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의 집. 가득 찬 봉투를 든 JUN이 들어온다. 그리곤 답답한지 들어와 선글라스와 모자부터 벗어 던지고 봉투도 맡기고. 뛰듯이 시우가 앉아 있던 소파에 눕는다. 술이 하나도 없다는 말에 맥주, 소주를 무작정 넣은 게 무리. 생각보다 양이 많아져 봉지 1개임에도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손이 얼얼한 정도로.
“녹음 이제 끝난 거야?”
“아니. 아직. 멀었지. 이틀 뒤에 다시 시작할거야. 오늘은 먹고”
뒹굴뒹굴하며 말하는 JUN. 등에 무언가 걸려 꺼내 보니 대본이다. 읽고 있었던 건지 페이지가 열려 있는. 그제야 보이는 테이블. 여러 대본이 쌓여있다. 어떤 건 구겨져 있고, 아직 보지도 않은 새 대본으로 보이는 거도 있다. 그중에 등에 걸린 대본과 같은 제목의 대본들은 더 보인다. 비밀의 방, 그들
“비밀의 방, 그들? 이번에 새로 들어가는 작품?”
“아직 읽어보는 중이야. 회사에선 하라고 하고”
“캐스팅 하나도 안 난 작품인가? 처음 들어 보네.”
“응. 방영도 안 정한 작품이야. 사전제작 할 예정”
제대로 앉아 대본을 읽어보던 JUN.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시우와 같은 작품 찍겠다고 대본이란 대본은 다 찾고 있던 지유. 떠올려보니 이 대본이 있긴 있었던 거 같다. 매니저가 급하게 들고 온 대본 사이에. 이 작가님에 감독님, 시우가 한다고 하면 화제도 되고 시선을 끌겠지만. 절대 지유는 주연은 맡지 못할 거다.
그렇다고 이 사실을 굳이 말하진 않을 거다. 시우에도 지유에게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에게 말할 건도 아니고. 그저 JUN은 나중에 이 사실을 어떻게든 들었을 때, 절규하고 있을 지유의 얼굴이 상상되어 벌써 웃기다.
“내가 오늘 잘 왔네. 너 작품 들어가면 술 안 먹잖아. 여기서 먹어?”
읽던 대본을 놓고 테이블을 보며 말하는 JUN. 시우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본을 치운다. 읽던 대본, 아예 읽지 못한 대본 철저히 구분해 옮겨 놓는 시우를 보며, JUN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엌으로 가 봉투를 가져온다. 시우가 뺀다고 뺏어도 양이 많다.
“안주는? 안주도 사왔어?”
“물론. 간단하고 바로 먹을 수 있는 좋은 제품들로 내가 선택해 왔지. 봐봐”
자신만만하게 봉지를 열어 사 온 걸 테이블 위로 올리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제품들이다. 유미의 집에선 본 제품들과 비슷한…. 3분 카레, 3분 매콤 치킨, 3분 미트볼…. ‘3분이면 안주 완성!’ 시리즈가 줄줄 나온다. 그 뒤로 즉석들. 딱 봐도 맵고 짜고 자극적인 요리라 할 수 있는 음식들까지 하나씩 올려지고….
많이 사 오긴 했으나, 다 비슷한 것들. 테이블이 가득 찰수록 JUN의 어깨는 올라가지만, 시우의 표정은 굳어간다.
“야…. 정녕 네가 사 온 게 이런 거뿐이야?”
“설마! 널 위해 준비 했지!!”
술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제품 2개. 양손에 쥐고 자랑스레 꺼낸다. 시우를 위해 준비한 제품. 3분 크림 스파게티와 3분 토마토 스파게티다.
“왜? 크림이랑 스파게티는 괜찮지 않아? 안주는 원래 이런 걸로 먹어줘야 해”
“양은 또 왜 이렇게 많아? 오늘 이거 다 먹자고?”
“아니지. 남으면 다 놔두고 갈 테니까. 너 먹어. 이 형님이 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뭐랄까.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온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걸까. 테이블 위로 펼쳐진 3분 요리의 향연에 자랑스러워하며 제일 먼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JUN에 할 말이 없다. 놔두고 가도 먹을 사람도 없는 제품들이다.
시우는 말없이 맥주와 소주 몇 병을 들고 부엌으로 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JUN은 그 옆에 와 3분 매콤 치킨을 돌린다. 자주 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아 금방이다.
“조개 있는데, 조개 탕 먹을래?”
JUN이 뭐하든 신경 안 쓰던 시우가 냉장고를 보다 나온 말이다. 3분이고 뭐고 다 괜찮다고 해도 저것만 먹었다가는…. 다행히 최근에 해산물을 왕창 사놔 남아있던 조개 한 뭉텅이가 보여 시우는 안심한다.
‘좋아!’ 조개탕을 누가 거절하겠나. 거기다 요리 좀 한다는 시우가 해준다는데, JUN은 무조건 긍정의 대답을 내비치고 찾던 걸 계속 찾는다. 분명 여기 있었는데…?
