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태양계, 꽃으로 지다 (1)

　#1. 어느 우주. 우주선교선 장미13호. 수선013과 론775의 대화. ‘종말의 일기’편 마지막 장면의 연속

　 -무리가 아닐까요. 사랑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과거의 인연들을 살려내는 것은…….

　 -사랑은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한다네. 기다림의 끝에 공황이 오는 건 당연한 순서 아닌가.

　 -…….

　 -자기파괴는 물리적 방법만 있는 게 아닐세.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저질러지는 정서적 자기파괴는 지구계 인류의 속성이라네.

　#2. 타이탄의 장미장원.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종말의 일기’편 #15의 직전 상황

　 자폭을 결심한 흑장미063은 주위의 모든 것을 다시 둘러보았다.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후원은 온갖 색깔의 꽃잎을 자랑하는 장미꽃으로 가득했다. 흑장미063과 샤넬084, 유라077, 엘리자벳032는 꽃밭을 향해 최후의 눈인사를 했다.

　 안녕. 이생에서는 다시 볼 수 없을 우리의 분신들이여! 너희를 가꾸면서 수없이 꿈을 꾸었지. 언젠가 그들과 더불어 너희를 보며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하겠노라고. 묘목 한 포기, 꽃잎 한 장마다 그리움이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노라고, 기다림의 시간을 헤아려 달라고 말하려 했었지. 그랬는데……

　 흑장미063은 이런 날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준비해 두었던 진홍색 독주를 한 잔씩 돌렸다. 다른 우주에서 얻어온 유사 장미를 교배시켜 만든 신품종을 시험하던 중에 발견된, 강한 환각작용이 있는 물질을 주성분으로 한 특급 장미주였다.

　 붉은 색깔 액체가 몸에 들어가고 알콜이 순환되면서 그녀들의 얼굴을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흑장미063은 치사량을 넘겨 마신 독주가 심장을 침범하여 온몸의 힘을 빼앗고 구름 위에 누운 듯 안온함을 주는 것을 느꼈다.

　 편안하구나. 미소를 지으며 감았던 눈을 다시 떠보았다. 꼭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던 700년 전의 어떤 꿈이 목숨을 버리려 하는 순간에 실체인양 펼쳐져 있었다. 저기에 있었구나. 아름다운 꿈에 대한 동경도, 가슴 벅찬 희망도, 한때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환희의 기억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그리움도, 아아, 겨우 저기에 있었구나.

　 후원의 상공, 가없는 우주 공간이 펼쳐진 곳에 조그맣게 신천지호가 날고 있었고, 김진욱090을 비롯한 승무원들이 걱정스레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 기운 탓에 환상을 보고 있나보다. 그래도 좋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흑장미063의 영혼은 먼 우주를 향해 달려갔다.

　#3. 타이탄의 지하 갱도 내 재생인간 배양실. ‘종말의 일기’편 #16의 계속

　 재생되어 전생테가 하나 더한 모습으로 배양기를 나온 흑장미064는 원망스런 시선으로 류우459를 노려보았다. 소중한 것을 빼앗긴 소녀가 그것을 빼앗아 간 악당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한 서린 눈빛이었다.

　 “왜 살렸지요? 그 분을 만나던 찰나였는데. 제 지성을 조합해서 당신을 따르게 한다 해도 본래의 제가 아님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류우459는 흑장미064의 싸늘한 말에 자조의 빛이 짙은 어조로 답변을 했다.

　 “그 옛날 지구에서부터 그대는 나를 경원했었으니 새삼스레 원망의 말을 듣는다고 해도 서운할 것은 없겠지. 하지만 기억해 두어야 할 걸. 그때에도 그대의 결혼 상대는 김진욱이 아니고 나였다는 사실을.”

　 흑장미064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토로할 길 없는 고독을 짓씹어 삼키는 처절한 얼굴빛이었다.

　 “그랬었지요. 당신들 두 사람은, 아니지요. 간디를 포함한 세 사람은 한 여성의 운명을 700년의 고독 속으로 몰아넣은 범죄자들이었어요.”

