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눈앞의 적을 향해 검을 찔러가던 사쿠라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녀가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처음보는 소년이 서 있었던 것이다. 사쿠라는 서둘러 검을 거두어들이려 해보지만 이미 피를 맛본 검은 사쿠라의 의지를 거부하며 으르렁거린다.
인간의 죄악을 머금은 검이 소년의 심장을 노린다.
“안돼!”
오로지 대상을 죽이기 위한 필사의 일격, 소년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멈춰라”
소년의 한마디에 미친 듯이 날뛰던 검이 제자리에 멈춰 선다. 검은 마치 숨으려는 듯이 사쿠라의 몸속으로 돌아간다.
뒤편에서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김지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쿠라의 앞에 있던 소녀는 어느 순간 갑자기 서지훈의 곁으로 이동했고 소녀가 있었던 자리에는 처음보는 소년이 서있었다. 마치 기억이 끊긴 듯한 느낌, 하지만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소년의 존재였다.
“크윽…”
정신을 잃었던 서지훈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뜬다. 자신의 앞에 서있는 한 소녀, 처음보는 소녀의 품에 안겨 있는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서지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현아!! 큭..!”
서지훈은 아들을 되찾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몸은 그리 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라? 그릇이 망가졌구나. 으음..? 아닌가?”
라이시나는 한눈에 서지훈의 상태를 파악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그녀에게 서지훈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 라이시나는 흥미롭다는 듯이 서지훈의 몸을 훑어본다.
서지훈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소년을 바라본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에르스…!”
인간의 입에서 에르스의 이름이 나오자 라이시나의 표정이 변한다. 라이시나는 고개를 돌려 질책하듯 에르스를 노려보았다. 에르스의 표정은 깊은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두 제 탓입니다… 그는 저로 인해 사리지지 않을 큰 상처를 입었죠”
“너…”
“조금 아플 겁니다”
에르스는 조심스럽게 서지훈의 육체에 손을 얹는다. 몸 내부를 살피던 에르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떴다. 생명의 근원에 해당하는 육체의 그릇은 차원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복구나 창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서지훈의 그릇에는 이미 누군가가 손을 쓴 흔적이 있었다. 분명 엉성하지만 새로운 그릇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놀란 듯 주변을 살피던 에르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사쿠라의 존재를 발견하고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이 도달한 ‘탐욕’의 결정체, 그녀의 몸에 심어져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의 조각들이었다.
자신의 죄악이 만들어낸 결과를 바라보며 에르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보니 여기는… 그래.. 결국 가문을…”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 서있는 알 수 없는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 소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에르스를 처음 본 순간 느꼈던 그것과 비슷했다.
“에르스… 이제는 알아야 될 것 같다. 도대체 너희들은 누구지? 도대체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협박하듯 에르스를 노려보는 서지훈의 태도에 지켜보고 있던 라이시나가 인상을 찌푸린다. 고작 인간주제에 누구를 향해 저따위 말을 내뱉는다는 말인가, 라이시나는 주먹을 움켜쥐며 서지훈을 노려보았다. 그런 라이시나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에르스는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긴 이야기가 되겠군요”
더 이상 숨길 수만은 없는 이 세계의 진실, 에르스는 이미 준비를 마친 듯 조용히 눈을 감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황하는 것은 라이시나였다.
“에르스?! 너 진심이야?”
“괜찮습니다. 이들에게는 진실을 알아야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위해서도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좋겠죠”
“하아… 이제 진짜 막 나가는구나? 뭐 마음대로 해. 네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외부인인 내가 참견할 수는 없지”
라이시나도 딱히 에르스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인간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의문일 뿐이다. 라이시나는 안고 있던 서현을 서지훈에게 내밀었다. 서지훈은 갑작스러운 라이시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품에 안았다.
짐을 덜어낸 라이시나는 지친 듯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뭐해? 계속 서있을 거야?”
“…”
도대체 뭘 하자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라이시나의 행동에 서지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라이시나는 아무 생각도 없는 듯 오히려 자신을 노려보는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든다.
“거기 너희 둘도 이리 와서 앉아”
“무슨…!”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던 김지현과 사쿠라는 갑자기 돌변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무슨 다과회라도 열린 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쪽으로 오라니까?”
라이시나의 손이 허공을 두드린다.
“큭?!”
사쿠라는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라이시나를 발견하고 서둘러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자신의 곁에 서있는 서지훈의 모습을 본 순간 사쿠라는 움직인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능력은…”
습관적으로 주변의 공간을 인지하고 있던 서지훈은 라이시나가 사용한 능력이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힘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순간 그녀가 공간의 가문의 조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녀의 능력은 공간의 조율자들이 사용하는 능력과 비슷해 보였지만 그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했다. 공간의 조율자는 그저 공간을 다룰 수 있을 뿐이지만 그녀는 차원 그 자체에 간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오?”
라이시나는 자신의 힘을 간파한 서지훈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서지훈을 자세히 관찰하던 라이시나는 이내 뭔가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구나. 이게 에르스가 만들어냈다던 인간계의 억지력인가”
“뭐..?”
“라이시나!”
“알았어. 나중에 알아보지 뭐”
라이시나의 호기심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서지훈에게 흥미를 잃은 듯 에르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아…”
그녀의 그런 성격을 알기에 에르스는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며 라이시나를 무시한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라이시나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두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두 사람은 전투태세를 풀지 않은 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들이 누구인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나타난 건지 똑바로 설명해야 될 거야”
김지현의 검에서 위협하듯 광채가 흘러나온다.
“저건…”
에르스의 표정이 굳어간다. 김지현에게서 느껴지는 마력과는 다른 종류의 힘, 그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힘이었다. 에르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라이시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신기한 듯이 주변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하아…”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에르스와는 달리 라이시나는 타 차원으로의 이동이 자유로웠기에 김지현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한다는 것은 아마 다른 속셈이 있다는 뜻이리라, 에르스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여러분은 차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이곳 인간계나 정령계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내 물론 저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려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세계가 일그러진다.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쉽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