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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안 -
대왕대비에게 가는 영의정 김하경의 발걸음이 무겁다.
설 내관과 청삼을 미행한 자신의 수하가 전해 준 충격적인 이야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주상이 은밀히 청연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뒤 줄곧 환과 그 심복들의 행동을 미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청연을 찾아내기라도 한다면 바로 행동에 돌입하여 청연을 죽일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 사태를 어찌 말해야 한단 말인가.. 대왕대비의 성격에 지난 일을 말끔히 처리하지 못한 과오를 아시게 되면 분명 날 버릴 것이야. 아니 버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겠지..’
끝내 김하경이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권혁 네놈을 가만 두지 않겠다. 일을 대체 어찌 처리한 것이야. 아니지 아니야. 일단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이대로 무너질 순 없어 하지만 이미 소식을 들은 놈들이 있으니 거짓을 보고할 수도 없고, 정말 미치겠구만.’
한참을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 퍼뜩 하고 떠올랐다.
원범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사실에 몹시 집중한 나머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한 가지.
“주상전하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였지..”
김하경이 혼자 중얼거리고는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대왕대비의 처소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어느새 대왕대비의 처소 앞까지는 왔지만 김하경은 쉽게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대감 오셨다고 고할까요?”
그를 이상하게 여긴 상궁이 물었다.
“잠시 기다려라. 내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네 대감.”
궁녀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물러가고 그 후로 김하경은 한참을 무언가를 생각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준비가 된 듯 궁녀에게 말했다.
“고하거라.”
그의 목소리엔 사뭇 비장함까지 감돌았다.
만인지상인 영의정 김하경을 이토록 긴장하게 하는 사람. 오직 대왕대비뿐이었다.
“마마 영의정 김하경 대감 들었사옵니다.”
“들라하시게.”
순원이 기다렸다는 듯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찾으셨나이까?”
“네 대감. 앉으세요! 앉아서 얘기하시죠.”
대왕대비 순원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하경이 무릎을 꿇고 순원 앞에 엎드렸다.
“마마 이 대역 죄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순원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김하경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죽여 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 내관과 무사 청삼을 미행하는 것에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마마께서 알아보라 명하신 데로 소상히 알아봤습니다.”
“허면 무엇입니까? 혹 주상께 꼬리를 잡히신 겁니까?”
“아니옵니다. 전하께서는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셨습니다.”
김하경이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하자 순원은 조금은 화가 난 어투로 말하였다.
“말씀을 해보세요. 알아보라는 것도 잘 되었고 덜미를 잡힌 것이 아니라면 이리 엎드려 죽여 달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마마 이응경 형제를 기억 하시는지요?”
김하경의 입에서 이응경의 이름이 나오자 순원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아이들의 이름을 어찌 입에 담으시는 겁니까?”
“소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형제 중 이원범이라는 아이가.. 아이가...”
“살아있습니까?”
김하경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순원이 다그쳤다.
“죽여주시옵소서.. 이원범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도 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차마 죽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 아이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말이 되지 않지만 죽이지 못했다니요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냔 말입니다!”
저잣거리에 돌고 있다는 이광의 영웅 설을 들은 이후 이토록 분노한 순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김하경은 그런 순원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정신을 다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설 내관과 청연이 하는 대화를 엿들은 결과 두 형제 중 한명이 살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청연을 미행하여 살아있는 아이가 원범이라는 것을 알아냈고요, 바로 죽일 수 있었으나 소신 이 나라의 안위가 걱정되어 도저히 죽이지 못하는 대역죄를 지었습니다.”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오늘 살아서 궁을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감.”
순원이 차갑게 내뱉었다.
그녀는 아무리 자신의 동생이라 할지라도 걸림돌이 된다면 언제든 가차 없이 없앨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녀를 그 자리까지 올려놓은 것이라 스스로 생각하였다.
“전하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마.”
김하경이 간사하게 순원을 올려보며 말했다. 그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를 꿰뚫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주상의 시료가 있는 날마다 어의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설마 내가 그것을 모르리라 생각했어요?”
“설 내관 말로는 이번 년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후사가 없는 전하께서 이대로 승하하신다면 이 나라 종묘사직이 흔들릴 것입니다. 하여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순원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방금 김하경의 말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고 있었다.
‘주상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원범을 죽일 수 없었다... 후사가 없는 주상..그리고 이원범...’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순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영상이십니다.”
“망극하옵니다. 마마.”
“후사 없이 가시는 우리 주상 마음에 큰 짐 하나를 덜어 줄 수 있겠습니다. 또한 내 그 두 형제들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는데 그렇게 한명이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순원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화를 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본래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김하경도 약간의 안도를 할 수 있었다,
“소신의 마음을 이리 헤아려 주시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허면 행동에 옮길까요?”
“일단 주상이 동태를 면밀히 살피세요. 그리고 그 아이는 지금 어찌 살고 있습니까?”
“강화도 근복이라는 촌부와 그의 딸이 살고 있는 초가집에 얹혀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부도 전혀 하지 못하고 그저 농민과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런 그 귀한 몸으로 어찌 그런 고된 일을 하며 살았단 말인가요. 다 이 사람의 불찰입니다. 그저 영상의 말만 듣고 죽었다 믿고 있었으니...”
순원의 말에 뼈가 있었다. 그러자 김하경이 잽싸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마마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글도 잘 모른다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하옵니다.”
김하경의 말을 들은 순원이 크게 웃었다.
“아하하 영상 참으로 어린아이같이 순진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왕이라 생각하십니까?”
“네? 주상께 후손이 없으니 차기 보위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왕이 아닙니다. 왕에 자리에 앉을 명분 있는 혈통 있는 이 씨가 필요한 것이지요.”
순원이 입 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김하경도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나가보세요.”
“네 마마 허면 소신 물러가겠습니다.”
김하경이 뒷걸음질로 방을 나가려는 순간.
“운이 좋습니다. 영상. 허나 실수를 용납하는 건 이번뿐입니다. 이 사람의 인내심을 더 이상 시험하지 마세요.”
“네 마마. 소신 뼈에 새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