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로 돌아와 한숨을 쉬고 있던 양혁과 진마리는 누군가에게 이 상황을 물어봐야 할지 고민했다. 양혁은 당장 아내 오희영의 정체부터 캐려고 했다.
“대무녀라니...말도 안 돼. 어떻게 쇼핑에 모피 밖에 모르는 오희영 그 여자가 대가야의 적통 무녀로 둔갑한 거야?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놀랄 일도 아니죠. 오상정이 오희영의 어머니를 며느리로 들인 이유도 적통 무녀의 핏줄이어서 겠죠. 당신 장모님 본적 있어요?”
“아니...희영이가 후계자로 낙점 된 뒤에 아내가 발도 들이지 못하게 했지. 욕심이 대단한 분이라는 소문만 들었지 나도 본적은 없어.”
“그런데 더 이상하건 왜 하필 당신을 손녀 사윗감으로 삼았을까요?”
진마리는 촉과 두뇌가 비상했다. 양혁의 집안에 어떤 비밀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재벌가인 삼진그룹이 지방의 조그마한 양조장집 아들을 사위로 들이기위해 공을 들일 이유가 없었다. 양혁은 20년도 전에 삼진그룹의 선대회장 오상정이 자신의 집을 찾아왔던 당시를 더듬어보았다.
“그때 오상정 회장님이 우리 집의 낡은 창고로 들어오셨지. 그는 무슨 기다란 상자 같은 것을 안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사색이 되었어. 나는 누룩을 넣어놓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묻더라구. ‘이곳에 다른 사람은 없냐’고. 그래서 ‘없다’고 그랬더니 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어. 그러고 보니 그때 이상한 혼잣말을 하고 돌아간 것 같아. 그때부터 뻔질나게 우리 집을 드나드셨지.”
“그때 이상한 혼잣말을 했다구요?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요?”
“응, 그때 ‘검이 울고 있다’나 뭐라나 그런 말을 한 것 같아. 나는 왜 매미도 아니고 거미를 찾나 그랬지..”
“그때 그 창고에 당신만 있었나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동생 양욱이 창고 다락에 몰래 숨어있었어. 알고보니 부모님 몰래 거기서 만화책을 보고 있더군.”
진마리는 뭔가 짚이는게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는 검의 주인을 찾고 있었던 거예요.”
“뭐?”
“내가 거기 죽은척하고 누워있을 때 오희영이 그 검을 가지고 온 것을 본적이 있어요. 그리고 무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는데...”
“그런데?”
“그 검의 주인이...”
“그 검의 주인이 뭐...빨리 말해봐!”
“그 검의 주인만이 각성한 수를 없앨 수 있댔어요.”
“...하지만 난 검의 주인이 아니야. 그런 검을 본적도 없고...감흥도 없었어.”
“당신이 아닐 수도 있어요. 거기에 또 다른 한명이 있었으니까.”
“양욱? 그럼 내 동생 양욱이가 검의 주인이란 말야?”
“...희주란 여자가 왜 당신이 아닌 양욱을 찾아갔는지 생각해봐요. 그녀는 대무녀 희영이 질투할만큼 대단한 영능력을 가진 무녀였을지 몰라요. 그래서 오상정이 늘 희영의 옆에 두었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가 희주가...내가 아니라 양욱을 찾아간 이유가...그거란 말야? 내가 검의 주인이 아니라서?”
양혁의 표정이 어두워진 걸 눈치 챈 진마리가 다시 가시돋친 말로 그를 공격했다.
“뭘 그렇게 아련한 척 표정을 지어요? 안 어울리게...하여튼 대가야 수가 어떤 여자였는지, 검이 누구의 것인지 먼저 알아봐야겠어요. 당신 아내가 그렇게 혜나란 애를 죽이려고 덤벼드니 그것부터 알아봐야죠. 그런데 누구한테 물어보죠? 1500년전 일을? 하...내 몸뚱이도 찾아야하고 비밀도 벗겨야 하고...내가 진 죄가 많나보네.”
