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글거리는 속내를 드러낼 수 없어 고개를 돌려야만 했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짓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는, 벌써 가방을 싸서, 울러 매고, 혼자 잔디 밖으로 뛰쳐나가버렸을 것이다. 그런 심정도 모르고 오히려 짜증을 내고 있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이글거리는 가슴. 수리도 한 성깔 하는 놈이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면 세상에 법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법은 누군가가 이 놈의 염장을 파헤치고 난 후에 벌어지는 사태 때문에,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게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게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동생 친구 집 도와주자는 얘긴데!”
지금 영철이가 말하는 태도나 어투는 설득이나 부탁을 하는 게 절대로 아니라 거의 강요수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실수를 한다. 자신이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과 같이 말도 그렀다.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지만 상대는 불쾌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신중하게 생각을 하고 난 뒤에 입을 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상치도 못한 트집에 피곤해질 수 밖에 없다.
수리가 어떤 지레 짐작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인상을 잔뜩 찌푸려 불쾌해 한다. 그리고는 도와주지 않는 이유를 조목조목 얘기를 하며 두 번 다시 이 얘기가 나오지 않게 입을 아예 틀어막아버리려고 한다.
“아니! 그 집 돈 많다며? 도움을 받아도 개뿔도 없는 내 같은 놈이 받아야지. 하여튼 가진 거 많은 놈들이 욕심이 더 많아. 자네도 잘 알잖아. 그 일은 창훈이가 벌써 계약을 한 일이잖아. 그걸 뒤집어 되돌려 바꾸란 말이야? 내가 무슨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 회사 직원도 아니고 벌써 부탁을 한 건데 어떻게 또 바꾸자고 해? 너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원래 가진 것 많은 놈들이 더 가지려고 남의 떡에 눈을 돌린다잖아. 이야기 들어보니 그 일은 그 새끼가 전문으로 하던 일도 아니던데. 건설하던 놈이 건설이나 할 것이지 그 쪽엔 왜 눈을 돌려. 전문 지식도 없는 놈이. 그냥 놔둬! 뒤지던 말던 다 자기가 저지른 일이니 자기가 책임져야지”
똥 씹은 인상으로 미간을 잔뜩 찡그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영철이 부탁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고 싶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줬다.
더 이상의 구차한 말이 또 나올 까 염려됐는지, 아직 나오지도 않은 말을 미리 피하듯이 자기 공 쪽으로 쫓아 달려 가버린다.
영철이도 거의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떨떠름한 얼굴로 뚜벅뚜벅 걷다가,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얼른 공을 치고는 커트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 수리에게 쫓아온다. .
“한번 도와줘라. 그래도 네 동생 친구 집안 일이잖아”
“야! 임마! 그럼 네가 도와 줘! 네 마누라 친구 집안 일이잖아. 내가 출가외인인 동생을 왜 도와? 너도 있는데. 웃기는 소리하지마! 그렇게 도와주고 싶으면 네가 직접 얘기해. 영식이하고 너도 친하잖아”
그 순간에 영철이 코 속에서 뜨끈뜨끈한 바람이 새 나왔다. 약간은 감긴 눈도 보였다. 눈을 지긋이 감고 순간적으로 불뚝 치솟은 어떤 감정을 삭히고 있거나 아니면 옛일을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이 놈 영철이가 영식을 못마땅해하고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깨내자면 거의 25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 이야기에 이해를 필요로 하기 위해서는 거기서 또 50년을 더 넘게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어릴 때 영철은 수리 집을 제 집 드나들듯이 드나들었다. 수리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은희. 마은희다.
수리나 그의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이 놈! 영철이가 은희 기저귀도 갈아주었다. 은희는 태어나자마자 알몸을 고스란히 이 놈에게 노출시키고 말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계속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한 평생 그럴 것이다.
약 25년 전.
은희의 알몸이 아닌 온 몸을 평생 동안 지켜 주겠다는 놈이 나타났다. 그 놈이 영식이다.
공영식은 수리와 대학교 때 만났다. 서울이 고향인 영식은 방학이나 수업이 없는 날에는 수리를 따라 시골 마을인 수리 고향이 자주 왔다. 처음에는 수리를 따라서 왔지만 어느 날부턴가 혼자서 수리 집을 영철과 마찬가지로 제 집처럼 드나들며 머물렀다.
수리 동생 은희 때문임이 분명했지만 이 놈 때문에 모른 척 했고, 어쨌던 은희와 영철은 부부가 되었다. 은희가 지조가 있어서 영철을 택했는지 아니면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이미 노출돼버린 자신의 알몸 때문인지는 그들 부부만 안다.
그래서 그런지 영철은 수리를 통해 알게 된 영식을 은연중에 꺼려하는 눈치를 수리에게 들키곤 했다.
그럴 땐 가끔 수리는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했다. 부부의 연은 맺지 못했지만 영철과 영식의 자식들에게 연을 맺어주면 어떨까? 여동생의 아들 딸만 아니면 이 놈! 영철의 자녀가 탐이 많이 나는 아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식에게는 너희 놈들이 못한 인연을 자식들에게 맺어주면 어떨까?
감히 이런 제안을 하지 못한다. 장인 장모가 되기 전에 여동생이 바람날까 염려돼 그 일에 대해서만큼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분명한 건 영철은 영식에게 뭔가의 거북스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허긴, 비록 결혼 전이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자기 아내가 된 사람의 주변에서 기웃거렸던 놈을 경계심 없이 마음 편히 대할 위인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자기는 지키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수리는 이미 해숙이란 사람 때문에 지켜 줄 사람의 근처에 얼씬거릴 기회조차 강탈 당했다.
설상, 정말로, 그 여자 친구가 어떤 남자와 키스를 했다손 치더라도 본인, 수리만 모르면 된다. 불타는 청춘에, 지금 같이 사는 아내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단지 모르기 때문에 단란한 가정이 이어가고 있다. 만약에 수리가 좋아했던 그 친구도 수리를 좋아해서 결혼을 했다고 치자. 과연 수리가 키스한 사실을 들었으면서도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살 수 있을까?
그 나이 때 그 말은 지금 이 나이에 내 마누라가 어떤 남자와 불타는 밤을 보냈다는 말보다 더한 벌건 백주 대낮에 장소야 어디건 상관없고, 발가벗고 부둥켜 안고 뜨겁게 정사를 치렀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 말은 듣고도 아무렇게 않게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남편이 있다면 엉거주춤 이라도 좋으니 한 손이라도 들고 나오라고 하고 싶다. 그때 수리는 거의 미쳤다. 좋아한다고 말 한마디 할 기회를 강탈당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