 검푸른 액체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시자크는 그것이 마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마나는 처음 보았다.

 

 그는 쓰러진 에녹스를 살펴보았다. 허리에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피가 흘렀다.

 

 뒤에서 음험한 목소리가 들렸다.

 

 "호오. 드디어 등장하셨군."

 

 시자크가 켈른을 노려보았다. 켈른은 재미있는 것을 보듯이 실실 웃고있었다. 그 다음으로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뒤에 있는 슈뮤즈에게로 옮겨졌다. 다시 보니 엄청나게 거대했다. 형태가 뚜렷한 것을 보니 무척 정교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대체 저것을 만든 자는 뭐란 말인가.

 

 "어쩔 셈이냐."

 

 짧은 말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감정이 깃들어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역시 분노였다. 지금 당장 켈른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정작 그 켈른은 웃으며 말했다.

 

 "데려가야지요. 그가 목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해서 네가 얻는 것이 뭐지?"

 "모릅니다. 이곳에 이렇게 온 것도 단지 명령이 떨어진 것뿐이라서. 다만 이곳에 당신이 있을 줄은 몰랐지요."

 

 시자크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자신이 있는 줄 모르고 왔다면, 그는 복수심에 불타지는 않은 것인가? 정말 궁극적인 목적은 에녹스만이란 말인가?

 

 그가 입을 열었다.

 

 "몰랐다고..."

 "그러니까."

 

 켈른이 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운이 참 좋았지요."

 

 그가 이어 말했다.

 

 "제가 설마 아무 원한도 지니지 않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어서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아아, 당신께서는 제가 원망과 증오에 사로잡혔다 하셨지요. 제가 이렇게 된 것이 당신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십니까? 죄를 인정하신다 하셨지요. 제가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데 가벼이 그 죄를 인정하십니까. 당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거늘. 그러니 전 어제 말했듯이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마 앞으로 영원히 그러겠지요."

 

 그의 원한과 증오가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분노가 이제야 드러났다. 지금까지 써 온 가면을 벗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 가면을 벗어던진 자의 분노와 증오는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과연 나는 이 막대한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버텨낼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 죄를 피로 갚으십시오.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갚을 수 없는 그 죄를. 제 검과 당신의 피로 갚겠습니다."

 

 그가 뱀 형태의 슈뮤즈를 뒤로 물렸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겠다는 의사가 명백히 드러나는 손짓이었다. 시자크가 검을 부여잡았다. 켈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충돌했다.

 

 켈른의 힘은 엄청났다. 본래 오른손잡이였던 그가 오른팔을 잃고 왼손을 단련한 사실이 잘 느껴졌다. 시자크는 두 손으로 그의 검을 응대했다. 그만큼 그의 힘은 셌다.

 

 그러나 한 팔만 지닌 것은 핸디캡이 컸다. 아무리 힘이 세다 하더라도 한 팔이라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기 마련이다. 시자크는 그것을 잘 알았다. 때문에 빈틈이 많은 오른쪽을 공격했다. 그러나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인정사정 봐주시지 않는군요."

 "너도 한 팔만을 가진 움직임은 아니로군."

 

 두 세검이 교차했다. 검이 가벼웠기에 둘 다 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된다면 승부를 가르는 것은 힘과 기술, 그리고 전략이었다. 시자크는 이 싸움이 많이 버겁다고 느꼈다. 그만큼 켈른은 예전보다 강해졌다. 한 팔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힘과 기술면에서 시자크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전략도 마찬가지였다. 치고 빠지거나 검을 휘두를 순간을 재는 것은 일류 검사와 다를 바 없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시자크는 자신의 역할이 켈른에게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멀리 있는 월계수 나무를 바라보았다. 아직인가.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다시 검이 날아왔다.

 

 "큭!"

 

 손등의 살갗이 찢어졌다.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검을 떨어뜨리진 않았다. 그는 한층 더 검을 꽉 부여잡았다. 켈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여전히 소름돋는 미소였다. 한 차례 더 충돌하고 보니 얼굴이 식은땀에 젖어있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인데도, 그의 얼굴은 땀에 흥건해있었다.

