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청연이 멈칫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하의 춘추 아직 미령하신데 위독이라니?”
“그래서 더욱 어르신의 힘을 필요로 하십니다.”
“자세히 좀 말해보시게. 얼마나, 아니 왜 위독하신 거야?”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신 전하가 아니셨습니까. 몇 개월 전부터 배앓이를 하시더니 점점 통증과 발병 횟수가 잦아졌습니다. 증세가 심해지시고 요즘은 각혈까지 하십니다. 어의 말로는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 하십니다.”
“이런 변고가 있나..올해라니 그 꽃다운 나이 어찌 이 늙은이보다 먼저 승하하신다는 말이야..원인은 무엇이라 하는가?”
“어의도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럼 시료는?”
“통증을 덜어드리는 약을 올리는 것 외엔 어의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합니다.. 어르신 그 마음에 죄책감을 덜어낼 기회입니다. 전하의 곁으로 오셔 전하의 마지막을 함께해주세요”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던 청연의 표정이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듣자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가 어려 있는 듯하였다.
“죄책감이라니, 전하가 그리 된 것은 애통한 일이나 그것이 어찌 있지도 않은 죄책감을 덜어낼 기회라 하는지 모르겠네.”
“정녕 없으십니까? 순조대왕의 유지를 들은 가장 가까이서 모신 선생께서 전하를 배신하려 했던 것에 대해 조금의 죄책감도 없으신 것입니까?”
“어린 주상을 지켜 달라 하셨지.”
“그리고 선생은 이광과 작당하여 그 어린 전하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려 하셨지요.”
청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누가 그랬단 말인가 내가? 아님 이광? 물론 반란에 성공했다면 이광이 잠시 보위에 올랐겠지. 허나 지금의 주상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 보위를 다시 물려줄 계획이었어. 환이 장성할 테까지 외척을 처단하고 광의 품에서 환을 지키려 했던 거라고. 그 결과 이광과 이원경은 저잣거리에서 모두의 구경거리가 되어 능지처참 당했고 그의 가족들은 몰살당했어. 나? 난 이곳에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생 은둔하며 죽어가고 있어. 이런 내게 전하에 대한 죄책감을 씻을 기회를 주겠다고?”
인관은 이처럼 청연이 분노와 흥분으로 말을 이어나가는 것은 처음 보았다.
청연에게 들은 얘기는 인관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동안 자신이 이광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 모든 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청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전하 곁에서 내 죄책감을 덜으라는 말은 마시게. 죄책감을 덜어내야 할 것은 바로 전하가 아닌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대왕대비가 무서워 묵인했던 전하란 말이야!”
인관의 마음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했다.
“전하가 알고있었다고요...?”
“이광이 어린 전하를 찾아간 그날 모든 계획을 말씀드렸네.”
인관이 아득해진 정신을 붙잡으려 노력하였다.
“전하께서는 그때 너무 어렸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선생과 이광을 절대 버리려 한게 아니에요.”
“이제와 그런걸 따지려는 게 아니네. 그때 내가 나섰다면 전하는 다시 위험해졌을 거야. 이광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의 목숨까지 받쳐 지켜낸 전하의 목숨이네. 나 역시 지킬 수밖에..하지만 두 번 배신당하고 싶지는 않아.”
인관의 눈시울과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애써 눈물을 지워보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
“네 맞아요. 어르신은 전하께 추오의 죄책감도 없으신 게 맞네요. 오히려 죄책감은 전하의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오랜 세월 속이 다 문드러지실 정도로 속병이 나신거에요. 상선이라는 자가 그것도 모르고..”
“어서 돌아가 전하의 곁을 지키시게.”
“그럼 마지막으로 전하의 서찰 이것만 읽어보십시오. 이것을 읽으신 후에도 선생의 마음에 변화가 없다면 그땐 미련 없이 오라 하셨습니다.”
인관이 가슴속에서 고이 접힌 종이를 꺼낸다. 청연이 그것을 한참 쳐다보고만 있다가 마지못해 받아든다. 그리고 서찰을 펴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안함과 그리움을 전하려 내 이리 염치없이 서찰을 보낸다네.
역대 가장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대의 어린 왕은 살아온 인생만큼이나 명줄도 박복한 것 같아.
