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범이 강화도에서 봉식이라는 이름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궁 안의 상황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대비의 처소 김하경과 대비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고 헌종 환이 들어온다.
몸에 맞게 줄인다고 줄이긴 했지만 환에겐 아직도 너무 크기만 한 용보가 헌종의 발밑에 끌린다.
용보를 입었다 라기 보단 덮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전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뒤이어 상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따라 들어왔다가 순원왕후가 괜찮다는 눈짓을 하자 곤란
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
“정녕 할마마마의 짓입니까.”
환이 소리를 지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환은 눈물을 참기위해 온힘을 다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순원왕후가 헌종의 눈물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김하경을 내보낸다.
“주상, 어찌 옥루를 보이고 계시는 겁니까. 영의정께서는 그만 나가보세요.
주상께서 이 늙은이에게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예 마마. 허면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김하경이 고개 숙이며 그런 환을 비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환에게 인사를 하고 나간다.
환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에 앉는다.
그가 나가고 둘만 남게 되자 환이 다시 순원왕후에게 묻는다.
“정녕 이응경 형제의 죽음이 할마마마와 관련이 있는 것이옵니까? 할마마마가 하신 일입니까?”
“그 일 때문에 이리 옥루를 보이고 계신 것입니까? 우리 주상 참으로 마음이 넓습니다.”
“사실이란 말입니까?”
아직 앳된 목소리가 가시지 않은 환이었지만. 볼에서는 연신 눈물이 흘렀지만
그는 조금 더 근엄하게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하려 애썼다.
절대 할마마마 앞에서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대비가 환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환은 자신이 닦겠다는 듯 대비의 손을 밀쳐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허면 정말 그들이 산적이 아니라 할마마마의 명으로 죽은 것입니까? 정조 대왕께서도, 할바마마인 순조대왕께서도 그들의 가족만은 지키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몇 안남은 귀한 왕실의 핏줄 이였습니다.”
“이 사람은 그걸 모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주상.”
대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순조대왕께서는 주상의 할바마마 이전의 나의 지아비였습니다. 어찌 그 뜻을 내 모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뜻을 받아들여 그 형제만은 살리고자 극형이 아닌 유배를 택한 것 역시 이 사람입니다.”
“그럼 할마마마의 명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비록 제 명은 아니지만 이 사람에게 아주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지요.
그곳으로 유배를 명한 것 역시 저니까요. 하여 그들의 죽음에 반은 이 사람의 책임도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순원왕후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을 본 환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곳에서 그런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줄 알았다면 그냥 이곳에서 편하게 보내줄 것을.. 저도 마음이 좋지 않아요. 주상.”
“그게 사실이라면..송구합니다. 할마마마.”
“아닙니다. 주상 주상의 마음이 이리도 따뜻하니 이 역시 이 나라의 복입니다. 헌데 누구입니까?”
침통해하던 표정은 금세 사라지고 대비의 얼굴에는 다시 웃음기가 돌았다.
환은 누구냐는 대비의 물음에 얼음이 되었다.
“네? 무엇이 말입니까?”
“주상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 주상의 심기를 어지럽힌 간악한 것이 누구냐 물은 것입니다.”
“그..그것이 궁인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사옵니다.”
“주상, 그런 아랫것들의 이야기까지 귀를 기울여주시는 것은 좋으나 이 늙은이 서운 하려 합니다. 어찌 그런 천한 것들이 입에서 나온 얘기만으로 이리 달려와 옥루까지 보이시는 겁니까.”
“송구하옵니다.”
환이 우물쭈물 하며 말했다.
환은 이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어졌다.
“지금 주상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상의 어미입니까 아니면 이 할미입니까.”
환은 깜짝 놀랐다. 순원왕후는 이미 알고 있었다.
환에게 응경형제의 죽음에 대해 귀띔 한 것이 하여 환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바로 환의 모친 이라는 것을...
환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대비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고 환을 몰아갔다.
“주상은 역대 왕들 중 가장 어린나이에 보위에 올랐습니다. 지금 주상은 그 자리를 지켜낼 힘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 힘을 줄 수 있는 사람 역시 이 할미뿐입니다. 힘을 키운 다음에 주상의 정치를 펼쳐도 늦지 않아요. 그때 까지는 이 할미만 믿고 할미만 보고 착하게..
지금처럼 착하게 따라 오세요. 그래야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주상도, 주상의 사람들도.”
이제 환은 분노가 아닌 두려움의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 세게 입술을 물어 울음을 참아냈다. 그리고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송구합니다. 할마마마 소자가 미령하여 잘 모르고 불효를 행하였으니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세요.”
그러자 순원왕후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아닙니다. 아니에요 주상. 내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상의 마음이 이리 넓은 것은 이 나라의 복이라고.
내 주상의 귀에 그런 소문이 들어가게 한 몹쓸 상궁들을 잡아 내 엄히 가르쳐야겠습니다.”
그녀 특유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환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속엔 환에게 그 사실을 말한 간악한 것들의 소행을 덮겠다는 뜻이 담겨있었다.
“허면 소자 이미 물러 갈 테니 쉬시지요.”
“네 주상 조심히 가세요. 다음번엔 올 땐 꼭 기별을 주세요. 허면 내가 주상이 좋아하는 다과라도 마련 해 놓을 테니.”
환이 나가고 순원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신다.
“한 상궁 밖에 있느냐.”
이윽고 순원왕후가 아까 환을 뒤따라온 상궁을 부른다.
“네 마마 찾아계시옵니까.”
짝-
상궁이 들어오자 상궁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어찌 주상께서 왔다고 고하지 않은 것이고 주상께서 직접 문을 열고 이방에 들어오게 하
는 것이냐. “
“그..그것이”
짝-
다시 대비의 손이 상궁의 뺨을 때렸다.
“다시 한 번 오늘과 같은 일이 있을 시에는 네년의 목숨 줄을 끊어놓을 것이야.”
밖으로 나온 환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애쓴다.
자신의 섣부른 행동이 어머니를 위험하게 할 뻔 했다는 생각에 환은 두려움을 쉽게 씻어낼 수 없었다.
내리는 달빛 아래 환은 계속 두 손을 비비고 두 귀를 비비며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환이 울거나 무서운 곳을 보면 손을 비벼주고 귀를 따뜻하게 해주던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버릇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두려워하던 환의 떨림이 점차 멈추었다.
‘이 궁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힘을 길러야 한다.
힘없고 어린 나의 편이 되어줄 사람은 이 궁에 단 한명도 없을 것이야.
그때까진 할마마마의 그늘에서 힘을 키워야 한다..내 반드시 할마마마로부터 이 나라를 되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