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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YYY MM 31D 00:00:00, 위치 확인 불가◀
*수신자 : 질리 타르스트두 위브
*발신자 : 조이 모트마조르 진
질리, 문제가 생겼어. 그것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일이 말이야….
우린 시페린 경찰차를 끌고 예정 시간보다 빨리 기지로 돌아왔지. 티르헬 경감이 오기 전에 기지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간단한 상황 설명을 먼저 하려고 말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사막에서 로-벨-티조가 돌아오면 경감 앞에서 모든 걸 폭로하기로 하고 대략적인 큰 틀만 알려줬어. 그 후로 벌써 1피노가 지났어. 여전히 시페린 경찰들이 겪은 사고의 진실에 대해선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야.
로-벨-티조가 아직도 안 돌아왔거든. 귀환 예정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단방향 통신기로 계속 연락을 보내 봐도 응답이 없어. 폰포플과 제노아가 검은 별 957을 몰고 수색 예상 방향으로 향한지도 어느덧 42-0.3이 지났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해. 경감이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던 로블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 혹시 티르헬 경감이 해괴한 일을 벌인 건 아닐지….
게다가 상상 밖의 일이 또 하나 일어났어. 돌아와 보니 제노아와 폰포플이 박살난 화학실 밑바닥 잔해 속에서 죽었다 깨나도 믿을 수 없는 물건을 발견했더라고.
마누스 예술-문화사 16인가 17시간에 배웠던 것 중에 ‘로젤란켈의 네아 전당 설계도’라는 거 기억나? 마누스 150101 때 네아 전당의 꼭대기 장식과 함께 자취를 감춘후로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그저 도난당했을 것으로만 추정되는 도면 말이야. 설계도 그 자체만으로도 마누스 항성계의 어떠한 예술 작품보다 더 건축학, 기하학, 미학적 가치를 지닌다는 엄청난 물건. 오죽하면 실제 건물보다 설계도가 더 유명하겠어. 고대 튜세린 행성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측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누가 만들었는지도 확실히 모르지.
흔적이 끊겨 시간의 유적 발굴단마저도 아직까지 추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잖아. 심지어 남아있는 자료도 거의 없어서 예상도를 완벽하게 재구현해 내기는커녕 짐작해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한 만큼 정교하다고 했지. 여태껏 난 그게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모형이거나 굉장히 복잡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홀로그램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 어쩌면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일 수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실제로 본 건… 그래, 맞아. 좀 전에 네아 전당 설계도를 봤어. 그건… 그건 모든 시대와 영역을 완전히 초월한 모습이었어. 시페린 경찰들의 잎사귀 사건을 완벽하게 잊을 만큼 대단한 광경이었지. 그걸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다는 게 아직도 믿기질 않아. 대체 누가 훔쳐다 이런 곳에 숨겨놨는지 모르겠지만 한 순간 정말 진심으로 집에 몰래 가져다 놓고 매일 감상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어. 정말이지 너에게도 꼭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폰포플이 처음 그걸 보여줬을 땐 단지 정체모를 물체일 뿐이었지. 마름모꼴의 푸른색 상자만 덩그러니 놓여있고 겉면엔 처음 보는 문자들이 여기저기 적혀있었거든. 그런데 폰포플이 말하길 자기도 전부 다 읽을 수는 없지만 그게 로젤란켈의 언어라는 거야. 언제 그런 언어까지 공부를 했는지. 하여간 아는 단어만 골라 읽어 봤더니 다른 건 몰라도 ‘네아 전당’과 ‘설계도’라는 단어만큼은 확실하다고 했어. 그리곤 마름모꼴 상자의 모서리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한 바퀴 빙 둘러 만지자 상자에서 소리가 나며 설계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어떤 형식으로 나타난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만들어냈다고!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데도 믿기지가 않았어. 서로 다른 크기의 마름모꼴들이 서서히 위로 솟아나더니 한계치까지 뻗었는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지. 다들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는데 이제는 제자리에서 각각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어. 수많은 마름모꼴들이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원심력으로 점차 뻗어 나가며 조각조각 분열되는 것처럼 보이더니 속도가 점차 줄어들면서 엄청나게 많은 선들이 이어지고 있었어. 너무 빨라 눈으로 다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지. 작은 움직임들에 홀려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네아 전당의 모습이 펼쳐져 있는 거야….