양혁이 잠시 무언가 생각난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진마리 지그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뗐다.
“1500년 전 일을 알려줄 사람이 딱 한명 있어.”
“누구 말이에요?”
“고대 사학계의 거두이자 오상정의 동생..오덕정 교수! 아내의 작은 할아버지 되시지. 특히 대가야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 조예가 깊은 분이야. 얼마전에 지소태후와 수 어쩌고 하던 말을 들은거 같은데...일단 가보자고. ”
두 사람은 그길로 오덕정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오덕정은 마침 고문서를 해독하고 있었는데 양혁과 젊고 청초한 미녀 진마리가 함께 들어오는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오랜만이구먼. 자네가 여긴 웬일로 찾아왔나. 그리고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양혁이 잠시 당황스러워하자 진마리가 나섰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교수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진마리라고 합니다. 걱정마세요. 이 바람둥이 양혁 부회장님하고는 전혀 네버 아무 사이도 아니랍니다.”
오덕정이 속시원하게 대답하는 진마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 웃었다. 이어 두 사람을 안채로 안내했다. 오상정의 집은 거의 모든 벽면마다 책장으로 들어차 있었다. 책으로 만들어진 집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녹차를 내왔다. 장식 없이 소박한 다기가 그의 성품을 말해주고 있는 듯 싶었다.
“대가야의 2왕녀 수에 대해 알고 싶다는 건가?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죄송하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모든 것을 다 밝히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희영이도 아는가?”
“희영이의 폭주를 막으려고 이러는 겁니다. 제발 아시는 대로 알려주세요.”
“음...말 안 해도 짐작하겠네. 희영이가 그 애를 죽이려고 했나보군. 희주의 아이를 말일세. 그 애가 수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게야.”
오덕정은 천천히 눈을 감고는 1500년 전 수의 인생을 되짚었다. 수많은 고문서와 유물, 자료들을 뒤져서 오덕정은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어 그의 목소리가 서재를 감돌며 퍼져 나왔다.
“제 2왕녀 수의 어미는 신라의 첩자였네. 아리라는 무녀였다고 해. 대가야의 금이 신라를 위협할 별자리에 태어난 것을 안 신라 지소태후가 대가야 왕 소를 죽이기 위해 보낸 흑주술을 쓰는 요녀였지. 잠자리를 할 때마다 대가야 왕은 서서히 미쳐갔고 결국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 그런데 지소태후가 보낸 은밀한 서찰이 발견되고 첩의 소행임이 밝혀졌지. 그녀는 처형때까지 토굴 속에서 돼지처럼 살아가야 했어. 그녀의 뱃속엔 소의 핏줄이 잉태돼 있었거든. 흑주술로 소의 영혼을 망가트린 그 요녀가 소의 아이를 배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오덕정은 고문서를 통해 얻은 수의 굴곡진 인생을 토로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진짜 끔찍한 운명은 그때부터 였지...아이가 태어났지만 아무도 갓난아기를 거두지 않았어. 아리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고 해. 그리고 처형장으로 끌려가 사지육신이 뜯겨나가는 형벌로 죽음을 맞았지. 어미를 잃은 아기는 기적적으로 명을 이어나갔어. 토굴에 살던 장님거지 하나가 아이가 불쌍해 밥을 얻어 먹이며 키웠지만 그마저도 아이가 여섯 살에 죽고 말았지. 천민 중의 상천민이 되어 굴속에서 살아야 했어. 여섯 살에 그녀를 찾아온 이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제1왕녀 연이었지...연은 수를 동생으로 거둬줬지. 당시 아버지 소를 잃고 대가야의 왕이 된 금은 처음엔 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 모질게 아이를 외면했다고 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금은 아버지가 끔찍한 몰골로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모두 지켜봤었던 게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지. 아무리 아버지의 핏줄이라도 요녀가 낳은 동생을 인정할 수 없었나봐.”
예상치 못한 수의 과거에 양혁과 진마리는 어느새 1500년전 대가야 속으로 흠뻑 빠져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