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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옷장 깊숙이 걸려 있던 코트를 꺼내고, 이제 겨울이네 라고 할 만한 날씨가 되었다.
새벽이슬이 떨어지는 시간, 그 쌀쌀함에 이불 속으로 웅크리고 들어가면
느껴지는 그 따스한 온기에 다시 포근히 잠에 빠져 드는 계절.
곧 있으면 3학년도 끝나고 이제 졸업반이 된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진짜 빠른 것 같다.
어제 밤에 클럽에 갔다가 오늘 아침에 들어 온 수연이도 2월이면 졸업이다.
졸업하면 이제 맘껏 못 논다면서 학교 근처 술집으로 만족이 안 되는지,
요즘은 클럽이나 나이트를 다니고 있다. 같이 가자고 몇 번이나 권유를 받았지만
뭔가 나랑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계속 거절하고 있다.
토요일 아침, 나는 어쩌다 눈이 일찍 떠져서, 책상에 앉아 재혁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밀린 다이어리를 쓰려고 펼쳤다.
“아, 11월 8일…”
민준의 제대 일이다.
작년 12월에 다이어리를 사자마자 표시 해 둔 모양이다.
중간고사 이후로 다이어리를 못 썼더니 이걸 이제야 봤다.
♡♡♡준이 제대하는 날~!!!!!♡♡♡
느낌표는 5개나 붙여 놓고 그 칸에 하트를 잔뜩 그려 놨다.
진짜 좋았나 보네... 내가 준이랑 계속 연락했으면 이 날 만났을까...?
에이~ 됐다 괜히 생각하지 말자~~
나는 서랍에서 상자를 꺼내 종이접기를 시작 했다.
“아침부터 부스럭부스럭 뭐해 쏭..”
막 잠에서 깬 아영이 묻는다.
“아, 미안 나 때문에 깼어? 내가 너희보다는 일찍 일어난 거긴 한데, 지금 10시야”
사실 아까 내가 일찍 눈이 떠졌다는 시간도 이미 9시가 넘은 뒤였다.
대학생이 주말에 9시에 일어났으면 일찍 일어난 거지 뭐 하하..
“나 이거 파덕 주려고.. 파덕 이번 달에 생일이거든”
“그건 또 뭐야...”
“이거? 군복 솔라씨!”
아영이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갸우뚱한다.
“볼래?”
나는 군복 무늬가 프린팅 된 종이 한 장을 들고 침대로 올라갔다.
“이렇게.. 요렇게.. 이렇게 해서 접으면...
짜잔~ 티셔츠 모양으로 접히거든? 이거 주문 제작한 거라 여기 이름표에 김재혁 이름도
써져 있다? 귀엽지? 그 다음에 여기다가 솔라씨를 하나 딱 넣으면... 완성!“
“어.. 예쁘네..”
멍하니 나를 보던 아영이 영혼 없는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 눕는다.
“종이학 같은 것보다 훨씬 좋은 거라고!! 군인들은 비타민이 부족하다고 했단 말이야.
하루에 하나씩 꺼내 먹을 수 있게 특별히 준비하고 있는 선물인데..!!”
대꾸 없는 아영의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린다. 또 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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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오늘 뭐 할 거야?"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일어난 아영이 묻는다. 나는 군복 접기를 30개 정도 하고 다시 누워서
휴대폰으로 페북을 보면서 놀고 있었고, 수연인 아직 꿈나라다.
"나? 난.. 놀러 가려고"
"어디?"
"방콕"
"...재밌냐? 수연이나 깨워 봐, 아침 먹자"
아영이 가늘게 인상을 쓰면서 말한다.
"지금이 무슨 아침이냐.. 1시가 넘었구만... 수연아 밥 먹자"
"우우움.. 음.. 난 짬뽕.."
"그렇대"
"그럼 나도 짬뽕 먹어야지 이나 너는?"
수연의 메뉴 선택을 자연스럽게 받은 아영이 냉장고에 붙은 중국집 전단지를 뗀다.
"나는 짜장! 집에 밥 있나?"