　 류우459는 흑장미064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어린아이를 달래려는 듯 은근함이 보이는 말투였다.

　 “그 고독의 원인을 씻어 주겠다는 걸세. 내가 사랑한 그대는 김진욱이 사랑한 그대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김진욱은, 그대가 갖고 있는 절반의 그대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우주로 도망친 자 아니던가.”

　 흑장미064는 발끈해서 반발했다.

　 “또 그 위선. 한때나마 당신의 그런 거짓 사랑에 속았던 것도 분한데 또 속이려 드는군요.

　 잊지 마세요. 당신은 소유하기 위해서 사랑을 했지만 그는 사랑하기 위해서 떠났다는 사실을.”

　 류우459도 지지 않았다. 그는 안타깝다는 듯이 흑장미064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의 사랑에 진실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가 찾는 사랑이 그대가 아닌데 어찌할꼬.”

　 흑장미064는 핑그르르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자조의 어조로 낮게 중얼거렸다.

　 “알지요. 700년 시간 동안의 기다림으로 충분히 확인했어요. 그렇지만,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본래의 나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거라서, 극히 한 부분의 것이 어느새 전체가 되어있더군요. 그가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그때의 재생으로 전수된 일부분의 기억만으로 나는 이미 그가 생각하는 내가 되어 있답니다.”

　 흑장미064의 마지막 말은 흐느낌으로 인해 잘 들리지 않았지만 류우459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 어린 소리로 말했다.

　 “그때의 일은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소. 그대를 살리겠다는 욕심에 새로운 지성을 줄 때의 부작용을 생각하지 못했으니. 그대가 살아난다는 것만이 마냥 기뻐서, 한 몸이 두 개의 지성을 가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시작은 그렇다고 쳐요. 다음의 행태는 또 뭐죠?”

　 흑장미064가 그렇게 쏘아붙이자 류우459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기운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답변을 했다.

　 “나 역시 700년을 후회해 왔소. 재생된 당신의 안에 내가 사랑하던 당신이 아닌 또 다른 당신이 들어있어서 다른 남성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원한 바 없이 두 개의 지성을 한 몸에 갖게 된 탓에 두 사람의 남성에 대한 사랑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당신을 생각하기 앞서 나 아닌 다른 남성을 사랑하는 당신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었소.

　 치졸한 질투였겠지만, 질투야말로 사랑의 가장 격한 표현이라고 한다니, 이만 용서해 주지 않으려오?”

　 흑장미064가 울먹이고 있었다. 여성은 진정에 약하다던가. 류우459는 흑장미064의 가냘픈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이 드디어 내 품에 드는구나. 이 여인이 내 아내의 신분으로 다른 남성에 대한 사랑을 감추고 가슴앓이를 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내 가슴은 얼마나 폭발할 것 같았던가. 그리고 긴 세월…… 질투와 원한으로 보낸 700년. 459세대의 재생.

　 이제 끝이다. 놈, 내가 이겼다. 이 여인은 이제 몸도 마음도 나를 허락하고 있다. 류우459는 흑장미064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유라078이 침묵을 깨트린 것은 그때였다.

　 “큰언니! 큰언니는 지금 세뇌되고 있는 거예요!”

　#5. 토성계 외곽 우주. 은하연방 정규군 황금전함 함대의 기함. 앞 장면의 다른 주시 방향에서의 연속

　 은하연방 우주군 태양계주둔군 사령부의 기함 황금전함에서는 또 하나의 류우459가 타이탄 지하 폐갱내의 인간재생 배양실에서의 사건을 주시하고 있었다. 류우 일가의 사람들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인 초지성적 생물로 진화해 있었으므로 그는 우주 모든 곳에 있는 류우 가의 사람들과 함께 류우459의 주체이기도 했다.

