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에 일어난 일이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고 나의 행동이 후회되지만 내가 그러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변명 같아 보일지는 몰라도 나는 적어도 그렇게라도 생각하고 싶다.
때는 12월, 미애원에서는 크리스마스만 되면 ‘미애의 밤’이라고 춤추고, 아침 일찍 일어나 체육관에 가서 각종 여러가지의 게임을 하며 늦은 밤까지 놀 수 있는 날이었다. 웬만해서는 늦은 시간까지 못 놀게 하던 미애원은 이런 특별한 날에만 허용해 주었다. 다만, 이런 날이 드물다는 거다. 12월이 되면 나뿐만 아니라 미애원에 있는 모든 인원이 기분이 좋아졌다. 12월이면 웬만해선 겨울 방학이었고, 미애원에서는 행사 준비로 바쁜 관계로 무섭고 싫었던 보육 교사도 얼굴 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공부하는 시간도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어지간하면 방학 숙제가 없으면 그때의 일기만 쓰면 되었고 숙제가 있으면 그 숙제와 일기만 쓰면 공부는 끝났고 바로 춤 연습을 했다.
당시 나와 소진이는 11살, 오렌지캬라멜의 ‘마법소녀’ 를 쳤다. 하기 싫어도, 하기 싫다며 말도 못 한 채, 우리는 그곳에 있는 큰 언니들의 말을 들으며 맞아가면서 춤을 배우고 외웠다. 분명 즐거워야 하는데 하나도 즐겁지도 재미있지도 않았다. 단지, 맞는 게 두려워 그리고 큰 언니들의 포스가 무서웠기에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존재였기에 묵묵히 춤을 췄다. 더 어렸을 때는 7공주의 ‘러브송’을 추기도 했는데 이때도 하기 싫었던 건 똑같았다. 매번 속으론 울면서도 겉으로는 웃으며 춤을 췄다.
오렌지캬라멜의 ‘마법소녀’ 를 연습할 때였다. 나의 왼팔이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자고로 내 왼팔은 초2 때 수술을 했고, 초4 때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또다시 여름 방학에 손을 수술한 상태였다. 왼팔이 아프기 시작한 건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평상시 생활하면서도 왼팔이 아팠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팔이 아픈 게 아니라 뼈가 아팠다. 잘못하면 부러질 것처럼 너무 아팠다. 학교 가방조차 메지 못할 정도로, 가벼운 걸 들어도 팔이 아팠고, 오른손으로 아픈 곳을 잡고 들어 올려도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다. 팔이 끝까지 올라가지 못한 채로 절반도 안 되게 겨우 올라갈 정도였다. 왼팔이 아플 때마다 나는 늘 그렇듯 참았다. 아파도 아무런 대책이 없을 것 같았고, 보육 교사한테도 말할 용기조차 없었다. 말을 한다 해도 춤을 꼭 춰야 했을지도 모른다.
24일, 크리스마스 이전 결국 일이 터졌다. 24일이면 일기만 쓰고 춤만 춘다. 왜 하필 24일이었는지 또다시 나의 왼팔이 아파져 왔다. 아, 자세히 말하자면, 팔이 아니라 뼈가 아팠다. 24일에는 이미 춤도 어느 정도 다 익힌 상태였기에, 보육교사와 언니, 오빠 등 모든 인원이 보는 가운데서 춤을 췄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시험이랄까, 테스트랄까..
왼팔이 아파 아프다고 말할까 말까를 주저하며 고민하다가 결국에 말을 못 했다. 이게 어쩌면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25일, ‘미애의 밤’에 춤을 추기 위한 미리 설치해 둔 스피커에서 오렌지캬라멜의 ‘마법소녀’ 노래가 나왔다. 왼팔 뼈가 아팠지만, 그리고 아파져 왔지만, 그랬기에 눈물이 났고 두려웠지만, 나는 애써 웃으며 아픈 티를 내지 않은 채 춤을 췄다. 이상하게도 나는 속으로 저 아파요, 왼팔 뼈가 너무 아파요 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입으로는 웃었고 내 몸은 춤을 추고 있었다. 연습한 데로 머리가, 그리고 내 몸이 익힌 데로 춤을 추고 있을 때쯤,
하늘에 뜬 별 만큼
바다에 소금만큼
꽉 찬 느낌인 거니
난 몰라 난 몰라 천번만번
말해줘도 몰라 몰라
사랑인지 몰라 그 심장이
미칠 듯이 궁금해
:
:
:
노래는 계속 흘렀다. 총 5명으로 앞에 두 명의 아이와 뒤에 세 명의 우리 외 또 다른 한 명이 ‘난 몰라 난 몰라 천번만번’ 부분에서 자리를 바꿔가며 춤을 췄다. 그 전에 나오는 ‘하늘에 뜬 별 만큼 바다에 소금 만큼’ 부분에서 팔을 돌리며 춤을 출 때 나의 왼팔에서 ‘뜨득’ 하는 소리와 함께 경험해보지 못한, 그리고 겪어보지도 못한 그런 고통과 아픔이 느껴졌다. 팔이 점점 무거워졌고 동시에 근육이 밑으로 쏠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팔을 들고 있는데도 들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팔이 무거워 축 내린 듯한 느낌에 뼈가 부러졌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나는 결국 뼈 부서진 것조차 조금의 시간을 참은 뒤 ‘소란해 소란해 내 가슴에’ 부분에서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걸 본 보육 교사가
“소영이 왜?”