 

 다시 월계수 나무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있었다. 그가 기다리던 자였다.

 

 "지티스!"

 

 그러자 월계수 나무에 있던 그가 단숨에 달려왔다. 단신이 아니었다. 그는 말에 타고있었다.

 

 지티스가 그의 검으로 켈른을 위협했다. 켈른이 조금 떨어졌다. 지티스의 뒤로 마찬가지로 말을 탄 엘과 줄리가 보였다. 그녀들은 하녀였지만 말을 꽤나 잘 탔다. 지티스가 에녹스를 보고 시자크에게 물었다.

 

 "주인님, 이게 대체 어떻게?"

 "잘 들어라. 긴 말 할 시간 없어. 지금 당장 에녹스를 데리고 떠나라."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안됩니다, 주인님! 어떻게 혼자 저런 자를 상대하신단 말입니까. 저 뒤에 있는 슈뮤즈는 더더욱!"

 "시끄럽다."

 

 시자크는 단호했다. 이것은 그가 원하는 마지막 소원이었다. 에녹스를 데리고 어서 달아나. 그것만이 지금 원하는 것이었다. 저깟 괴물이 뭐 어쨌단 말인가. 그런 건 상관 없다. 에녹스를, 내 아들을 지킬 수 있다면 아무 것도 상관없다.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에, 이 삶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그 뿐!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잊었느냐."

 

 그가 뒤돌아서 켈른과 다시 대치했다.

 

 "프라이넨스 가문의 가주다. 뭐가 걱정인 것이냐."

 

 지티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쓰러진 에녹스를 바라보았다. 눈을 질끈 감는다. 눈을 감은 순간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다시 떠 각오를 다졌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그를 반겼다.

 

 그는 에녹스의 몸을 들어 자신의 뒤에 얹혔다. 그리고 시자크의 뒤에 서서 고개를 수그렸다.

 

 "...감사했습니다."

 

 그러곤 말에 올라타 외쳤다.

 

 "엘, 줄리. 어서 달려요!"

 "하지만..."

 "어서!"

 

 그들은 주인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주인은 명령했다. 자신을 떠나라고. 어서 도망치라고. 그러니 그들은 그렇게 했다. 눈물을 훔치고서 그리 하였다. 세 마리 말이 부르짖었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눈물나는 이별이군요."

 

 켈른이 말했다. 그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제가 저들을 곱게 보낼 거라 생각하십니까?"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였다. 숲속에서 사사삭 하며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자크는 그 소리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것에.

 

 텅!

 

 시자크가 검을 들어 발톱을 막았다. 쏜살같이 튀어나온 것을 막아냈을 때 팔이 저릿했다. 묵직하고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간신히 모습을 알아내었다. 검붉은 털이 박혀있었다. 사자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모습을 한 눈앞의 슈뮤즈는 이빨을 드러내고 있어 한층 더 험악하게 보였다.

 

 켈른이 그의 모습을 보고 손벽을 한번 짝 쳤다. 즐거운 모습이었다.

 

 "호오, 그걸 막아내시다니 제법이시군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세핀."

 

 시자크의 옆으로 뭔가가 하나 지나갔다. 너무 빨리 움직여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늑대같은 모습에 검었던 것만은 확실히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티스 일행을 쫓은 것까지도.

 

 "안 돼!"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눈앞의 슈뮤즈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검은 늑대는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말의 속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지티스 일행 중에서 가장 뒤쳐져있던 줄리는 그 낌새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중년의 나이였지만 신경이 날카로운 지금은 쉽게 귓속에 들어왔다. 뒤에서 들려오는 풀밭을 짓밟는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악!"

 

 그러나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덮치는 날카로운 이빨에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늑대는 발톱으로 말의 몸을 찢었고 곧바로 줄리를 위협했다.

 

 지티스는 그 비명 소리를 듣고 뒤돌아 외쳤다.

 

 "줄리!"