　 지하 갱내에서는 바야흐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온 우주에 산재한 류우 가의 사람들은 시선을 한 가지로 모아 타이탄의 지하 갱내 인간재생 배양실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6. 타이탄의 지하 갱도 내 재생인간 배양실. #4의 연속

　 흑장미064가 흠칫 놀라며 류우459를 밀어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한 남자의 소리가 들려왔다.

　 “맞아요. 게다가 아주 교묘하게 지성을 수정하기까지 했지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간디068이었다. 그는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머리통을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간디……”

　 흑장미064와 류우459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간디068은 설명을 이었다.

　 “류우459로 불리는 저 친구는 말입니다. 류우 가계의 역대 인사들 중에서도 최고로 간교한 친구라 이겁니다. 흑장미 아가씨의 마음이 정상 상태에서는 도저히 돌아서지 않을 것임을 간파하고, 아주 약간만 영향을 주어 스스로 진정을 돌린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려 했던 겁니다.”

　 간디068의 설명을 들으며 흑장미064는 정신이 맑아 오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류우459에게 안겼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간디068은 흑장미064가 류우459에게 증오의 빛을 보내는 양을 확인하고 그녀의 수치심을 달래줄 양으로 조용히 손을 잡았다. 흑장미064도 간디068의 그러한 호의를 짐작하고 마주 손을 잡으며 재회를 기뻐했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를 만난 기쁨으로 붙잡은 손목에 힘을 주었다.

　 이어서 샤넬085와 유라078, 엘리자벳033도 환성을 올리고 있었다. 간디의 뒤를 호위하듯 오신078과 알렉산더093, 코넬099가 홀연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흑장미064는 간디068을 반기는 중에도 눈빛에 근심의 기색을 보였다. 간디068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흑장미064는 간디068의 눈짓에 따라 몸을 돌렸다. 생체 배양기 속에서 전라의 김진욱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배양기 속 인공모태를 스스로 깨고 나온 흔적으로 영양액이 몸 전체에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흑장미064는 그와 마주 섰다. 두 사람 모두 배양기 속에서 갓 나온 청춘 남녀인 데다가 전라이기까지 하여, 한 쌍의 아담과 이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다.

　 “놈……”

　 류우459가 신음하듯 말했다.

　#7. 위와 같은 시각. 타이탄이 속한 토성계 내의 우주 공간

　 해적선 신천지호가 토성계 외측 천왕성의 그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토성계는 전투에 휩쓸려 들고 있었다. 신천지호 측의 단승 공격기들이 벌떼처럼 날아올라 연방 우주군 타이탄함대의 함정들을 기습했고,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손해를 입은 연방 우주군 타이탄함대는 한동안 함대의 기본 편제를 잃을 만큼 패색이 짙었으나 급거 달려온 지구함대의 지원에 힘입어 전세를 만회했으므로 전투는 치열한 소모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8. 앞 장면과 같은 시각.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타이탄

　 장미장원에 백기가 오른 이후 승전의 기운에 취해 기강을 잃은 우주군 육전대를 돌연 나타난 신천지호의 해적들이 기습함으로 타이탄은 다시금 전쟁에 돌입했다. 우주군 육전대가 자랑하던 로마 군단의 전법이 해적들의 기습으로 진용을 펴기 전에 타격을 입었으므로 자연히 전투는 각 병사의 전투력에 의해 승패가 가름되는 육탄전이 되었다. 해적들과 우주군 육전대원들은 모두 일류의 개조 전투병이었으로 좋은 적수가 되었으나 항복했던 타이탄 시민군이 해적들에게 가세함으로 전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9. #6의 계속. 타이탄의 지하 갱내 재생인간 배양실

　 “700년 전이었지요. 우리의 얄궂은 운명이 시작된 때는……”

　 장미장원의 여인들과 해적선 신천지호의 남자들, 그리고 류우459가 모두 모인 인간재생배양실에서 흑장미064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과거 어느 때의 이야기를 하였다. 짧지 않은 세월 전의 이야기들이 그들 모두의 기억 속에서 어느 이방인 세계의 전설인 양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