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저 이 돈 천 만원은 못 받겠습니다. 없던 일로 해주십시오. 계좌로는 못 보내드리고 오늘 찾아 뵙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임정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말도 그렇지만 어제 술값도 둘째치고, 고동우에 건넨 돈은 천 만원이 아니고 분명히 이천 만원이었다. 확인을 해야 했다. 곧바로 김성은을 찾아 가 이유를 물었지만 아무런 이유도 변명도 듣지 못하고 돈만 돌려 받고는 다시는 찾아 오지 마라는, 마치 거지 쫓겨나듯이 밀쳐져 나오는 모욕까지 당했다.
고동우는 임정훈과 달리 의기양양하게 본사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예! 회장님! 제가 저희 재고를 깨끗이 해결했습니다”
“오! 그래! 대단해. 우리 고 부장! 오늘부터 부장일세. 허허허! 그런데 그 임사장이라는 사람이 자본이 많은 모양이야. 10억은 입금 되었더구먼. 그럼 잔액은 언제 받는가?”
백발의 회장이 흡족해하며 고동우를 쳐다보며 묻는다.
“오늘 오후쯤에 결과가 나옵니다. 어제 임사장이 납품할 회사 담당자를 만났습니다”
“그래! 그 임사장에게 피해가 없도록 잘 처리해주게. 고생했어”
“예! 철저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 회사에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고동우는 오래 전부터 자기 처남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 즉 자기 회사의 제품을 빼돌려 팔았다. 미리 준비한 처남 이름으로 된 자기 회사의 사업자등록증과 계약서를 회장에게 보여 주었다. 자기가 직접 구매하기로 한 제품에 대해서는 그 동안 거래하던 회사들로부터 자금을 요청해 둔 상태였다. 이 회사들에는 임정훈과 달리 더 낮은 금액으로 사서 팔 수 있다고 말을 해 둔 상태였고 이 회사들은 이 사람과 그 동안 이렇게 거래를 해 왔기 때문에 이 사람을 철저히 믿고 있어서 고동우는 자신 있게 보고를 했다.
“여기는 자본금이 단단한가?”
“예! 작지만 단단합니다. 웬만한 상사 출신들이 영업을 해서 백 톤 정도씩 소량으로 잘 팔고 다닙니다. 이 제품을 조금씩 나눠 팔면 훨씬 이윤이 많이 남습니다”
“좋아! 고부장! 고생했어”
회장에게 보고를 하고 회장실을 나와서 휴대폰을 켜고 문자를 보고는 바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선 입금한 전액을 환불해달라는 임정훈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서둘러 임정훈에게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니! 사장님! 갑자기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방금 회장님에게 보고하고 나오던 참인데. 계약을 그렇게 쉽게 깨면 저는 뭐가 됩니까?”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고성을 내질렀고 그 소리는 고스란히 회장 귀에 들어갔다. 전 직원이 고동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뭐가 되긴! 이건 처음부터 사기잖아. 선 입금한 10억과 어제 준 리베이트와 술 값 전부 되돌려 주세요. 좋게 말할 때”
그리고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당혹스럽고 황당한 표정으로 멍하게 서 있는데 회장실에서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뭐가 잘못됐어?”
너무 삽시간에 너무나 큰일이 벌어져 정신을 가다듬지 못하고 회장 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임사장에 돌려 줄 돈은 회장에게 이실직고 하면 되지만 처남 이름으로 낸 회사에서 판 소규모의 물량에 대해서는 대책이 서지 않았다.
대부분 영세 회사라서 선 결제가 하나도 없고 결제도 3개월 이후였다.
“아! 아닙니다. 아무 일 아닙니다”
자신의 꾀에 휘말려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회장이 그런 고동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회장실로 들어갔고 조금 있다가 비서를 부르더니 철저한 감사를 지시했다. 그리고는 고동우를 불렀다.
“자네 말이야! 이 나라가 중국이나 미국처럼 땅덩이가 넓은 줄 알았어? 이 나라는 그렇게 넓은 나라가 아냐. 그리고 내가 얘기했지. 전쟁터에서 내 혼자 남쪽으로 내려와 어떤 고생을 했는지 수도 없이 얘기했어. 내 인맥은 자네들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보다 더 많아”
말을 잠시 멈추고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가소롭고 한심스럽게 쳐다 본다.
“항상 염두 해두게. 누군가는 자네를 항상 쳐다 보고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 나가 봐”
그날 이후 감사 기간 동안 외근이 일체 금지되었고 그 동안 저지른 비리가 낱낱이 파헤쳐지고 난 뒤에 해고되었지만, 이 회사는 임정훈과는 문제가 된 10억은 아직 되돌려주지 않았다.
저장 창고에 저장돼 있는 화물의 주인도 계약서대로 당분간 임정훈의 것이었다. 계약서는 화물의 일부 금액을 지급하는 그날 부로 화물은 임정훈의 소유였다. 제품의 저장 비용인 보세창고에 임대 요금을 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애간장은 타 들어 갔다. 거기다가 고동우는 술값은 물론이고 김성은에게 주기로 한 이천 만원 중 떼먹은 천만 원도 되돌려 주지 않았다.
그 사이 고동우가 다니던 회사를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능구렁이 같은 회장은 단 한번도 만나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별천지 세상이었다. 겨우 그들에게 들은 말이라고는 자기들은 전혀 관련이 없는, 오로지 고동우와 본인인 임정훈만이 해결할 문제라고 했다.
마냥 손만 놓고 있을 수 없어서 계속 공영식, 김성은, 회장을 찾아 갔지만 그때마다 문전박대를 당하다가 아예 출입 정지를 당하고 말았다. 겨우 찾아낸 고동우는 그 회사에서 감사한 결과에 따라 공금횡령으로 이미 고발되었고, 그 고발이 소문이 나 또 다른 피해 회사들에게 고발을 당해 이미 구속된 상태였다. 그래서 구치소에 찾아가니 적반하장으로 술값을 돌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책임은 임종훈의 잘못된 인생으로까지 거들먹거렸다. 건설 현장에서는 단 한번도, 상대가 아무리 불리해도, 바로 눈앞에서 학력 위조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이 놈은 달랐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라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감추고 싶었던 과거사를 낱낱이 조사해, 파헤쳐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더 이상 빠져 나갈 구멍이 없으니,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만천하에 폭로하듯이 바로 눈 앞에서 퍼부어 댔다.
학력 위조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그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곧 분노했다. 자신에 대해 그렇게 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자신을 지금까지 희롱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때는 재산도 많고 학력도 좋다고 부러워했고 하늘 끝까지, 화려한 꿈 속의 주인공인양 자신을 추켜세워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