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하…….”
다시,
“후우…… 하……”
심호흡하는 홍월에게 여옥이 소리죽여 나무랐다.
“입 좀 적당히 벌리거라. 칠이 자꾸 어긋나질 않느냐!”
“아, 긴장되는데 그럼 어떡해요!”
“이럴 거면 아예 네 년이 칠하든지!”
여옥이 들고 있던 붓을 짜증스럽게 내던지며 말했다.
“그래도 얼추 다 됐는가 보죠? 붓 내리는 거 보면?”
과연 거울을 보니 짙디짙은 검정 눈썹이 삐쭉삐쭉한 형태로 눈가를 뒤덮고 있었다.
“좋다! 자고로 호방한 사내라면 눈썹에서부터 바위 같은 기개를 드러내는 법!”
“퍽이나…….”
“자, 이제 수염만 붙이면…….”
홍월이 끈 달린 거뭇한 가염(假髥:가짜수염)을 인중부근에 갖다 대자, 여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정 그걸 붙이려는 것이냐? 우스꽝스러운 것도 정도껏이지.”
“이게 있어야 느낌이 산다니까 자꾸 그러시네. 진짜라니까요?”
“그래, 네 년 마음껏 해 보거라. 삐쭉 눈썹에, 털보수염에, 그야말로 산적이 따로 없구나.”
그러고 틱틱대면서도, 여옥은 홍월의 분장이 나름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생김새 때문인지 적어도 그녀가 여인처럼 보이진 않았던 것이다.
“갓보다는 벙거지가 더 어울릴 것 같긴 하다만…….”
“어? 나도 방금 그 생각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막 갓을 고쳐 쓴 홍월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홍월의 신호에 여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준비가 끝났사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가림막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기다리느라 혼났네요. 어서 건너오세요.”
“후우…….”
마침내 기다려온 순간이다. 홍월은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정해.
오전 내내 이상할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제까짓 게 감히 세자마마의 용안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귀가 닳도록 들었던 그 미모에 대한 기대 때문에?
‘글쎄…….’
어찌되었건 저 너머에 있는 것은 분명 굉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무엇이 자신의 심장을 그리도 떨리게 하였는지 확인할 차례였다.
홍월이 가림막 너머로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이어,
……와아, 꽃이다.
그리도 찬란한 꽃이 홍월의 눈앞에서 환히 빛나고 있었다.
‘방주님도 참…… 어지간히도 선택을 잘못하셨네요. 아무리 사람 낯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한들 저런 꽃을…… 까먹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홍월이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중얼거렸다.
“제일…… 꽃.”
“응?”
“아, 아닙니다! 소인, 세자마마를 뵙사옵니다.”
허둥대는 홍월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꽃이, 아니 세자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꽤나…… 인상적인 외모시네요, 작은 스승님은.”
“……예, 마마께서도.”
홍월은 세차게 두방망이질치는 심장을 비롯하여, 온몸이 다 달달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거…… 방주님 욕할 게 아니었잖아!?’
이대로 가다간 자신의 머릿속마저 새하얗게 변하고 말 것이다. 홍월은 재빨리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하…….”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럼…… 바로 역할극에 들어가는 게 좋겠지요? 서로 익숙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시작하는 것이 몰입하는데 더 도움이 될 듯싶은데?”
세자는 홍월에게 시간을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 네, 넵!”
“왠지 작은 스승님과는 죽이 잘 맞을 것 같아…… 우리, 잘 할 수 있겠지요?”
“무, 물론이죠!”
“그럼…….”
이제 시작이다. 홍월은 있는 힘껏 정신을 가다듬었다.
‘떨지 말자, 실수하지 말자. 세자마마를…… 실망시켜드리지 말자.’
생각이 그에 미치는 순간, 웬일인지 조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이어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과 동시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옆에서 가늘게 실눈을 뜬 채 그들을 지켜보던 여옥의 존재마저 흐릿해져갔다.
집중해.
이윽고,
“나으리, 왜 이제야 오셨어요…… 기다리느라 혼났지 뭐예요.”
한줄기 꽃이 교태어린 미소를 머금은 채 속삭여왔다.
홍월은 가만 눈을 감았다 떴다.
주저할 것 없다. 익숙한 듯 그렇게, 시선을 고요히 부딪혀간다.
“……나으리?”
이어 홍월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굳이 되지도 않는 남정네 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점잖게, 낮게, 편안하게.
“……너는 처음 보는 아이로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바로 그 순간, 내전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심장에 한 줄기 벼락이 꽂혔다.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여옥이었다.
“네, 네 년이 감히 지금……!”
그러나 여옥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술상 앞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기녀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기 때문이다.
기녀는 이어,
“……청화(靑華), 저는 청화라 하옵니다.”
느릿하나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푸른 꽃이라…… 좋은 이름이로구나. 누가 지어주었느냐?”
“……스스로 지었사옵니다.”
“과연…… 내 오늘 운이 좋은 듯싶으이. 이런 인연을 다 만나고.”
“과찬이시옵니다.”
“교태부리던 아까 그 아이는 어디가고 어느새 점잖은 꽃만 남았구나. 어느 것이 네 본 모습이더냐?”
“글쎄…… 궁금하시면 직접 한 번 알아보시지요, 나으리.”
“허, 내 못 알아볼 성 싶더냐.”
“후훗…… 앉으시지요,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즈음 얼어붙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던 여옥이 간신히 숨을 내쉬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