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라. 떠나서 두 번 다시 검을 쥐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넌 형제의 가슴에 검을 꽂는 배덕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아무도 너를 알아볼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곳에서 눈에 띠지 않게 살아가거라. 그것만이 네가 나의 아들로서, 또 그 아이의 동생으로서 남아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터! 무정하고 야속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묵가의 사내라면 너도 이것이 돌릴 수 없는 숙명임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난 몰랐다. 아니, 왜 갑자기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는 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내 나이 고작 아홉 살.
나름대로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들어왔다지만, 처음으로 형과 가진 비무에서 이긴 그날. 왜 이런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타노(駝老)의 손에 끌려 수많은 산을 넘고, 또 강을 건널 때까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억지로 손에 곡괭이가 쥐어지고, 도무지 밭이라 부를 수 없는 변경의 황무지를 옥토로 바꿔놓는 그 순간까지...
나는 변해버린 육신을 지탱해줄 영혼의 성장을 이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칠흑 속을 등불 하나 없이 헤매던 것처럼, 그저 헤매고 헤매다 이곳을 왜 헤매는지 그 이유마저 상실한 쭉정이가 되어 있었다.
자그마치 그런 시간이 십오년.
그나마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건, 그 긴 시간을 한 결 같이 나와 함께 하던 타노가 끝내 병환과 노환이 겹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타노는 죽기 직전 남긴 편지에 처음으로 날 소주가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그래선지 오랫동안 내 곁을 지켜온 자가 나의 감시자가 아닌 진정으로 날 아끼고 사랑해주던 혈육임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그 충격이 십오 년간 멈춰있던 나를 움직이는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소주 아니 용아...
이제까지 난 주군이 남긴 한 가지 명에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주군과 수하란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 십오 년이란 시간...
허허. 벌써 강산이 한 번 바뀌고 절반은 더 바뀔 시간이 흘렀구나. 정말 모든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어쩌면 너만 아니라 나도 그 날로부터 벗어나지 못한지도 모르겠다.
느닷없이 주군에게 불려가 널 지키고, 네가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란 명을 들었던 날, 나 또한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주군의 명을 이대로 따라야 하나 의심이 들었을 정도니, 그분의 친 혈육인 너는 어떠하겠느냐?
그래선지 언제부턴가 나는 네가 소주가 아닌 마치 네 피붙이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같은 운명에 전락한 동지였다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르지.
...중략...
쯧쯧. 그나저나 나이드니 주책없이 감성적이고 말만 많아지는구나. 해서 결론만 말하겠다.
난 그간 병환이 깊어짐에 따라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주종지약이 뭐고, 절대충성이 다 무엇이랴. 내가 있어야 주종지약도 있고, 절대충성이 있거늘. 내가 없는 다음에야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밭도 결국 거기에 뿌릴 씨앗이 있어야 그 존재 의의가 있는 법인데, 그간 나는 뿌릴 씨도 없이 왜 그토록 열심히 밭을 갈아온 것인가?
알다시피 씨앗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존재하기 마련이다. 더불어 열매가 다시 씨를 남기는 것은 새롭게 또 다른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고.
그래서 나는 이제 네가 지난 십오 년간 열심히 갈아온 밭에 씨를 뿌렸으면 한다. 그것이 너를 이곳에 내던진 가족에 대한 복수이건, 아니면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함이건, 아니, 심지어 그들을 용서하기 위한 씨앗이라도 상관없다.
이젠 씨를 뿌리고 그 열매를 피우려무나. 네가 바라고 또, 네가 원하는....
그래서 나는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아직 나조차 무엇이 열릴지 모르는 타노가 남긴 씨앗에 싹을 틔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