뮴은 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는 양손으로 힘껏 문을 밀치며 성큼 걸음으로 들어갔다. 단장은 들고 있던 문서 뭉치를 내려놓으며 뮴을 반갑게 맞이했다.
“뮴, 어서 오게. 준비는 다 끝났나?”
“예. 전부 세 번씩 확인했고 차질 없이 마쳤습니다.”
단장은 조용히 뮴을 바라보다 말했다.
“라크! 엘! 로카!”
“라크! 엘! 로카!”
마주선 뮴과 단장은 주먹을 털어내듯 두 번 흔들고 어깨를 부딪쳤다. ‘라크! 엘! 로카!’는 엘로크의 인사 겸 구호였다. 그리고 앞선 동작이 동반될 때는 무언가 결의를 다지겠다는 의미가 강했다.
“이거면 될 걸세.”
단장은 뮴에게 얇고 투명한 상자에 담긴 잎사귀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자네 백색침묵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아니오. 처음 들어 봅니다.”
“아주 오래 전에 누군가 라페르로 통하는 물건을 만들었다지.”
“라페르요?”
“그러하네. 이게 바로 그것이지.”
뮴은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일이 제 발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이 칼츠니즈의 사후 세계가 아닌 라페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적잖이 놀랐다.
“이걸 사용하면 이후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그게 중요한가?”
“아닙니다.”
이제와 망설이는 모습 따위를 보여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일은 최대한 삼가야했다. 그들의 사후 세계인 비샤크로 가든, 마누스 항성계 공식 명칭 암흑의 공허라 불리는 라페르로 가든 사실 어느 쪽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임무 완수, 오로지 그것만이 목표였고 이미 내놓은 목숨이니 목적을 달성한 뒤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었다.
“이제 나가서 뱌롬을 만난 뒤 바로 출발하게.”
“예. 라크! 엘! 로카!”
“라크! 엘! 로카!”
아까와 같은 요란한 동작은 없었다. 둘은 그저 조용히 읊조리듯 나눈 구호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뮴은 들어올 때와 반대로 문을 밀치며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뱌롬이 기다리고 있었다. 뮴이 보기에 뱌롬은 신념을 갖고 행동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아 항상 어딘가 꺼림칙했다. 엘로크 내에선 무성한 소문과 함께 미치광이 과학자로 통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단장은 뱌롬을 신뢰했다.
“사용법을 알려줄 테니 따라와라롬.”
뱌롬은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며 그의 방으로 향했다. 뮴은 뱌롬의 걸음걸이에 맞춰 속도를 늦추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괴상한 걸음걸이는 뒤에서 볼 때 더 흉측했다.
“여태껏 그런 건 본적 없지롬? 아주 귀하고 희귀한 거야롬. 널 작전에 투입하기 전까지 아주 많은 실험체들이 거쳐 갔지롬.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롬. 실수는 용납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롬.”
뮴은 말할 때 마다 자기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갖다 붙이는 뱌롬의 말버릇이 싫었다. 심지어 그는 쓸데없는 말도 많았다. 그러나 그걸 듣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었다. 죽음을 반기는 자는 아무도 없을 터였지만 적어도 뱌롬의 말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은 좋았다.
“이쪽으로 와라롬.”