 

 당연히 말을 멈추었다. 지금까지 함께 한 이가 저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줄리는 그가 그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가, 가! 어, 어서!"

 

 그 말을 끝으로 줄리의 목소리는 끊겼다. 비명도, 신음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티스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 앞까지 달려가고자 하는 욕망을 억눌렀다. 여기서 모든 걸 멈추고 돌아가 싸운다면, 주인의 명령도 줄리의 바램도 모두 이룰 수 없었다. 냉정해져야했다.

 

 자신의 말에 묶어놓았던 에녹스를 엘의 말에 묶고 손짓으로 엘을 먼저 보냈다. 그 긴 행동은 그의 빠른 손놀림에 순식간에 처리됐다. 그는 멈칫했던 말에 다시 박차를 가했다. 늑대는 또다시 쫓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위험한 후열에 엘과 에녹스를 둘 수 없었다. 후열엔 그가 서야 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후회도 동시에 했다. 아까 그 생각을 했더라면, 그렇더라면 줄리는 죽지 않았을텐데.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검은 늑대는 그들을 추격했다. 말보다 빠른지라 그것은 어느새 지티스의 뒤에까지 와 있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그는 늑대가 뒤에까지 온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허리께에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목검 따위가 아니었다. 몇 년 전 자신이 용병일을 했을 때 썼던 검이다. 다시는 뽑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뽑아들고 말다니.

 

 그는 늑대가 덮치는 순간에 말을 몰아 늑대에게 검을 겨누었다. 정확히 급소를 찔러 늑대를 떨어뜨려놓았다. 늑대에게서 검푸른 액체가 흘렀다. 이윽고 늑대는 자리에서 쓰러져 으르렁 거렸다. 그 가슴에 뭔가가 엉겨붙어있었다. 지티스는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엘을 뒤따랐다. 보통 검으로는 슈뮤즈를 그렇게 만들 수 없었다. 지티스가 가진 검이기에, 마법이 깃든 검이기에 그럴 수 있었다. 죽음의 마나조차도 봉인시킬 수 있는 속박의 마나가 그의 검에 깃들어있었다. 꺼림직한 마나가 깃든 검이라 지티스는 오랫동안 그 검을 쓰지 않았다.

 

 밤은 깊어왔다. 더 추워지고 쓰라린 고통이 찾아왔다. 겨울은 결코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달려갔다. 자신들의 땅을 두고 위험한 세상으로 달려갔다. 피와 악으로 물든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소중한 것을 남겨두고, 고통을 짊어지고 그 땅을 떠난다.

 

 그들 역시 앞으로의 삶이 고통으로 넘쳐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시자크는 뒤에서 줄리의 비명이 느껴지는 것을 들었다. 분노가 다시 한번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이 넘쳐버릴 듯한 분노를 눈앞의 대상에게 표출했다. 검을 휘둘러 발톱을 내치고 가슴 안쪽을 찌르려했다. 하지만 금방 뒤로 물러나 으르렁 거렸다. 켈른은 검붉은 슈뮤즈의 털을 메만지며 그것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시자크을 훑어보고는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표정이 참 재미있군요. 좀 더 보고 싶은데."

 "닥쳐라."

 

 말은 짧았다. 다시 한 차례 격돌했다. 팔이 저릿해왔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지만 언제 놓칠지 몰랐다. 빠른 검은 마치 독수리의 부리같았다.

 

 그들은 춤추었다. 어둠 아래 월계수의 땅에서 춤추었다. 서로 헐뜯고 뜯기는 춤사위는 맹렬하고 위험스러웠다.

 

 켈른이 시자크의 검을 튕겨내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그만 끝내도록 하지요."

 "누구 마음대로 그것을 정하느냐."

 

 켈른은 미소지었다. 아아, 이 오만한 남자를 어찌해야할까. 가슴을 찔러 죽여야할까. 목을 베어 몸없이 세상을 둘러보게 할까. 아니면 뱀의 아가리에 쳐넣어 죽이지 않고 구경이나 해볼까.

 

 어떤 선택이나 그에겐 마음에 들었다. 그에게 고통을 선사한다면, 그것만 있다면 그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좀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뭐가 좋을까.