네아 전당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아름다운 건축물이지만 왜 설계도가 그렇게 대단하다며 찬사를 받는지 이해가 됐어. 어째서 예상도 구현조차 완벽하게 만들어내기 힘들다고 한 건지도 그제야 깨달았지. 아주 복잡하면서도 너무나 화려해 경이로울 지경이었어. 그걸 제작한 사람이 누구인진 몰라도 제작자에 대해 상상하니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마누스 항성계의 그 어떤 언어를 가져와도 이 느낌을 표현할 단어는 찾을 수 없을 거야. 언어적 표현을 갖다 붙이는 것마저 송구스러울 정도야. 그런 물건이 어째서 화학실 바닥 잔해 밑에서 발견된 거냔 말이지. 계속 거기에 있었단 얘긴데 이제야 찾아낸 것도 그렇고,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였지만 설계도 발견이 지금까지 일어난 일 중 가장 말이 안 돼. 게다가 이런 전대미문의 발견이 황당한 일에서 시작됐다는 것도 정말 터무니없어.
예전에 바르몬이 화학실에서 틈날 때 마다 보던 책이 있었거든. 《사막을 걷는 여인》이란 괴상한 책이었는데 어느 행성의 고대 설화 중에 사막에 살면서 무엇이든 원하는 생물로 변신할 수 있는 여자 이야기라나 뭐라나…. 로-벨-티조가 돌아올 때 마다 항상 사막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까 폰포플이 일을 끝내고 잠시 쉬던 도중 갑자기 그 책이 생각나더래. 그래서 화학실을 뒤지며 책을 찾다가 뭐에 발이 걸려 넘어졌대.
사고 이후로 화학실은 필요한 것만 챙기고 계속 방치해둔 상태였거든. 바닥에 균열도 있고 물건들이 죄다 엉망으로 넘어지고 깨져서 원래 뭐가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야. 베네디도 멀쩡한 것만 챙겨 나온 후론 화학실에 더 볼 일이 없다고 했었고, 그동안 우리 중 그 누구도 화학실에 갈 일이 없었지.
어쨌든 뭐에 걸렸나 살펴보다가 바닥에서 《화학식으로 남을 놀리는 방법》이란 주인 모를 책을 보고 문득 거기에 흥미가 생겼대. 사고 때문에 책의 반이 타버리고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걸 말이야. 그런데 그걸 집어 드는 순간 균형이 무너졌는지 반대편의 일부가 와르르 쏟아진 거야.
처음엔 화학실 전체가 붕괴해 깔려 죽는 거라 생각하고 혼비백산해서 제노아를 미친 듯이 불렀대. 급히 달려온 제노아는 정신 못 차리고 있는 폰포플을 부축하며 무너진 쪽을 봤대. 그리곤 굉장히 신경 쓰이는 뾰족한 파란색 물체의 일부가 잔해 사이를 비집고 튀어 나와 있는 걸 본 거야. 그게 마름모 상자의 한 쪽이었어. 꺼내서 열어보니 기가 막히게도 네아 전당 설계도였고 말이야. 황당하지? 뭐 이런 일이 다 있어.
잠시 다른 것에 너무 정신이 팔려있었네. 하지만 이건 그 정도로 흥분되는 일이야. 시간의 유적 발굴단도 찾지 못한 걸 우리가 조난당한 상태에서, 그것도 엄청나게 엉뚱한 방법으로 찾아낸 거라고! 그런데 신나게 얘기를 끝내고 나니 불현듯 허무함이 밀려와. 이런 상황에서 예술적 가치가 다 무슨 소용이야…. 무인 행성에 식량이나 탈출 수단이 아니라 돈을 갖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지.
경감은 숨기고 있는 게 너무 많고, 로-벨-티조는 아직도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고, 검은 별 957을 타고 나간 애들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베네디는 이제 칼츠 행성인과 잎사귀 두 개를 붙들고 있고, 클레인은 단파 라디오와 수신기 앞을 왔다 갔다 하고, 난 이렇게 앉아 단방향 통신기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설계도 이야기나 떠들고 있고….
돌아올 땐 이런 상황을 생각한 게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