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눈을 뜬 서지훈은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익숙한 천장에 눈살을 찌푸렸다.
“꿈이었나.. 아니면…”
그녀가 죽임을 당하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본디 꿈이라는 것은 깨어버린다면 안개에 가려진 듯 희미해야 했지만 머릿속엔 꿈에서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었다.
서지훈은 울렁거림을 참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옷이 기분 나쁘게 살결에 달라붙어온다.
“크윽?!”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던 서지훈은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알 수 없는 정보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며 머릿속을 헤집는다. 끝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대한 정보들에 과부하가 걸려버린 뇌가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속에서 서지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참고 견디는 것뿐이었다.
꽉 깨문 입술사이로 한줄기 피가 흘러내린다. 점점 사그라지는 고통속에서 서지훈은 눈을 뜨고 세계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고통의 잔재속에서 알 수 없는 이질감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무슨…”
분명 세계는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습 그대로 그곳에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었던 세계는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서지훈은 그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변해버린 세계를 관찰해본다.
세계를 바라보던 서지훈은 결국 한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변해버린 것은 세계가 아니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알 수 없는 정보들로 인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자체가 달라져버린 것이다.
“도대체 이것들은 뭐냐고…”
정리되지 않은 정보들이 생각을 뒤덮는다. 수많은 정보들 중 서지훈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것은 ‘마력’과 ‘차원의 파편’에 대한 정보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가던 서지훈은 충격에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 차마 그것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서지훈은 그것들이 자신이 만들어낸 터무니없는 망상이라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잊지 마십시오. 당신이 보았던 미래는 지금도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서지훈은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를 잊으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밖에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서재현이 돌아온 것이리라, 서지훈은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문고리를 부여잡은 채 망설이던 서지훈은 남아있던 숨을 내뱉으며 각오를 굳힌 듯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서재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곳에 멍하니 서있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슬픈 눈동자에서는 하염없이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버린 서지훈은 이를 악문 채 발을 내디뎠다.
그제서야 서지훈의 존재를 알아챈 서재현이 서둘러 눈가를 문지른다.
“이야기 좀 하자”
“미안하다..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어.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될까”
“아니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
“지훈아.. 나 진짜 힘들어서 그래 조금만 쉬게 해줘…”
“지애에 관한 거야”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서재현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지애는.. 지애는 괜찮을 거야. 조금 씩이지만 나아지고 있다더라…”
서재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셀 수없이 해왔던 거짓말, 하지만 이번만큼은 서재현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재현아”
추궁하듯 노려보는 시선에 서재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야.. 정말 아무 일도…”
“서재현!”
서재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서지애는 치료를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공간에 격리되어 있었다. 서지훈은 서정욱과의 계약 때문에 그곳에 출입할 수 없는 상태, 과거의 일로 인해 가문에서 철저하게 고립되어버린 서지훈에게 그녀의 소식을 알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을 터였다.
“이대로 네 동생이 죽게 내버려둘 거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재현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서지훈을 바라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서재현은 순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구해줄 테니까! 그러니까 진실을 말해달라고!”
서지훈의 외침에 서재현은 무언가를 참아내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 눈가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서지훈이 어디까지 알고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대로 간다면 자신의 동생이 죽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애가… 지애가 조율 대상에 올라갔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서재현은 분한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주먹 사이로 새빨간 선혈이 고인다.
“하.. 하하…”
기어코 진실을 확인해버린 서지훈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이젠 서지훈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번 그녀의 죽음을 겪었던 탓인지 그다지 충격은 없다. 자신이 보았던 모든 것들은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서지훈은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확하게 지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냐?”
“아니.. 나도 자세한 것까지는 모르겠다. 갑작스럽게 소집된 거라 나도 결과밖에 들은 게 없어…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 아버지에게 따져봤지만 아무 말도 안 해주시더군…”
“그래… 알았다”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모두 확인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는 이미 직접 겪어보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것을 준비하는 것뿐이다.
서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젠장… 어째서 이런 일이…!”
홀로 남겨진 서재현은 빌어먹을 현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서지애를 구하겠다며 뛰쳐나갈 것이라 생각했던 서재현의 우려와는 달리 서지훈은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지훈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나름대로 서지애를 구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할 것이다.
“젠장!”
자신도 이대로 가만히 동생을 잃을 수는 없었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 서재현은 이를 악물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