 

 그러다가 십 구년 전의 그 일이 떠올랐다. 그는 팔이 잘려있었고 절망감에 부르짖고 있었다. 그 앞에 시자크가 있었다. 꺼칠한 수염이 그의 입가에 자라나기 전이었고 깊게 파인 주름이 있는 이마는 말끔할 때였다. 그때부터였을까. 원한과 증오가 자라날 때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났다. 그 때 잃었던 팔이 지금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로 인해서 잃어버렸던 것을 그의 앞에 내보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켈른이 웃었다. 이번엔 섬뜩한 웃음이었기에 시자크도 흠칫 떨었다. 검을 가다듬고 준비했다. 이번에 먼저 움직인 것은 켈른이었다. 쇄도해오는 검을 시자크가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

 

 이번엔 다른 느낌이었다. 저릿한 느낌과는 달랐다. 이번엔 검이 닿는 순간,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자크가 신음을 흘렸다. 검은 이미 바닥에 꽂혀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쪽 팔이 잘려있었다.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대체 어느 틈에?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켈른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어떠신지요. 당신이 자른 팔에 똑같이 당해본 기분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분명 잘못됐다. 그렇지 않다면 눈앞의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째서, 어째서 그의 오른팔이 보이는 것이지? 분명 잘렸을 터인데...

 

 그러나 그것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켈른이 망토를 펄럭이며 그의 오른팔을 움직여보았다. 검게 일렁이는 팔은 마치 악마의 것과 같았다. 그 손에 그의 검이 들려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사나워보이는 검이었다. 어떻게 하면 저 정도로 검이 사나워질 수 있는지 시자크는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알았다.

 

 이제 이것으로 끝이다.

 

 아마 이제 그 삶은 종결될 것이다. 저 검디검은 팔에 의해서, 비참하게 죽어갈 것이다.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처음은 프라이넨스 본가의 자신의 아버지였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아직까지 본가의 가주직을 맡고 있어 힘드시지요. 저는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쫓겨난 것은 결굴 제 잘못이기도 하니까요. 이제 그만 물러나 조카에게 자리를 내주시고 편히 쉬십시오. 너무 많은 날을 힘들게 살아오셨습니다.

 

 두 번째는 자신의 하인들이었다. 그들에겐 미안한 감정뿐이었다. 본가에서 쫓겨나온 자신을 따라주었던 것에 미안하다 생각했다. 그들은 행복했을까. 그 끝이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지도 모르지.

 

 다음으로 보인 것은 에녹스였다. 아아, 내가 사랑하는 자식같은 아이야. 네겐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구나. 좀 더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았을텐데. 아직 알려주지 않은 것도 많이 있는데.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은 사라졌다. 한 줌의 재로 변하듯이.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한 여인이었다. 연노란 머리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머리보다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돌아본다. 아는 사람이었다. 이토록 사랑했던 사람도 또 없었을 것이다. 로미아. 당신의 아들을 끝까지 돌봐주지 못해 미안하오. 그리고 미안하고 사랑하오. 이것만은 진심이오.

 

 이제 곧 만나러 가겠소.

 

 꿈이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깨어나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혼자 중얼거린 것은 꿈속에서의 망상에 불과하겠지.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상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하고 있었다. 누구냐. 누가 내 꿈을 방해하느냐.

 

 속삭였다. 속삭이고 속삭였다. 이제부터 시작될 긴 꿈에 대비하라고. 영원한 안식을 받들 준비를 하라고.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렀다. 거짓말이야. 거짓말하지 마. 꺼져라. 내 꿈을 방해하지 말고 꺼져.

 

 그러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 칼날이 서 있었다. 그것을 붙잡은 팔은 악마의 것이었다. 아, 죄 많은 인간의 말로는 이런 것이로구나. 그래, 결국엔 꿈이 아니구나...

 

 검이 천천히 찔려들어왔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에 암흑만이 흘렀다.

 

 

 

 에피소드 1 - 잃어버리다

 끝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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