이광 그분께서 날 찾아와 계획을 말씀해주시고 행여 실패하여 모든 길이 막혔을 때 찾아가보라고 이 주소를 남겼다네.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가시고 난 절대 이곳을 찾지 않겠다 다짐했어.
그분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청연 그대에게는 자유를 주고 싶었어.
허나 들어주시게. 난 지금 벼랑 끝에 서있다네.
나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어 두렵고, 나의 사후에 이 나라가 어떻게 변할지 그럼 내 무슨 낯으로 선조들을 보고 이광.. 그분을 볼지 두렵다네.
그래서 자네가 내게로 와서 힘이 되어주게. 자네가 조정으로 올라와 흩어진 서인 세력을 규합한다면 남인의 힘을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어. 그럼 자연스레 외척의 힘이 축소 될 것이라 생각하네.
염치와 수치심을 모두 접어두고 부탁하네. 염치없는 나의 부탁이 싫다면 끝까지 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다 돌아가신 이광 그분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내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말아주시게]
긴 서찰을 다 읽은 청연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찌.. 조선의 왕권이 이리도 무너졌는가. 강화도 촌구석에 숨어사는 백발의 노인에게까지 손을 내미는 전하라니...’
청연은 서찰에 얼굴을 묻었다. 인관에게도 청연에게도 그리고 궁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환에게도 이 밤은 참으로 길었다.
**
오랜 침묵을 깨고 인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동이 트기 전에 길을 떠나야 합니다. 어르신 답을 주시지요.”
“내가 간다해도 전하에겐 큰 문제점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전하에게 후사가 없다는 것이야. 지금 내가 가서 서인들의 세력을 규합하고 남인을 견제하여 외척의 세력을 약화시킨다 쳐도 전하께서 후사 없이 승하 하시게 되면 그 권력의 공백은 다시 안동김씨 에게 돌아갈 것이야.”
청연의 말이 맞았다.
인관 역시 그 사실을 가장 걱정하고 있었다.
저리 편찮으신 몸으로 지켜낸 나라가 다시 안동김씨의 손에 놀아나게 된다면 승하하신 뒤에도 아니 모든 승하하신 선조대왕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또한 그리되면 환이 너무도 불쌍하지 않은가.
“허나 일단은 다른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서워 저들의 만행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전하의 뒤를 이을 후손이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네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요. 말해 뭐하겠습니까.”
인관이 답답하다는 듯 대답하자 청연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응경형제의 일을 기억하는가?”
“유배 중에 산 도적을 만나 살해당한 이광의 자식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맞아.”
“전하께서 그 두 형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어린나이에 대왕대배의 처소에 쳐들어가 난동을 부린 일이 있습니다. 헌데 그 일은 갑자기 왜 꺼내시는 겁니까?”
“그래 바로 그 자식들. 만일 그 자식중 한명이 필사적으로 도망쳐 살아있다면? 얘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인관이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조선에 새로운 희망이 생기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전...”
인관이 청연의 표정을 보고 말을 멈춘다.
“살아있습니까?”
청연은 대답 대신 다시 작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입니까? 정녕 그 형제들이 살아있습니까?”
인관이 되묻자 청연이 입을 다물라는 표시로 검지 손가락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쉿 일을 그르치지 마시게. 돌아가 전하의 서찰을 잘 보았고 내미신 손에 기꺼이 이 늙은이의 목숨을 받치겠다고 전하시게. 난 여기서 남은 일을 하고 올라가겠네.”
청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인관은 청연의 거친 손을 꼭 잡았다.
“정말이십니까? 전하 곁으로 와주시는 것입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잘 생각 하셨어요.”
청연이 자신의 손을 잡은 인관의 손을 걱정하지 말라는 듯 툭툭 쳤다.
“어서 돌아가서 전하의 곁을 지키시게. 그리고 열흘 후 다시 오시게. 그때 오면 내 무언가 전하와 조선에 다른 희망을 전해줄 수 도 있을 것 같네.”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관이 청연에게 연신 머리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간다.
“청삼아 어서 가자.”
“네 어르신.”
인관과 청삼이 청연에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인사를 한 뒤 길을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어둠은 깊어졌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졌다.
그들의 발걸음을 희미한 달빛이 비춰주었다. 멀어지는
인관과 청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있던 청연이 혼잣말을 했다.
“조선 하늘에 다시 달이 뜨는 날이 오겠구나..원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