뱌롬은 퀴퀴한 냄새와 군데군데 연기가 자욱한 자신의 실험실이자 주거 공간으로 뮴을 들였다. 뱌롬의 실험실은 엘로크 본거지 내에서도 가면 안 되는 세 군데 방 중 하나였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많은 사람이 꺼리는 공간이란 뜻이었다. 뮴은 그 사실을 상기하며 처음이자 마지막 구경이 될 뱌롬의 실험실을 둘러봤다.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실루엣만 봐도 괴이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자, 여기 이 방호복을 입고 독극물 표시가 붙은 가방을 들고 가면 된다롬. 백색침묵은 물론 가방 안에 넣어야 겠지롬. 운반 물질과 방호복 덕분에 네 정체를 크게 신경 쓰진 않겠지만 입구에서 검색은 해야 할 거야롬. 백색침묵은 검색대에서 걸리기 딱 좋은 물건이지롬. 백색침묵을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묻지 마라롬. 모르는 편이 나을 거야롬. 하지만 넌 곧 죽을 목숨이니 살짝은 말해줘도 되겠지롬. 왜냐하면 내가 너무 떠들고 싶기 때문이다롬. 시간의 역류를 타고 다섯 개 쯤 흘러온 걸 훔쳤어롬. 반응 공식을 몰라서 실험 하느라 네 개는 써버렸지롬. 그게 마지막 남은 하나야롬. 더 이상은 알 것 없다롬. 콜랴에 도착하면 라직트 에우파자 도리알이란 군인을 찾아라롬. 그 자가 화학 연구소까지 가는 걸 도와줄 거다롬. 우리가 이미 매수해뒀지롬. 화학 연구소 3구역에 들어가면 연구소를 가동시키는 코어가 있다롬. 시페리안들은 농축된 빛의 코어에서 에너지를 뽑아 쓰지롬. 너의 임무는 그 코어를 라페르로 보내는 것이다롬. 코어가 사라지면 연구소 전체가 마비될 거야롬. 당연히 너도 코어와 같이 라페르로 사라지겠지만롬.”
뱌롬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뮴이 묻지 않은 것 까지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는 말이 많았다.
지금으로부터 마누스148 전에 위성 콜랴는 페림6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뱌롬은 여전히 옛 이름인 콜랴라고 불렀다. 뮴은 문득 뱌롬이 애국심이 투철하고 고집스런 지하 독립 운동가 같아 보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것이 단장이 뱌롬을 신뢰하는 이유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단순히 옛날 사람이라서 일지도 몰랐다.
“백색침묵을 이리 줘 봐롬. 여기 보이지롬? 절대 실행 전에 꺼내면 안 된다롬. 일단 한 번 꺼내서 만지면 활성화를 알리는 목적으로 색이 변할 거다롬. 그럼 이 부분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두고 일곱 번째에 있는 여기 이거 말이다롬. 이걸 잡고 당겨라롬. 그러면 잎사귀가 알아서 반응할 거야롬. 거기까지가 네 임무다롬.”
뱌롬이 독극물용 가방을 가지러 간 사이 뮴은 그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빛의 코어와 함께 라페르로 이동한 후에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목숨이 붙어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라페르는 대체 어떤 공간이란 말인가. 아무도 아는 것이 없고 알려지지도 않은 미지의 공간. 코어와 단 둘이 남을 수도 있고, 어쩌면 코어와 함께 사라질 수도 있다. 뮴은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이것들 가지고 썩 꺼져버려롬!”
뮴은 방호복과 가방을 겨우 끌어안고 뱌롬의 실험실이 스스로 뱉어내기라도 하듯 쫓겨 나왔다. 성대한 의식이나 예의를 갖춘 작별 인사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시 동안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미 앞서 많은 엘로크 단원들이 목숨 바쳐 시페린에 대항하다 비샤크로 향했다. 시간이 흐르며 평화 협정과 각종 협상을 통해 반시페린 단체의 수도 점점 줄어들었지만 엘로크는 건재했다. 비록 도망치고 숨어 다니는 지하 조직이었지만 단원들의 자긍심만큼은 대단했다. 뮴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뮴은 의지를 다잡으며 격납고로 들어섰다. 그는 그가 타고 갈 우주선이 무엇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현재까지 출시된 것 중 가장 최신형인 튜세린 다이휴즈. 이 정도는 타고 가주어야 시페리안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 튜세린 다이휴즈는 화물 운송에 특화된 모델이라 평생 동안 궁극의 미적 가치를 탐구하는 튜세리안들에겐 사실상 전혀 인기가 없었다. 그저 물건은 옮겨야겠고 남들에게 으스대고도 싶은 타행성인들에게나 인기가 많은 기종이었다. 애초에 튜세린 사장인 사만 무사디나르도 자행성인들을 위해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뮴은 자살 임무에 쓰고 버리기엔 너무 화려한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하며 튜세린 다이휴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