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은은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속에 눈을 떴다. 방이었고 자신의 팔엔 링거바늘이 꽂혀있었다. 강릉댁이 귀은의 머리를 짚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러 물었다.
“진 기자님 괜찮으십니까.”
“네...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나요?”
“삼일이요. 삼일동안 일어나지 못하셨어요.”
“...아...혜나, 혜나는요?”
“혜나 아가씨는 잘 있어요. 지금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아...다행이다. 고맙습니다. 제가 너무 오래 누워있었죠? 참, 고양이들은...고야이들은 어떻게 됐나요?”
“어미랑 새끼 고양이들은 양욱 도련님이 잘 보살피고 있어요. 어미는 다리를 좀 절지만 그래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의사가 기적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급하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방문이 벌컥 열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양욱이 방안에 들어왔다.
“깨어났다구요?”
“예.”
‘나를 걱정했나?’
귀은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양욱은 애써 걱정어린 표정을 지우고는 진마리에게 다가왔다.
“왜 툭하면 쓰러지고 툭하면 다쳐서 사람 간을 졸이게 만드는 거야.”
“...미안해요. 몸이 좀 무리를 했나봐요.”
“이젠 픽 쓰러지거나 함부로 다치거나 하지 마. 걱정하는것도 지긋지긋하니까.”
"...알겠어요. 쓰러지기 전에 꼭 전화해서 ‘저 쓰러져도 되죠?’하고 물어보고 쓰러질게요. 그럼 됐죠?“
“...됐어.”
“하여간 그놈의...승질머리 하고는.”
“고양이들은 봤어?”
“아뇨. 빨리 보고 싶어요.”
양욱은 부리나케 1층으로 내려가서는 가슴에 어미 고양이와 새끼고양이를 안고 돌아왔다. 고양이들은 마리의 품에 안기자 그녀의 얼굴을 마구 핥았다.
“밥은요?...밥도 잘 먹어요?”
“내 밥까지 뺏길까봐 공포를 느낄 정도야. 이 염치없는 밥도둑들.”
“...푹...”
마리가 양욱의 농담에 웃음을 터트렸다. 양욱도 어느새 비식 미소를 지었다. 마리는 갑자기 손을 뻗더니 양욱의 입가에 묻은 고양이 털을 떼어주며 말했다.
“그래도 애들 털은 뽑아먹지 마세요.”
다정한 마리의 손길에 양욱은 순간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앉았다.
'심장 얘 왜 이러지?
양욱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양이들이 마리의 얼굴을 마구 핥고 있었다. 양욱은 고양이들이 부럽게 느껴지는 자신의 마음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버럭 외쳤다.
“고양이 좀 살렸다고...나를 유혹했다고 착각하지 마.”
그리고는 방을 서둘러 나가버렸다. 진마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화상...도끼병이 또 도졌나. 왜 저런대...”
양욱은 강사장과 다시 클럽에서 만났다. 강사장은 시골에 갔다 바로 올라온 듯 바지밑단이 온통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강사장은 위스키 한잔을 들이키고는 본론을 꺼냈다. 그는 그동안 안귀은의 고향에서 그녀의 뒷조사를 해왔다.
“불쌍헌 처녀입디다. 평생 허리부서지게 농사일 허며 가족 먹여살리다가 저수지서 그 변을 당했네요.”
“안귀은이란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그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안씨의 딸이랍니다. 안씨의 전처는 어디 무녀의 딸이었단 말도 있는데 확실히 아는 이는 찾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죽었다는 이도 있고 이혼하고 재가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대요.”
강사장은 다시 위스키를 잔에 따르고는 이번엔 오징어 안주를 질겅거리며 말을 이었다.
“재혼한 안씨 부부사이는 별로였던지 안씨가 논두렁 밭두렁에서 하루종일 일해도 마누라는 새참한번 해온적이 없답니다. 그냥 고양이 닭보듯 허듯 살았대요. 그런와중에 5년전 안씨가 저수지서 시신으로 발견됐구. 당시 안씨 죽음을 목격헌 것은 그 둘째 딸래미 밖엔 없다고 허더라구요. 하여튼 그 충격으로 안씨 둘째딸이 말문을 닫았고 집안 살림이랑 돈 버는 것은 모두 큰딸 차지가 됐대요. 얼마나 착하고 순하고 바지런한 처녀였던지 허투루 돈 안 쓰구 동생 병원 보낼라구 남의 집 밭일까지 가리지 않고 품을 팔면서 살았던 처녀라더구먼요.”
강사장은 그러면서 자신의 품안을 뒤적거렸다.
“아, 고등학교 동창이란 애를 한번 봤는데 마침 그 처녀 고등학교때 찍은 사진이 있다고 해서 달라고 했어요. 물론 돈도 좀 집어 줬지만요. 이건 따로 계산해 주셔야 합니다.”
강사장은 낡은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소녀들 네다섯명이 학교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강사장은 그 중 키가 크고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빼어난 미모였다.
“참 예쁘기도 했는데...아까운 처녀가 갔습디다. 여기 이 소녀가 안귀은이란 처녀랍니다.”
양욱은 강사장이 건넨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흐려져왔다. 강사장이 따라놓은 위스키잔을 물인 듯 벌컥 들이켰다. 머리가 멍하게 울려왔다.
“아니...왜 그러십니까.”
“안귀은이...혜나 언니 안귀은이 이 여자가 맞습니까? 정말 입니까?"
“이 강프로랑 일 한두번 해보시나. 틀림없습니다.”
강사장이 건넨 사진속의 여자는 자신이 상엿집에서 만났던 그 처녀였다. 드디어 가슴 한켠에 남아있던 막연한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죽은 안귀은이었다니.
“그리고 또 드릴 말씀이 있는데...”
강사장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말을 이었다.
“안귀은의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양욱은 또다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무슨...장례식까지 다 치루지 않았습니까.”
“여든 먹은 늙은 묘지기 영감이 한 말이니 뭐 신빙성은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묘지에 묻을 때 관속에 사람이 아닌 나무토막이 들어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자기는 알수 있었대요. 한평생 사람 묻는 현장만 봐와서 한눈에 척 알수 있었다나..물론 그 영감 막걸리 한사발 맥이고 들은 이야기라...더 알아는 봐야겠지만요.”
양욱은 사진속 환하게 웃고있는 귀은의 모습을 다시 보았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소름돋는 예감이 그의 온몸을 관통해왔다.
“안귀은...당신 도대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