“시우야, 그거 어디 있어?”
“뭐?”
“맥주잔! 왜 저번에 다 같이 먹을 때 썼던 거. 유미가 사왔었나?”
“밑에”
JUN의 말에 다시 생각난다. 그가 오기 전까지 하고 있던 생각. 다시 집에 들어와 대본을 읽었지만, 집중을 할 수 없었던 이유. 다 고유미 때문이다. 결론이 나질 않으니 머릿속에서 떠나보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거다. 술이라도 먹으면 머릿속이 단순해지려나 싶다.
드디어 맥주잔을 찾은 JUN은 한 손에 잔, 한 손엔 3분 요리를 들고 간다. 1개씩 해야 맛이 산다는 건 JUN만의 방식이다. 아무리 급하고 배가 고파도 3분 제품은 하나씩 넣어야 한다. 테이블에 갖다 놓고 배고픈지 양손에 3분 요리를 들고 뜯는 JUN을 시우가 겨우 말린다.
“그만 해. 나 안 먹을 거야.”
“왜?? 한 번만 먹어봐. 먹어보면 또 달라진다?”
안 먹는 것보단 못 먹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현재 시우의 상태를 봐선.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 건, 시우가 못 먹기 시작했을 때쯤, 인스턴트의 매력에 빠져 아직도 3분 요리 찬양을 외치고 있는 JUN의 해맑음 때문이랄까. 시우는 말리는 걸 포기했는지, 그를 두고 혼자 조개탕을 만든다. 3분 요리의 향보다 더 좋은 향이 퍼진다.
“역시 요리 잘해. 우리 시우! 유미까지 둘이 언제 그렇게 요리가 는 거야?”
옆에 서서 구경하던 JUN. 딱 술안주의 향이 나자 목소리가 한 템포 업 되어 말한다. 그러다 자기가 말한 ‘유미’란 말에 또 흥분해 ‘어!’ 소리친다.
“고유미는 대체 무슨 일 인거야? 아직 연락 없었지”
“... ...”
“먼저 모이자고 해놓고, 다음에 만나면 비싼 밥 한 번 얻어먹어야지. 안 되겠네”
JUN의 질문에 시우는 곧장 답하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선 92% 확신을 내렸지만, 8%는 남아 있어 대답을 하기도 애매하다. ‘유미를 봤다’고 할 건가 ‘못 봤다’고 할 건가. 두 개다 증거는 있지 않나. 처음부터 방금 있었던 일까지 다 말할까도 싶었지만. 아직 이다. 아직. 이 기막히고 머리 아픈 미스터리를 빨리 풀고는 싶지만, 시우 본인이 한 번 풀어보고 싶다. JUN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많이 봐줘서. 그때 너 받았다는 와인은 다음에 다시 날 잡아서 같이 먹자. 그때 안주 담당은 무조건 고유미고”
“그래”
“아니 근데 유미는 전화는 왜 받으면 뚝-뚝- 끊는 거냐고.”
“전화???”
‘그래’란 대답에 만족하며 다시 3분 요리에 관심을 돌리던 JUN이 혼잣말하듯 한 말이 시우의 귀에 딱 들어온다. 전화? 전화라고?
“어. 이틀 전에도 전화 했었는데. 받았거든? 그런데 또 바로 끊더라고”
“목소리는 들었어?”
“목소리? 아니. 그냥 ‘야!’ 하는 여자 소리 정도? 유미 목소리 같긴 한데.. 순간이라 확실하진 않고. 아, 몰라.”
“... ...”
“새로운 방법인가 싶었지 뭐. 내 카톡 매일 읽씹하다 최근에 잘 받아준다 했어. 이건 새로운 방법으로 시비를 거는 거야. 나한테”
JUN은 지난날이 겹쳐 생각나는지, 분한 얼굴로 말을 한다. 한두 번 당해 본 솜씨가 아니다. 한창때는 둘이 이런 문제로 매일 시비 걸며 장난치고 했었으니, 어쩜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거도 이해할 만도 하다. 거기다 최근에만 2번 받자마자 끊어버리니. JUN은 지금 복수의 칼날을 가는 중이다. 친구로서, 걱정되었던 거도 사실이지만. 그거보다 이제는…!
‘95% 확실’
완성된 조개탕을 옮겨 담으며, 신나서 술과 음식으로 가지고 가는 JUN을 보며. 시우는 생각한다. 95%의 확신을. 또다시 이상한 점이 발견된 거다. 분명 핸드폰은 매니저가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JUN의 전화를 받았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시우의 감이 그건 유미일거란 생각이 든다. 이제 ‘왜’를 알아야겠다. 이렇게 계속 못 만난다면 어떻게든 얼굴 보고 물어보면 되겠지.
“맥주!! 맥주 2병 더 들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