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관이 환이 누워있는 침전으로 들어가 환의 용안을 보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무슨 지독한 꿈을 꾸는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괴로워하고 있다.
“꿈에서조차 전하의 세상은 그리도 괴로우신 겁니까.”
인관이 소매에서 수건을 꺼내 환의 이마를 닦아준다.
환이 보위에 오를 때부터 늘 그 옆에서 함께 했던 인관이기에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환은 아들이나 진배없었다.
감히 임금을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하는 것이 큰 불충인 것을 알기에 늘 마음으로만 하였다.
그때 환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네? 전하 무어라 하셨습니까?”
인관이 환의 말을 들으려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댄다.
“청...연..”
“청연이요?”
“강화도에 청연을 은밀히 찾아오거라..어명이다.”
“네 알겠습니다. 소신 분부 받잡겠나이다. 하오니 어서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인관이 환의 명을 듣고 있는 동안 궁녀가 어의영감 김광철을 데리고 들어왔다.
“또 쓰러지셨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며칠 전 갑자기 속이 매스껍다 힘들어하시더니 피를 토하시고는 이리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십니다.”
“탕약은? 탕약은 드셨는가?”
“저번에 지어주고 가신 탕약을 조금 드시긴 했는데 다 게우셨습니다.”
.
어의가 환에게 다가가 진맥을 보았다. 진맥을 보는 광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대비마마께 알리는 것이 좋을 듯하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감.”
“지난번보다 맥박이 더 약해졌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언제까지 숨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조금만 더 포기하지 말고 시료를 해주시지요.”
인관이 간곡하게 부탁한다. 광철이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미련한 사람아. 자네도 얼른 살길을 찾아야 할 것이 아냐. 지금 전하께서는 마음의 병이 깊어 속이 다 문드러지셨네. 탕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병환이 아냐.”
“전하께서 지금보다 더 춘추 미령하실 때 천연두도 이겨내신 적 있습니다. 그만큼 강한 분이에요. 이번에도 반드시 일어나실 거예요.”
광철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휴.탕약은 내 다른 것으로 다시 다려놓겠네 드시기 힘들어도 꼭 다 드셔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네 알겠습니다. 영감. 그리고 이번에도...”
인관이 말끝을 흐린다. 하지만 광철은 알았다는 듯 인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한다.
“매번 하는 부탁이 아닌가. 대왕대비마마와 영상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해달라는 것이잖아. 하지만 자네가 이리 숨긴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저는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한 전하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마마께 사실대로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떤가.”
“어떤 도움이요. 주상의 모친이신 대비 마마가 잠시 고뿔에 걸려 몸이 좋지 않자 요양이 필요할 것이라며 이천 행궁으로 쫓아내버리신 대왕대비이십니다. 전하의 약한 모습을 알게 되시면 또 무슨 일을 벌이실지 저는 두렵습니다.”
광철이 화들짝 놀라며 검지를 입술로 가져간다.
“쉿! 말을 조심하게나. 알겠네. 내 마마께 아뢰지 않을 테니 그만하시게.”
얼마 후 시료를 끝내고 강녕전 밖으로 나온 광철을 인관이 배웅한다.
궁 밖을 나가려는 광철의 발걸음이 몹시 다급해보인다.
광철이 건춘문을 나가려 할 때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두운 밤 인적 드문 궁 어귀에 갑작스레 나타난 여인을 보고 놀랄 만도한데 광철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무언가 체념한 사람의 얼굴 같았다.
여인이 쓰개치마를 내리지 않은 채 말하였다.
“마마께서 찾아계시옵니다.”
여인의 말에 광철은 곧바로 그 여인을 따라나선다.
“대비마마 어의영감 입실이옵니다.”
상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어서 들라하시게.”
광철이 잔뜩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광철을 맞아주는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있었다.
환의 시료가 있는 날엔 하루도 빠짐없이 이렇게 광철을 불러 환의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고는 했다.
그리고는 항상 “이 늙은이가 주상에 병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알면 주상의 마음이 불편할 터이니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절대 발설하지 마세요.” 라는 걱정 아닌 걱정까지 덧붙였다.
상선 인관의 노력도 순원왕후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마마 찾아계시옵니까.”