있을 리가 없지, 차갑게 식은 밥통에는 언제 했는지 모를 밥이 한 움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야 이번 주 설거지 누구였냐"
수연은 말이 없고 아영이 입은 열지 않고 손가락으로 수연이를 콕콕 가리켰다.
"이 노무 지지배 진짜!! 너 저번 주에 빨래도 안 해서 내가 한 거 알아 몰라!"
"아아아~~!! 내버려두면 내가 할 텐데 왜애!"
"수건이 없는데 언제까지 기다리냐!"
"알았어, 알았어. 오늘 다 할게 아유 진짜"
"아오 진짜 저걸 그냥..."
나는 궁시렁대면서 일어나서 밥을 안쳤다.
"짜장 시켰는데 밥은 왜 해"
"먹고 짜장 밥도 먹으려고"
"장하네. 우리 쏭, 이런 건 참 부지런해 나도 밥 말아 먹어야지~"
20분 뒤에 배달 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수연이를
꺼내서 청소를 시작했다. 아영이는 군말 없이 빨래를 돌렸고, 수연이도 포기했는지
바닥에 있는 자기 옷을 개고 있다. 밀린 집안일을 하다 보니 대청소가 되어 버렸다.
하다 보니 재미가 붙었는지 수연이 아주 구석구석 열심이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진 자취방을 보니 뿌듯함과 동시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겨울이라 역시 해가 빨리 지네.."
"이제 나갈 준비 하자"
수연이 마지막으로 걸레를 빨아서 베란다에 널며 말한다.
"어딜?"
"술"
우리 셋은 달빛주막으로 향했다. 야채 곱창이 먹고 싶다는 수연이 고른 술집이었다.
"크~ 청소 열심히 하고 먹어서 더 맛있네"
"그치? 짠 짠 짠~~~"
수연이랑 건배를 하고 신나서 소주를 꼴깍꼴깍 먹고 있으니까 아영이 한 마디 한다.
"쏭 너 조금만 마셔라~ 또 서민준 찾으면서 진상 부리지 말고"
"아 내가 뭐~"
"너 맨날 술만.. 크크 아 수연아 너 모르지? 얘 저번 주에 스터디 모임에서 뒤풀이 했거든?
나는 못 갔는데, 나중에 윤재 오빠한테 전화 왔잖아. 얘 데려가라고“
"아 진짜? 미친, 얼마나 마셨길래 그러냐“
"아.. 난 기억 안 난다니까.."
나는 곱창만 뒤적거렸다.
"계단도 네 발로 기어서 올라가더니 내가 문 열자마자 현관에 엎어져 가지고..."
"크크 완전 개 진상이었네"
"그러고 울면서 서민준을 어찌나 불러 대던지, 나라 망한 줄 알았다"
아영이 쯧쯧 혀를 찬다.
"아니... 내가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고, 아 진짜 기억 안 난다니까?“
“아주 폰을 끌어안고 준아 준아, 그만 좀 불러대라 아오 진상”
아영이 한심하게 쳐다본다.
“아! 나도 봤다 쏭 저번에 나랑 둘이 마시는데,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테이블에 엎어져서 혼자 훌쩍 거리는 거, 그 때도 서민준 거리더니 아직도 못 잊었어?“
“아니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진짜”
“송이나 너 진짜 그럴 거면 서민준 만나지 김재혁은 왜 사귀냐?
재혁이가 이거 알아도 너랑 만날까?“
지혜의 묵직한 질문에 할 말이 없다.
"우리 술이나 먹자~ 짠짠~"
"송이나 오늘 왜 이렇게 달려?"
"내일! 일요일이니까!!"
일요일이기도 했지만 아침에 봤던 다이어리 때문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진 것도 한 몫 했다.
"먹고 죽자 짠~~"
우리 셋은 신나게 마시고 떠들었다.
뭐라고 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하고 싶은 데로, 먹고 싶은 데로,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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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쌓인 술병이 8병째다. 으음 오늘 좀 많이 먹는데..?
갑자기 울린 톡에 수연이 나가서 전화를 하고 오더니 급히 나갈 채비를 한다.
"뭐야 너 어디 가"
"너흰 집에 가, 나 잠깐 약속이 생겨서.."
