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은 지금 그 오빠의 그 동생이란 걸 잠시 망각하고 자기 만의 습성에 도취돼 있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모양이었다. 오빠에게 걸려 들었듯이 그 동생에게도 딱 걸려 들었다.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은 부적합하고 못 도와 준다는 말이 적합할 것 같다. 첫 번째 이유는 창훈이 때문이다. 벌써 창훈에게 밀려주기로 했고 계약서에 도장도 꽝 찍었다 더라. 그리고 두 번째는…”
은희도 그 오빠의 그 동생이었다. 성격 급한 건 완전히 빼다 박았다. 이미 던진 질문의 답부터 먼저 받고 다음 질문을 해도 될 상황인데도 한가지 질문에 대한 답만 얻고 말을 잘라 버린다. 은희는 자기 오빠처럼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도 한 마리도 잡을 수 있는데 실수를 저지르지만, 다행인 것은 영철이가 은희 오빠를 오래도록 만나면서 이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자기 오빠에게 이랬다면 방금한 질문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달려들다가 한 마리는 놓치는 거나 마찬가지인 대응이었다.
“그건 담합이잖아. 해숙이 신랑의 단가도 받고 결정할 일이 아니었어?”
이 말 또한 자기 오빠가 들었다면 은희는 아마 호적에서 파 내졌을 것이다라고 영철은 생각하고 있다. 그 보다 더 약한 처벌은
‘야! 이 쇠 대가리야! 내가 벌써 몇 번을 얘기했어? 말을 꺼내 전에, 내뱉기 전에 수십 번은 생각하라고’
이 말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난 번에 골프장에서 그 놈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를 때 이 말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라는 짐작이 갔다. 만약이 은희가 동생이었다면 분명히 지금 이 말을 은희는 들을 것이다. 부부라서 차마 그 말을 못하고 영철은 참으며 너그러운 척 한다.
“이 사람아! 해숙이 신랑이 나타나기 전에 당신을 좋아했던 그 놈에게 당신 오빠가 부탁을 했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그래서 거기엔 담합이란 말도 끼워 넣을 순 없지. 그리고 당신 오빠가 무슨 힘이 있어? 아무 관련이 없고 단지 그 놈과 대학 동기라는 사실밖에 내세울 게 없잖아. 그 내세울 것도 창훈이를 위해 벌써 써 먹었고. 그러니 더 이상 그 말은 끝! 하자. 하지마!”
은희도 그 말에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 미간이 경직돼 있는 걸 봐서는 또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이를 눈치챈 영철이 묻는다.
“또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
“그일 벌어진 지 꽤 오래됐는데 아직도 해결이 안 됐다니 조금 이상하네요”
“뭐 마실 거 없나? 한잔 마시고 얘기 해야겠다”
은희가 물을 가지려 간 사이 얼른 창훈에게 전화를 건다. 그 후의 진행에 대해 사실 영철이도 가끔 궁금하던 차였다.
“잘 지내지! 그래!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다. 고마워. 알아서 가게 내버려 둔단 말이지”
통화를 하는 사이 은희가 음료수를 들고 영철이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알아서 가게’란 말을 듣고 약간은 실망이나 좌절하는 표정을 지으며 음료수를 옆에 내려 놓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
“그래! 그래! 당연하지. 아니! 그렇게 하면 안돼! 겨울하고는 달라. 그럼 천지 차이지. 겨울에 요금이 왜 싸겠어? 날씨가 추우니 당연히 얼지. 그럼! 그럼! 지금이 비싼 이유가 그거 아니겠어! 그래! 그럼! 자식! 연구 많이 했네. 허허허! 그래! 그 방법이 좋지. 그래 선택 잘 했다. 나도 그렇게 해서 덕을 봤으니 내만 믿고 한번 해봐! 당연하지. 손해 보면 내가 한잔 살게. 그래! 수고! 고마워! ”
은희가 얼굴이 잠시 어두워진다. ‘비싸’ 진다는 말은 해숙이 신랑이 사기 당해 저장해 둔 제품의 가격이 비싸진다는 말이다. 아주 조금이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그 쪽 세계에 대해 해숙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 이해가 가면서 바로 걱정이 되었다. 비싸진다는 말은 살 사람이 적어진다는 말과도 같다. 가격이 떨어져야 해숙이 신랑이 가격을 더 낮춰 저장된 제품을 팔 수 있다 말을 해숙에게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 신랑은 해숙에게 유치한 앙금이 있는 오빠도 아니면서 그 집안의 피해에 대해 고소하다는 듯이 웃고 난리다.
“여보! 그렇게 고소해? 사람들이 왜 그래? 치사하게”
피는 못 속인다고 은희가 발끈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는지 그저 놀란 눈으로만 멀뚱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번 더 이해를 도와준다.
“아니! 해숙이 집이 망한 게 그렇게 좋아? 아예 광고를 내지. 광고를.. 에이 비겁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리며 투덜거리는 걸 한참 동안 멍하게 쳐다 보다가 ‘푸’ 소리와 함께 방금 마신 입 속에 남아 있던 물 찌꺼기가 은희 얼굴로 튀겼다.
“에이! 더러워! 하는 짓들도 더럽더니… 이게 뭐야…..”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닦고 있는 은희에게는 아랑곳하지 않고 배를 잡고 웃기만 한다. 아예 양 팔다리를 짝 벌려 벌렁 누워 웃다가 배가 아픈지 한 손으로 배를 만지기도 했다. 은희는 어이도 없었고 기분이 상했다. 어린 애도 아니고, 해숙이가 아닌 다른 사람, 새 언니가 있는데도, 지금에 와서, 정말 치졸했다. 만약에, 새 언니가, 내가, 어릴 때 짝사랑한 가정에 이런 식의 복수를 한다면, 이런 사실이 들통 난다면, 과연 오빠나 이 사람, 신랑이 가만히 있을까?
벌컥 겁이 났다. 그 무서운 놈이 한 핏줄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해숙이 때문에 자신은 보쌈에 싸여져 있었고, 그렇게 이 놈! 신랑에게 전달됐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억울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거두절미하고 단 하나! 남자에 대해서, 다른 남자에 대해서 눈을 돌릴 권한을 상실했던 같았다. 그때는 옆에 있는 이 사람도 오빠였다.
두 오빠의 감시 속에 맹인처럼 지내야 했다. 무서운 놈들. 그리고 또 그 뒤에 줄지어 있는 패거리들. 만약에 여동생이 줄을 이었다면 모두 한 집안이 되었다는 끔찍스런 상상이 떠오르자마자 몸서리가 쳐 졌다.
“어~~ 휴! 징그러”
그리고 바로 뒤에 또 해숙이가 떠올랐다. 이런 어린 애 같은 치졸하고 사소한 복수로 해숙이 가정에서 본 피해를 생각하면, 앞으로 해숙을 어떻게 볼까 걱정도 되었다. 자기들은 동네 친구들이 많아서 여기 저기 골라서 만나면 되지만 은희는 아니었다.
보쌈에 싸인 바람에 친구가 별로 없다. 또 치를 떠는 데 신랑이 더 이상 웃을 기력이 없는지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앉아, 다시 한번 빤히, 짓궂게, 장난으로 가득한 눈으로 쳐다 본다. 이렇게 징그럽고 불쾌한 적은 어릴 때 이 사람을 처음 본 후 처음이었다. 고개를 획 돌려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