그의 물음에
“왼팔이 아파요.. 팔이 둥둥 떠 있는 거 같아요.. 팔이 너무 무거워요..”
울면서 그리고 콧물을 흐르면서 말하는 나는 그 아픔과 고통을 이틀간의 시간을 참아야 했다. 25일 ‘미애의 밤’을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라 한다 해도 병원 문은 닫더라도 응급실을 열지 않나 싶은데,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이다. 만약, 크리스마스에도 응급실 문을 연다면, 그리고 내가 뼈가 부서진 날이 24일 밤이었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는 건 왜일까.. 정말로 ‘미애의 밤’을 위해서였을까..
지금이 20살인 나는 아직도 왼팔이 무겁다. 그때 뼈가 부서져 근육이 아래로 쏠린 탓일까.. 아니면 초2 때 수술한 부위가 제대로 정리해 주지 않아서 더 커진 탓일까.. 아니면 그때 응급처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서일까..
그렇게 나는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가 아닌 것처럼,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지도 들지도, 내가 가누지 못할 정도의 팔을 가진 채, 26일까지 버텼다. 하루만 참았네! 뭐네 하겠지만 나는 그 하루가 1년보다도 100년보다도 더 긴 하루였다. 더군다나 내 옆엔 엄마가 아니라 아직은 불편한 보육 교사라는 점에 팔이 더더욱 아팠다. 혼자 옷도 못 입을 정도로 팔을 쓰지도, 들지도 못했고 혼자 밥을 먹지 못한 채로 크리스마스의 악몽 아닌 악몽이 되었다.
26일, 부산에 있는 새부산 병원에 갔다. 그 전날이 25일, 크리스마스였던 탓에 병원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접수하고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사 선생님을 만나뵙다.
X-ray를 찍어봐야 한다는 말에 얼른 사진을 찍고 다시 찍은 사진을 보러 의사 선생님을 뵙다.
사진을 보니 팔뼈가 금이 가 있었다. 의학용어로 하면 골절, 내가 말하면 그냥 뼈가 부러진 거..
그래서 그렇게 아팠구나... 싶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기부수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병원에 좀 입원해서 1~2주일 정도면 붙는다고 하시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셨다. 그 당시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당연히 뼈가 1~2주 안에 붙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뼈가 빨리 붙나 보나 싶었는데, 크고 나서 엄마가 발가락이 뼈가 부서져 병원에 간 뒤로 뼈는 1~2주 아니라 뼈가 붙으려면 적어도 한달은 기부수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사람 팔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과연 내가 미애원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의사 선생님의 오진이었을까.?
나는 기부수 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뿐만 아니라, 수술을 여러 번 받은 몸이라 기부수 라는 말이 수술을 의학용어로 말한 건가 싶어 잔뜩 겁을 먹었고 그러면서도 수술하길 바라는 그런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기부수가 뭐지?.. 수술인가? 난 또 수술하기는 싫은데.. 하면서도 미애원에 있기는 더 싫어. 차라리 수술해서 병원에 있는 게 더 나아.. 라는 그런 아이러니한 생각을 했다.
‘하나님, 제발 수술 안 하게 해 주세요. 저 또 수술하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미애원에 가고 싶지는 않아요.. 차라리 수술해서 병원에 더 있는 게 나은데, 제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나님..’
기부수 라는 말에 겁을 먹었지만 기부수는 나중에 알고 보니 깁스였다는 걸 알았다. 부러진 팔뼈를 바르게 맞추어 붕대를 감았다. 그러고 나서 제대로 뼈가 맞춰져 있는지 또다시 X-ray를 찍었고, F층에 올라가 입원을 했다. 하면 안 되는 말인 걸 알지만, 사실 병원에 입원한 게 내게는 너무나 좋은 일이었다. 미애원에서의 생활도 잠깐은 스탑이니까 말이다.
잠시 보육 교사가 원으로 가고 난 뒤, 언니가 왔다. 언니 말고 또 다른 큰 언니도 같이 왔는데 미애원에서 그 큰 언니가 유일하게 좋았고 착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는, 나중에 언니가 말해준 바로는 그 큰 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능 수준이 조금 낮아졌다고 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만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그랬기에 그 큰 언니한테는 정말로 미안하지만,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포함해서 그 언니를 놀렸고, 함부로 대하면서도 무시했다. 그런데도 그 큰 언니는 우리를 잘 챙겨주면서도 때론 웃게도 해주고 힘들거나 짜증 나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땐 같이 욕하면서 같이 아파해주는 좋은 언니였다.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이제서야 말해서 더 미안하지만, 이제라도 말할 수가 있어서 조금은 다행이지만,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잘못했어요.. 고마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