"이 시간에 무슨 약속"
"나 잠깐.. 세훈 오빠한테.."
"세훈? 한세훈? 얘가 얌전히 잘 지내다가 갑자기 왜 이래"
다짜고짜 나가려는 수연을 아영이 잡는다.
"오빠가 나한테 먼저 연락 했단 말이야.. 갈래.. 보고 싶어.."
"야 지금 1시가 넘었어. 이 시간에 부르는 이유가 뭐겠냐?
그 새끼 술 먹고 연락 한 거 아냐?"
"......"
"맞네, 맞구만 너 지금 가봤자야, 걔가 너 좋아서, 못 잊어서 연락 한 것 같아?"
"그래도.. 그래도 내가 생각나서 연락 한 거잖아..."
"술 처먹고 너랑 한 번 자려고 연락 한 걸 수도 있지!"
"... 그게 뭐! 그게 어때서"
"뭐가 어때 안 좋은 거지!!"
"그래도 내가 생각나서 부른 거잖아 더 좋네, 내가 좋았단 거잖아“
"미친년이..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 지금 나가면 나 너 안 본다"
"아영아.. 제발.. 응? 나 가야돼.. 나 세훈 오빠... 나한테 어떤 사람인 줄 알잖아..."
"…그래도 수연아 지금 가는 건 아니야 그럼 내일, 내일 술 깨고 만나"
"놔!"
수연이 소매를 잡는 아영의 손을 뿌리친다. 수연의 뿌리침에 아영이 밀리면서
테이블에 있던 컵이 쏟아져 아영의 소매를 적셨다.
"미안해.."
수연인 결국 우리를 두고 택시를 타고 가 버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우리도 이만 집에 가자.."
"..그래"
나는 아영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수연이는 그날 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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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나 휴가 나왔어여”
“꺅 진짜??”
“이번 휴가는 길어서 오늘 학교로 갈게여”
“좋아~ 이따 오면 연락해~”
재혁이 휴가를 나왔다. 면회를 자주 가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건 아니었다.
재혁의 부대가 그렇게 멀지는 않아서 시간 나는 대로 면회를 가고 있기 때문이다.
멀지 않다고는 해도 왕복 5시간은 걸린다.
뭐, 민준이 면회 갔던 거리랑 비교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군부대의 공통점은 정말 다들 첩첩 산중에 있다는 거다.
어떻게 이런 곳에 군부대가 있는지 싶을 정도로 아주 꽁꽁 숨겨져 있다. 그게 맞는 거겠지만...
히히 이따 재혁이 오면 뭐 하고 놀지?
[나 누나네 집 앞인데, 누나 어디에여] 오후 3:17
[벌써? 으앙..ㅜ 나 수업이잖아.. 웬만하면 빠지겠는데 다음 주에 기말이라서 오늘은 안 돼..
이거 다 끝나가니까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려..] 오후 3:19
[으잉 그럼 학교로 갈까여?] 오후 3:20
[아냐~ 악 나 배터리 없다ㅜ 곧 폰 꺼질 듯... 우리 집 옆에 벤치 알지? 거기 있어] 오후 3:24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어제 충전을 제대로 안 시키고 나왔다
재혁에게 톡을 보내고 정확히 2분 뒤에 휴대폰이 꺼진다.
아 날씨 추운데 어디 들어가 있으라고 할 걸...! 으악 교수님 제발 빨리 끝내 주세요..
수업이 끝나고 허둥지둥 아까 재혁에게 말한 벤치로 갔는데 재혁이 안 보인다.
어, 뭐지? 어디 갔어. 일단 집 가서 충전이라도 해야겠다.
집에 들어갔더니 낯익은 신발이 보인다.
“누나! 왔어여!?”
“어? 뭐야 파덕 너.. 어떻게 들어 왔어”
“수연 누나가 열어 줬어여”
“수연이?”
“쏭 왔냐~ 나 집 오는데 보여서 데리고 들어 왔지, 밖에 춥잖아”
“어 그래 잘했어”
“아~ 재혁아 아까 한 얘기는 잘 생각해봐~ 나 나간다~”
“너 또 어디 가?”
“비~밀~”
“아영이랑은 언제 얘기 할 거야!”
