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창피하게 왜 이래? 사람들 다 보잖아. 어이 씨! 빨리 가! 빨리!”
그녀의 입술이 그녀의 손바닥에 동여매진 것처럼 보였다. 자칫 발을 잘못 헛디디면 계단으로 구를 정도로 허둥대 내려 가면서 소리를 쳤다.
“내 가방 가져와!”
“야 임마! 조심 해! 그러다가…….”
김근수가 하려고 한 말은 ‘또 재발한다.’였다.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 정미경이 앉아있던 자리로 가서, 쇼핑백 같은 정미경 가방에 책을 주섬주섬 쑤셔 넣어 도서관 밖으로 나온 김근수의 가슴이, 매복한 군인처럼 불쑥 튀어나온 정미경의 주먹에 기습공격 당하고 말았다.
“야! 창피하게 거기서 그러면 어떡해?”
히죽히죽 웃으며 정미경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럼! 여기서는 괜찮다는 말 맞지? 허락 받았다.”
벌써 정미경의 옆구리가 휘감긴 상태였다.
“야! 안돼!”
“낯간지럽지만 더 이상 수동적이란 말을 듣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사랑해! 됐나?”
매일 체중계에 올라서서 72kg이상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며 운동하는 김근수의 키는 180cm였다. 게다가 태권도와 합기도 공인 3단으로 돌덩이 같은 근육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가 165cm의 호리낭창한 정미경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겨 안아버렸다. 거기다가 입술까지 또 강탈하고 있었다. 정미경은 없었던 힘도 노력하면 솟구쳐 오른다는 그런 허망한 꿈을 잠시 꾸면서 앙탈을 부렸지만 곧 포기하면서 눈을 감아버렸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의 동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정미경이 할 수 있는 건 밀어내는 척하는 몸부림뿐이었다. 지나치는 학생들이 눈살을 찌푸려 쳐다보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자! 만방에 알렸으니 이제 떳떳하게 걸어가야지. 딴 따다 단 딴 따다 단.”
“어이 씨! 쪽 팔려서 정말……. 빨리 저쪽으로 가”
도서관 한쪽 귀퉁이로 고개를 까딱했다.
“왜? 이걸로 부족해?”
김근수의 정강이가 바로 걷어차여 버렸다.
“에이 씨! 정말 못 말려. 그 말이 아니잖아. 제발 능청 좀 그만 떨어. 갑자기 그러면 어떻게?”
“이제 알겠지. 나 원래 능동적인 사람이야. 그러니 수동적이 뭐니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마. 알았어? 그런데 너 오늘 뭐 먹고 왔나? 입술이 엄청 달짝지근하네. 한번 더 하면 안될까?”
김근수가 혀를 날름 내놓았다. 그 모습을 본 정미경의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졌다.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봤다. 어디 하나라도 진지한 면을 찾고 싶었지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끄러미 눈만 마주치고 있을 때 김근수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언젠가는 할거였잖아. 중매나 미팅으로 만난 사람들도 마음만 맞으면 바로 키스한다더라. 키스뿐이겠냐? 신혼여행 갔다 와서 서너 달 뒤에 출생 신고하는 사람들도 많다더라.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를 생각해봐. 벌써 사 년이 넘어간다. 사 년!”
정미경이 가련한 듯이 쳐다보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개똥 같은 소리를 하고 있네. 야 임마!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옆집 여자친구에게 가서 그런 소리를 해봐라. 말도 말 같은 소리를 좀 해라.”
김근수 뇌리에서 이수현이 문득 스쳐갔다. 부부간에 평생 동안 섹스를 얼마나 많이 하는 줄은 모르지만 짧은 시기에 수현이와 했던 섹스의 횟수가 거의 엇비슷하지 않았을까? 불이 붙으면 하루에 몇 번인지는 잊었지만 녹초가 될 때까지였다. 그랬는데 섹스도 키스도 아닌 입술만 훔친 이 사람에게, 무슨 이유로 첫 사랑을 하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리지? 수현이가 결혼 한다는 말에 눈물은 왜 나왔나? 그때 했던 섹스는 또 무엇이었나? 그 동안 숱하게 만났던 여자들과 그녀들과의 섹스는 또 무엇이었나? 남녀간 데이트에서 필연적으로 나와야 할 하나의 요식행위였나? 그녀들은 그렇게 쉽게 순결을 버리고 동침을 했나? 여자들도 남자와 같은가? 김근수가 알았던 여자들은 유유상종이듯이 전부 그랬다. 이런 생각이 불쑥 던 김근수가 정미경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때 정미경이 물었다.
“너 그렇게 보니 멋있다. 그래! 항상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보여.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심각한 눈으로 변했어? 나도 좀 알자.”
어느새 머리 속이 순결로 점령된 상태인 김근수의 입에서는 적당히 둘러 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정미경은 순결을 떠나서 그녀의 자궁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드러내져야만 했다. 그때의 수모는 상상할 필요조차 없었다. 군복무 때였다. 칼 바람이 불던 날 발가벗고 모래 위에 있었다. 캄캄한 밤. 파도소리만 들렸다. 앞에서 출렁이는 파도는 쳐다 보지 않았다. 눈은 오로지 따다닥 거리는 이와 턱 아래에 있는, 차디찬 손바닥에 붙잡혀 있는, 고환에 가 있었다. 같은 내무반에서, 같은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지낸 전우가 전우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들은 똑 같은 말을 했다. 발가벗겨져 관중으로 꽉 찬 축구장 정 중앙에 발가벗겨져 세워진 기분이라고 했다. 그것도 수모인데 너는 오죽했을까?
김근수가 씁쓸히 웃으며 정미경의 눈을 보면서 뜬금없이 물었다.
“너희 집에 놀러 갈까? 어머님하고 술 한잔 하고 싶은데…….”
정미경이 망설이기 싫었던 것 같았다. 매몰차게 거절을 해버렸다.
“안돼! 우리 엄마 너 만나면 다시 병원에 가야 해. 내가 말했지. 알코올 중독됐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정미경의 손을 잡았다. 정미경이 손을 뿌리치지 않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김근수는 잠시 착각을 했다며 후회를 하고 있었다. 정미경의 아픔은 그녀의 어머니의 아픔이기도 했다. 가장 은밀한 부분의 상처에 대한 말은 가장 은밀한 말이다. 그 말을 허심탄회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본인이라는 생각만 했지 그 말을 하는 동안 삭여야 할 분노는 생각하지 않고, 경솔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 주에 우리 집에 갈 때 같이 갈래? 좀 도와줘라.”
정미경도 이 말이 나오길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도와달라는 말은 왠지 거슬렸다. 한창 벼 베기 철에 우리 집도 일손에 딸리는데 남의 논에 가서 오지랖 넓은 짓을 하는 건 전혀 내키지 않았다.
“방학 때 가면 안 될까?”
“그땐 너 필요 없다. 그땐 가봐야 구박만 받는다.”
“논이 몇 마지기인데?” (* 한 마지기= 200평(661평방미터))
“두 마지기. 둘이서 하면 반나절이면 끝난다. 갈래 안 갈래?”
그 주 토요일에 정미경은 김근수의 집으로 모른 척하고 따라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