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설은 오늘도 엄마의 목소리를 흐리게 들을 수밖에 없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함께 집에 잘 있는지 저녁은 챙겨 먹었는지 묻고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잘 있다고 대답하는 짧은 통화가 엄마와 나누는 대화의 전부이다. 어린 설은 오늘도 아빠에게 하루 내 있었던 일을 흐리게나마 떠들 수가 없다. 축 처진 어깨로 새벽 늦게 귀가하는 아빠의 모습을 잠에서 깬 눈으로 살짝 들여다보며 오셨냐고 웅얼거리다 다시 잠에 든다. 오늘의 이야기를 전하기엔 아빠의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이라. 설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신다. 엄마는 번화가에 작은 주점을 운영하시고 아빠는 사업을 하신다. 아이들을 위해 늦은 새벽일지라도 열심히 눈을 뜨고 억지로 웃으며 일을 하신다. 설이 부모님의 그런 점을 닮았을까. 설은 오늘도 열심히 괜찮은 척을 한다. 그 어린애가 혼자 괜찮은 척을 매일매일 이어가고 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나가시고 집에는 초등학생 여자아이 설과 오빠 둘이 남아있다. 10살 터울의 큰오빠 류환, 2살 터울의 류건. 아 아니지. 아이 둘이 남아있다. 며칠 전, 고등학생인 환은 집을 뛰쳐나갔다. 딱히 거창한 이유랄 건 없었다. 그렇다고 사춘기라는 단순한 요인은 또 아니었다. 외롭고 답답한 집에 부모님을 대신해 이렇게나 일찍 가장이 되어버린 것이 지독했겠지. 결국 설과 건이 집을 지키고 있다.
두 아이 모두 안방에 들어가 함께 앉아있다. 조금 후 티비를 보던 건이 설에게 슈퍼에 다녀오라며 심부름을 맡긴다. 현재 시각은 오후 11시 30분. 어린 여자아이가 홀로 밖에 나가기에는 무섭고도 낯선 시간대이다. 설은 어두운 바깥이 무섭지만 군말 없이 심부름을 가야 한다. 건에게 토를 달았다간 맞게 될 것이 뻔하니까.
설이 마침내 심부름을 다녀왔다. 건이 봉투를 슬쩍 들여다보더니 잘못 골라왔다며 설을 노려본다. 아차 싶은 설이다. 지금 가벼워 보이는 이 일상이 설에겐 지옥과도 같다. 건은 마치 이때다 싶은것마냥 설을 몰아붙인다.
"가기 싫었으면 애초에 말을 하지 그랬냐? 내가 만만하냐? 심부름 대충 하냐?"
스쳐들어도 따가운 말투로 근거 없는 질문들과 욕설을 섞어 건이 묻는다.
"미안해.. 다시 사 올게.."
살벌한 오빠의 눈을 힘겹게 쳐다보며 기가 죽은 목소리로 설이 간신히 대답한다.
"어찌 니는 제대로 하는 게 없냐 꺼져"
건이 대답하였고, 이들의 대화는 끝이 났다.
설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맞지 않고 넘어갔다는 다행스러움이 만들어낸 한숨이었다. 초등학생 여자아이는 숨넘어갈듯 웃는 꺄르륵 소리가 아닌 한숨 한번 내뱉어 꾸역꾸역 버티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설은 이렇게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