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종말의 일기(3)
#13. #11의 연속. 타이탄의 인드라광산 지하 갱도 안
“이곳이었군.”
인간 재생공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좁은 갱도를 빠져 나오자 갑자기 동굴이 커지더니 이윽고 거대한 회랑으로 변했다. 회랑의 내부에는 재생 의료학의 시술을 위한 의학 장비들이 중간물질 인드라의 원소 중화를 이용한 동력에 의해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에 연결된 회랑의 좌우에는 수없이 많은 생체 배양기가 늘어서 있었다. 류우459는 배양기 안에서 숙성되고 있는 인간군을 확인한 후 눈빛을 빛냈다.
“이것으로 그 옛날 타이탄과 맺었던 협정은 무효가 되었군.”
배양기 안에는 흑장미 가계를 비롯한 장미장원의 여주인들과 김진욱 가계의 사람들을 비롯한 해적선 신천지호의 승무원들, 그리고 류우 일가의 사람까지 은하연방의 주요 인물들이 인간이 되기 위해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14. 같은 시각. 타이탄의 장미장원
일단의 은하연방 우주군 육전대원들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지휘관은 말했다.
“최고 지휘관의 특명으로 타이탄의 장미장원을 점령하고 여주인들을 잡는다. 법률에 기준해서 합법적인 영장이 발부되었으니 반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 타이탄은 더 이상 비사법지역이 아니다.”
장미장원의 호위병들은 저항을 시도했다. 병력면에서는 연방군 육전대에 밑돌지 않는 대군이었다.
치열한 시가전이었다. 장미장원의 호위병들은 시민들과 합세해 저항군을 조직하고 타이탄의 전역에서 연방군 육전대와 교전을 벌였다. 오랜 세월 누려온 우주 유일의 비사법지역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므로 전투는 생사의 갈림으로만이 승부가 결정될 수 있는 처절한 것이었다.
은하연방군 육전대의 공격 목표는 압도적인 화력에 의한 타이탄 전역의 초토화였다. 육전대의 공격기들은 공기 정화 시설을 제외한 모든 건축물에 반양자탄을 퍼부었다.
타이탄 전역은 반양자탄의 가공할 폭발력에 의해 삽시간에 폐허로 변해 갔다. 반양자탄의 특성은 물질과 반물질의 상호 작용으로 원초적인 에너지, 즉 최초의 우주 대폭발과 같은 상태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심한 경우 항성계 전체를 공간으로 돌릴 수 있어서 소규모 전투에 사용을 금해 왔던 것을 연방군은 폭발력을 조절할 수 있도록 새로이 개발하여 신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장미장원을 목표로 하는 은하연방 우주군 육전대의 공격 제2파가 밀려왔다. 시민군은 요새화된 장미장원의 건물을 중심으로 원진의 형태로 포진하고 연방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중립은 강한 힘을 가진 자에게만 허용된다’는 지구시대 이래의 교훈이었다. 타이탄의 시민들은 비상시에는 무기를 들 수 있도록 자의식을 갖고 재생되곤 하였다. 그들은 본능에 각인된 대로 격렬히 저항했다. 건물의 잔해 뒤에 숨어 게릴라전을 벌이던 소규모 저항군의 총성을 개전 신호로 하여 타이탄은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연방군 육전대의 지휘관은 무조건적인 승리를 명령받고 있었다. 화상전화에 나온 류우459는 짧게, 그러나 단호히 명령을 내렸다.
“적에게 패배를 깨닫도록 하라!”
평소에 스스로 작명을 전하는 일이 드문 류우459로서는 이례적인 행보였다. 때문에 총사령관의 의지를 절감한 육전대의 지휘관은 확실한 승리가 보장될 전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각 단위부대의 지휘관들에게 작전 명령이 하달되었다.
“로마 군단!”
명령과 함께 연방군 육전대의 진형은 밀집 보병의 방진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전차를 전면에 내세워 방어벽으로 삼은 사각 대형의 밀집 보병이 각 부대 단위로 진용을 짜고 전진을 시작했다. 폭격으로 벌판이 된 넓은 지역에 방진형을 갖춘 각 단위부대가 대규모 방진형으로 배치되었으므로 육전대 전체로 보면 어린진(魚鱗陣)이 형성된 셈이었다.