“나중에~ 일단 나 간다~ 약속 있어”
저번 주말 새벽에 수연이 그렇게 나간 이후로 줄곧 아영이와 데면데면한 상태다.
집에는 들어오지만 서로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다.
“아까 수연이랑 무슨 얘기 했어?”
수연이 나가고 재혁에게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이런 저런 얘기?”
흐으음.. 별 거 아닌 얘기를 왜 말 안 해주는 거지? 뭔가 기분이 찜찜하다.
"나갈까?"
"그래여~"
"뭐야 수연이랑 무슨 얘기 했어~!"
나는 재혁의 손을 잡고 걸으며 또 물어 봤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여~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수연이랑 한 얘기니까 그렇지”
"왜여?"
"걔 남자 너무 밝힌단 말이야. 요즘 클럽 다니는데 원나잇 하고 다니는 거
나랑 아영이도 다 알아“
"...에이 안 그럴 수도 있죠"
"아니거든, 걔가 직접 말해 준 거야. 한 번은 실수여도 계속 그러면 실수가 아니지 않아?“
"누나 수연 누나 싫어하죠?"
"아닌데?"
"에이~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음... 솔직히 저번에 나랑 비슷한 옷을 사 와서, 그건 좀 기분 나빴다“
“무슨 옷?”
“수연이가 쇼핑하고 왔다면서 셔츠하고 가디건하고 꺼내서 보여 주는데,
가디건 색깔하고 디자인이 내가 입고 다니는 거랑 완전 비슷한 거야“
"누나가 입은 게 예뻐 보였나 보네"
"여자들은 자기랑 똑같은 옷 입는 거 진짜 싫어한단 말이야.
얼마나 똑같았으면 아영이가 내꺼랑 똑같은 거 아니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이거 유행이잖아 이러고 말더라. 유행은 무슨... 아, 민수연 얘기 그만 하고
너 간만에 휴가 나왔는데 우리 재밌게 놀자! 나 너랑 가보고 싶은 카페 있어!”
“진짜 나랑 가보고 싶었던 카페예요?”
??
“당연하지~ 내가 너 아니면 누구랑 가~ 가자!”
뭔가 재혁의 반응이 예전과 다른 느낌이다. 뭐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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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감이 올 것 같은데...“
“무슨?”
“족발은 살이 안 찔 것 같다는 감!”
"또 개똥같은 소리 하고 있구만"
아영이 냉정하게 말한다.
"아냐 원래 콜라겐은 살 안 쪄, 여자한테 콜라겐이 그렇게 좋대~ 피부도 탱글탱글 해지고"
지혜가 한 술 거들어 준다.
“그럼 불족발하고 마늘족발 반반 시킬까?”
“오 마늘 완전 좋아 콜콜~ 아영이 너 이제 감기는 괜찮아? "
"응 그날 약 먹고 푹 잤더니 괜찮아 졌어"
"너한테 약 줬다는 대리님은? 어떻게 됐어?“
지혜가 아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아~ 안 그래도 다음 날 물어보더라, 약 먹었냐고 몸은 어떠냐고“
"오올"
"약 감사히 잘 먹었다고 이제 괜찮다고 했어"
"...그게 다야?"
"응 왜?"
지혜와 나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 저번에 딱 감이 왔는데, 대리님이랑 뭐 있을 거라고“
"땡! 저~언혀 아무것도 없거든"
"에이씨 이상하네. 나 이런 데 감 좋은데, 저번에 남친이 거짓말 하는 거 내가 딱 맞췄잖아"
“맞아 직감이란 게 신기하게 잘 맞을 때가 있어. 뭔가 딱 느낌이 와, 쎄한”
“남자들은 어떻게 알았냐고 깜짝 놀라는데… 여자의 감이란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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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느꼈던 찜찜한 내 직감은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맞았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게 느낄만한 것들은 많았는데 너무 늦게 알아차린 걸지도 모른다.
참 모르겠다. 사람 속이라는 게,
없었던 마음이 그렇게 갑자기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있었던 마음을 나만 몰랐던 것인지...
어느 쪽이든 후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만 모르는 사실이란 거 진짜 기분 나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