“그래요 영감. 이 늙은이 기다리는 거 알면서 오늘도 그냥가려 했습니까?”
그녀의 특기이다. 간드러지고 온화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들은 듣는 이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한다.
“그게 아니옵고.. ”
“날이 춥습니다. 몸이나 녹이고 가세요. 드셔보세요. 얼마 전 영상대감이 청나라에서 구해준 귀한 차인데, 향이 어찌나 좋은지 내 영감이 오면 내어주려고 아꼈답니다.”
“네 마마 이리 귀한 것을..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광철이 찻잔에 절이라도 할 기세로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조심히 입으로 가져갔다. 대비의 말대로 향이 참 좋았다.
하지만 따뜻한 차를 들고 있는 광철의 마음은 더욱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는 광철을 웃으며 쳐다보던 대비가 이내 말문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주상의 시료를 하시고 고단하시겠습니다. 영감”
“아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 것을요.”
“그래 이번 달 들어 벌써 세 번째입니다. 주상의 몸이 심각한 것입니까?”
“기혈이 뭉치셔서 기혈을 다스리는 탕약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네 그건 지난번에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헌데.. 이제 그 탕약조차 잘 드시지 못하셔서 좀처럼 차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저런.. 어찌된 영문일까요?”
순원이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그녀의 손은 방금 자신이 입을 대고 마셔서 연지 자국이 남은 찻잔을 닦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의 얼굴에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한 웃음이 빙그레 피어났다.
“소생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광철은 너무도 직접적인 물음에 그만 사레가 걸려 컥컥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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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손주가 아닌가. 손주의 죽음 앞에서 어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야’
“마마.. 그것이 아니고”
“영감 난 진심으로 주상이 걱정되어 하는 말입니다. 자 어서 주상의 상태를 소상히 말씀해주세요.”
광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처음부터 대세는 기울어진 것이 아닌가..’
“구토증세가 점점 심해지시고 복통이 일어나는 횟수도 잦아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혈까지 심해져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이 사실입니다.”
“주상 나이 17살에 천연두를 앓은 적이 있습니다. 허나 그때도 금방 털고 일어나실 정도로 강녕하였는데 어찌 자꾸 이런 일이 생긴단 말입니까?”
“송구하옵니다. 마마”
“시료를 계속 하여도 차도가 없을 것 같습니까?”
“장담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럼 후사는? 후사도 생산하기 어렵겠군요.”
“현재 전하의 몸 상태로는 상당히 어렵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허나 기력을 보충하는 탕약을 올렸으니 지켜보시지요.”
“기력이요? 보충할 기력이나 있습니까. 하하하 어의영감이 있어 내 항상 듬직합니다. 부디 지금처럼 주상을 성심껏 돌봐주세요.”
“네 마마.”
“아 그리고.”
순원이 서랍장 안에서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올려놓는다.
그러더니 광철을 쳐다보고 씽긋 웃으며 보자기를 푼다.
광철은 그에 무엇인기 궁금하여 자신도 모르게 목을 길게 빼고 쳐다봤다.
보자기에 들어있던 상자를 열어 광철에게 돌려 보여준다.
그러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안에는 이제껏 그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금은보화가 잔뜩 들어있었다.
“명색이 전하의 건강을 책임지시는 분이 너무 검소하신 것 같아 이사람 마음이 많이 안 좋습니다. 좋은 집으로 이사도 하시고, 곧 영감의 여식 혼례가 있다지요? 좋은 옷도 한 벌 해주세요.”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가시는 발걸음 무거울 테니 나머지는 찬찬히 드릴게요. 앞으로 자주 봅시다! 우리?”
그녀가 광철을 향해 코를 찡긋하며 웃어보였다.
대비가 건네준 보따리를 소중히 품에 안고 나오는 광철의 표정이 어둡다.
대비의 말대로 발걸음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아냐. 이미 대세는 오래전에 기울어진 것을..오히려 대비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으니 나한테는 잘된 일이 아닌가. 전하를 해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몸 상태가 어떤지 알려드리는 것뿐이니까...’
애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하며 광철은 궁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그 탐욕스런 뒷모습을 지켜보는 인관이 있었다.
"전하. 얼마나 외로우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