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가게에 한 번 들러달라는군요.”
“사장이 가면 직원은 보통 싫어하지 않나?”
“결재는 하셔야 되니까요.”
“도장 줬잖아? 알아서 쾅쾅 찍으라고 그래. 귀찮으면 가게 열지 말고 놀아. 아니면 이벤트라고 그러고 다 공짜로 뿌려버려. 그러면 매상 계산할 것도 없지.”
“그 정도로 귀찮은 수준이면 아예 폐업을 하지?”
일단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군께 손님이 찾아왔었다고 합니다.”
“손님? 누가 나를?”
“노아, 라고 이름을 남겼습니다.”
효령의 눈썹이 아까 영실의 눈썹마냥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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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정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작은 바.
바의 이름은 ‘로요’.
효령은 ‘로얄 패밀리였는데 몰락했어요’로 지으려고 했는데 영실이 극구 만류하여 줄임말로 합의를 본 결과물이 ‘로요’다.
그 곳 바에 현재 여자 한 명이 앉아 있다.
앞에 놓인 칵테일은 피나 콜라다.
남자 한 명이 들어와 손님들 사이를 지나 여자에게 다가왔다.
여자보다 바텐더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어어, 오랜만.”
효령은 늘 그렇듯 건성으로 인사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걸어가 여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늘 마시던 걸로.”
“드시던 게 매번 다르셨는데요. 늘 오시던 것도 아니시고.”
바텐더의 말에 효령이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아, 쫌! 아무거나 대충 줘. 정하기 귀찮아.”
“예, 사장님.”
여자가 웃었다.
“자기가 필 꽂힌 것 말고는 모든 걸 귀찮아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보네요.”
“누구한테 어떤 소개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알고 보면 꽤 괜찮은 남자 효령이라고 합니다. 이보라고도 하고.”
“노아에요. 효령이 더 어감이 좋네요.”
“무려 노블께서 어인 일로 이 ‘로얄 패밀리였는데 몰락했어요’ 에 행차를?”
여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른 뱀파이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들은 이미 노블이건 뭐건 한참 넘어선 존재들 아닌가요?”
“뭐 또 그런 과찬의 말씀을. 그래 봐야 일개 하찮은 일반 뱀파이어지. 하지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효령이 정색했다.
“‘당신들’이라고 같이 묶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엄연히 내가 훨씬 낫지, 일단보다.”
여자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일단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네요.”
“안 그래도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온 겁니다. 이야기해 보시죠.”
“아재라는 평판도 대강 맞는 것 같군요.”
“내가 또 스무 살 풋내기는 아니지.”
“물건을 하나 부탁해요.”
“어떤 물건?”
“내가 지인에게 선물한 풀피리인데, 그걸 누가 훔쳐갔네요. 알다시피 나는 직접 움직이기가 좀 그래서.”
노블은 사회에서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혹은, 눈 앞에 있는 여인, 노아의 경우처럼 세간에 유명한 인사로 드러나 있지는 않더라도, 이래 저래 연이 묶여 있기 마련이다.
“전문 흥신소에 맡기는 게 훨씬 빠르고 간단할 텐데 굳이 나를 찾아온 건, 셋 중 하나겠군요.”
바텐더가 칵테일을 효령의 앞에 놓았다.
효령은 칵테일을 들고 음미하듯 마셨다.
“크…역시 칵테일은 로자리가 제 맛이지.”
“솔티 독입니다, 사장님.”
“...그, 그래! 이거 솔티 독인 거 나도 알아! 내가 모르는 줄 알았어? 이 솔티 독이 맛이 없다고 돌려 깐 거야! 애가 왜 이렇게 눈치가 없니…쯧…”
“아, 죄송합니다. 제가 착각했네요. 이건 콥스 리바이버 No.2 입니다, 사장님.”
“조용히 해.”
효령의 말에 바텐더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크흠, 아무튼 첫째, 물건이 특별하거나, 둘째, 수호자의 일과 관련되어 있거나, 셋째, 그 둘 다거나.”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하겠네요. ’글씨’를 드리죠.”
“받고, 그 위에 ‘수호자’가 아닌 ‘효령’ 개인에게 이득이 되는 걸 얹어 준다면?”
“풀피리를 가져다 주면, 얼마 전 티벳에 가서 직접 듣고 온 최신 정보를 드리죠.”
‘직접 들었다’라고 한다면, 하이랜더들을 가리키는 것이겠지.
일반 뱀파이어에게 없는 노블 뱀파이어의 특권들 중 하나.
원하는 때 하이랜더들을 방문해서 만날 수 있다는 것.
“콜.”
“계약서라도?”
노아의 말에 효령이 씩 웃었다.
“계약서는 무슨, 촌스럽게. 그냥 가는 거지.”
“서로 선의로 진행하자는 건가요?”
“바로 그거죠.”
효령이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뒤 덧붙였다.
“원래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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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색 세단이 멈춰 선 곳은 연희동 고급주택가의 한 단독주택 앞이었다.
세단 안에는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운전석에는 영실, 조수석에는 효령, 그리고 뒤쪽 좌석에는 일단이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군?”
영실이 효령을 보며 물었다.
효령이 대답했다.
“약해 빠진 놈은 가 봐야 짐밖에 안 되니까 여기서 안전하게 대기하고 있고, 둘이 다녀오는 걸로 하자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군.”
“올 때 메로나.”
“귀찮으면 귀찮다고 솔직하게 말을 하지.”
일단의 말에 효령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숨쉬기도 귀찮다. 됐냐?”
“그 정도면 죽어야지.”
일단이 그렇게 말하며 뒷문을 열고 내렸다.
영실도 앞문을 열고 내렸다.
내린 두 남녀는 문을 닫음과 동시에 빠른 걸음으로 주택의 대문으로 다가갔다.
영실이 익숙한 솜씨로 잠겨 있는 대문의 잠금쇠를 풀고 난 뒤 문을 당겨 열었다.
정원 가운데로 난 문을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러 가는 두 남녀를 발견한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다.
어차피 목줄이 매어져 있어 그 이상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
둘은 개의치 않고 걸어가 주택의 정문까지 도달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영실이 익숙한 솜씨로 문을 땄다.
안쪽에서 부산한 소리가 나는 것이 일단의 귀에 들려왔다.
최초의 뱀파이어, 일단은 귀를 포함한 오감이 아주 밝았다.
영일이 문을 따자마자 문을 열어젖혔다.
두 명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일단이 달려갔다.
일단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고 영실이 그 뒤를 따랐다.
“뭐야!”
계단 위쪽에 있던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 두 명이 인상을 쓰며 외쳤다.
이럴 때 멈춰 서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대개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일단에게 대화 따위가 옵션으로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영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일단이 계단을 달려 올라가면서 간단명료하게 외쳤다.
“안 비키면 팬다! 비켜!”
저 말을 듣고 저 두 놈이 길을 비켜줄 리는 없지.
저건 그냥 나중에 ‘난 경고했어’라고 합리화할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랄까.
팰 거면 그냥 패지.
악취미로군.
일단의 뒤에서 그녀를 따라 달려 올라가는 영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