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제법 아픈 것 같았다. 죽을 상을 쓴 채 귀를 만지며 짜증스런 소리를 냈다.
“야! 귀 떨어져 나가겠다. 무슨 손가락 힘이 그렇게 세나?”
“정신 차려 임마! 도대체 얼마나 마셨어?”
“글쎄? 그런데 내가 왜 여기 있냐? 너는 그게 뭐냐? 어디 아파? 왜 환자복을 입고 있어?”
정미경의 아래 위를 훑어보던 김근수가 눈에 힘을 잔뜩 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정미경은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리는 것 같아서, 잡고 있던 목발 손잡이를 더 세게 잡아야만 했다. 그런데 아랫도리는 그때처럼 통증도 없고 찌릿하지도 않았다. 그때는 저 눈이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너 정말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정미경을 부축하듯이 팔을 잡고 의자에 앉히고는 옆에 앉아서 관자놀이 꾹꾹 누르며 말했다.
“글쎄! 어떤 예쁜 아주머니가 앞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얼굴이 전혀 안 떠오르네. 너는? …… .”
정미경의 팔을 잡고 여기저기를 돌리며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나?”
헛웃음을 치면서 한심한 눈으로 보며 물었다.
“그래, 알겠다. 그런데 내 인상이 그렇게 무서웠나? 아니면 교화라는 말이 악몽을 되살려서 그랬냐?”
슬쩍 흘겨보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둘 다. 앞으로 내하고 눈 마주치지마! 너! 거울 안 보지?”
“알고 있다. 내가 봐도 내가 무서워 거울 근처에도 안 간다. 그런데 어쩌냐? 계속 너 옆에 있을 건데. 나는 나를 볼 수 없지만 너는 계속 나를 봐야 하는 데. 견딜 수 있겠어?”
도무지 감(感)을 잡을 수 없는 이 사람은 진실된 마음이 무엇인지 항상 궁금했던 정미경이 굳어진 인상으로 물었다.
“너 혹시 나한테 동정심 같은 걸로 잘난 척하고 싶어하는 거 아냐? 아니면 이젠 힘이 떨어져 싸돌아 다닐 자신이 없으니 바로 근처에서 찾고 있는 거 거나? 둘 중에 하나지?”
“아니! 둘 다!”
야릇한 눈으로 정미경을 쳐다봤다. 정미경은 한숨만 내쉬며 앞만 보며 만약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만약에 그때 무식하게 전경에게 날아들기 전에 그 언니. 이수현이 아닌 나를 울러 매 도망을 쳤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관계일까? 붙잡혀 가기 전날 만났던 이수현 언사는 거침이 없었다. 그녀만 따라가면 세상은 바로 바뀔 줄 알 정도로 똑똑한 여자였다. 그런데 그녀는 같이 붙잡혀 갔지만 같이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날 후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사라진 사람이 또 있다. 한 겨울에도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녔던 여자. 정말 힘이 떨어져 나를 썩은 동아줄로 아는가? 정미경의 눈이 아랫도리로 떨어졌다.
“정미경!”
이게 무슨 소리? 처음으로 이름을 불렸다. 정미경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 어때? 괜찮아 보여?”
정미경은 바로 김새는 기분이었다. 멋져 보였다가 바로 막걸리 통에서 저려진 불독 같았다.
“멋지다! 술독에서 잘 저려져 나온 불독 같다. 그대로 집으로 가던 학교를 가던 빨리 가라. 그런데 너 정말로 누구랑 술 마신지 기억이 안나? 벌써 치매냐?”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던 엄청 예뻤어. 전화번호라도 받아둘 건데. 옛날의 내가 아냐? 내가 이런 실수를 절대 안 하는데. 나도 감각이 많이 떨어졌어. 아쉽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미경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콧방귀를 쳤다. 갑자기 김근수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때 전부 내팽개쳐두고 나를 업고 도망쳤다면, 술이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던 엄마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너도 아쉬워할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짝에 쓸모 없는 별의 별 생각을 하면서 김근수를 보고 있었다.
“눈 마주치지 말자며. 너! 볼수록 귀엽다.”
“야! 야! 너 아직 술 덜 깼어.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 이제 오지도 말고.”
“내 때문에 이렇게 누워 있는데 내가 안 올 수가 있냐? 너라면 그러겠어? 일단은 내 마음의 부담을 덜고 싶어 오니까 네가 부담스러울 때 그때 말해. 그러면 안 올게.”
정미경의 입에서 부담스럽다는 말은 빨리 나오지 않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고 있었다.
“가만히 보면 너 아주 나쁜 습성이 있어. 모든 게 흑백이야. 그 흑백 네가 알아서 가려. 내한테 책임을 넘기지 말고.”
“고맙다. 퇴원할 때까지 매일 올 테니까 부담스러우면 언제던 말해. 나! 생긴 건 이래도 깔끔한 놈이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그런 성격 아니니까 언제던! 오케이?”
빙긋이 웃으면서 김근수의 등을 밀을 때 김근수가 정미경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렇게 잡은 손은 정미경이 퇴원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돼다가 학교로 돌아간 그날 바로 원래대로 돌아가 버렸다. 하루는 정미경이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을 김근수 얼굴에 바짝 붙여 따지고 있었다.
“뭐야? 왜 나를 피해?”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말이 나왔다.
“아니지! 내가 피한 게 아니고 네가 손 잡을 기회를 안 준거야. 도서관 안에서 손잡고 다닐까? 한번이라도 어디 놀러 가자고 한적이 있냐? 맨날 수업 도서관 집으로 쪼르륵. 내 잘못이 아니다.”
“네가 먼저 놀러 가자고 하면 되잖아. 그걸 꼭 내가 얘기해야 해? 너 굉장히 수동적인 인간인 것 같아. 만약에 우리 둘이 무슨 일을 하다가 너한테 불리한 일이 생기면 책임을 내한테 덮어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만큼 책임감이 없어 보이기도 해.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심기가 뒤틀려 있다는 걸 강력하게 보여 주려는 의도로 김근수가 미간에 힘을 잔뜩 주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인상도 이제 아무것도 아닌 그저 그런, 식상한 인상으로 정미경에게는 심어져 있었다. 오히려 정미경이 눈에 힘을 더 주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너 엉덩이 한번 내봐. 분명히 뾰두라지가 검은 점이 돼 있을 거다. 너는 못 보니까 내가 봐줄게. 빨리 벗어 봐!”
한쪽 팔로 어깨를 감싸 붙잡고 한쪽 손은 바지를 벗길 기세였다. 정미경이 당황해서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야! 하지마! 하지마! 너 이거 성추행이야! 하지마! 간지러워!”
지나치는 학생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짓궂게 장난을 치던 김근수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야! 안돼! 여긴…… .”
징그러운 놈! 정미경이 김근수 가슴을 치고 싶어도 칠 수 없을 정도로 잡아 당겨 자기 가슴에 정미경의 가슴을 바짝 붙여 놓고 키스도 뽀뽀도 아닌 정미경 입술에 자기 입술을 붙여 문질러버렸다. 정미경이 할 수 있는 행동과 말은 이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