로마 군단과 어린진은 모두 병력의 끝없는 압박을 목표로 하여 고안된 전법이었다. 전열이 무너지면 두 번째 열이 전면에 나서고 두 번째 열이 무너지면 세 번째 열이 전열로 나서는 형태의 로마 군단의 전법과, 독자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소부대를 물고기의 비늘처럼 배치하여 끝임 없이 새로운 힘을 가진 병력으로 적을 압박하는 어린진을 조화시킨 이는 타이탄 파견 우주군 총사령관인 류우459 자신이었다.
류우459는 지난 은하대란의 최종전에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에는 지휘관의 자질…” 운운하여 자신을 조롱하던 해적선 신천지호의 선장 김진욱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고대의 병법서를 연구하여 새로운 보병 전술을 창안했고, 휘하의 황금전함 함대에 가르쳤던 것이다.
연방군 육전대의 로마 군단 전법의 위력은 컸다. 전면에 나선 전차들이 시민군의 중소화기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여 전선을 돌파한 후, 이어진 육탄전에서 육전대의 로마 군단 전사들은 가장 원시적인 무기인 창과 칼을 이용하여 일대 살육을 자행했다. 시민군이 배워 익힌 ‘원인이 발생하기 전에 봉쇄하는’ 다차원 물리학의 초광속 운동을 이용한 각개 격파의 공격 전법은 ‘그저 묵묵히 전진하여 원인을 만들어 낼 뿐’인 로마 군단의 가장 원시적인 전법에 의해 여지없이 격파되고, 타이탄 전역은 피로 물들어 갔다.
인공 태양이 중천에 떠 있을 무렵 시작한 전투는 타이탄의 모성인 토성이 밤을 알리기 위해 떠오를 때 끝났다.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에 백기가 올랐기 때문이었다.
#15. 앞장면의 연속. 타이탄의 장미장원
“무서운 여자들이로군.”
류우459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빛으로 신음하듯 말했다.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장미꽃이 만발한 후원에서 흑장미063을 위시한 장미장원의 여주인들이 죽어 있는 모습을 확인한 후였다.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련만……”
류우459의 여전한 중얼거림이었다. 생각을 소리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실망의 강도가 높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유서가 있습니다.”
수색 중이던 참모가 장미꽃 문양이 새겨진 종이를 가져왔다. 류우459는 유서를 펼치면서 코끝을 스치는 향기로 흑장미063을 읽었다.
(700년 전의 옛날에도 700년 후인 지금에도, 당신은 그에게 졌습니다. 우리는 그와 그의 동료들을 찾아갑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해야 옳겠지만 우리는 그들을 다시 만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를 재생시켜 지성을 고친 후 당신을 따르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개조된 저는 제가 아닙니다. 흑장미 가계의 63대를 비롯한 장미장원의 여인들은 모두 해적선 신천지호의 선장 김진욱 가계의 사람들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에게 지난 700년의 세월 동안 마음을 주어 왔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삶은 우리의 것일 수 없습니다.)
류우459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독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문득 그의 눈빛에 광채가 빛났다. 무언가 새로운 궁리가 떠오를 때 보이는 그의 버릇이었다.
#16. 앞장면의 연속. 타이탄의 지하갱도 내 재생인간 배양실
배양기 내의 영양액이 배출되고 여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류우459는 여인의 나신이 차례로 드러나면서 재생 의료학의 전문가로 구성된 부하들의 얼굴빛이 탄성으로 빛나고 있음을 보았다.
여인의 깍듯한 미모의 얼굴과, 젖가슴을 중심으로 한 상반신과, 배꼽과 치부가 노출된 하반신이 여신상의 조각처럼 빛을 발했다. 우주 안에 미인의 가계로 소문이 높던 장미장원의 여주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흑장미의 모습이 이러했구나…… 류우459는 부하들의 그러한 시선이 역겨웠다. 너희가 감히. 저 여인은, 저 여인은…… 한 때나마 내 여자였다!
샤넬, 유라, 엘리자벳의 후신들도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각기 개성이 있는 아름다움을 갖춘 미인들이 전라의 모습으로 배양기의 차가운 수정관 속에 단정히 서 있었다. 재생 의료학의 전문가들인 류우459의 부하들로서도 일찍이 대해 본적이 없는, 아름다움의 극치와 같은 미모들이었다.
자연의 극치는 사람이고, 사람의 극치는 젊은 여성의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우주 안에 가장 아름다운 사물은 한 시기를 맞은 젊은 여성이다. 파괴예술가들의 말이었지. 김진욱 그 녀석이 속했던, 아냐. 그 녀석이 주도하던……이겠지.
류우459는 질투로 인해 온몸의 핏기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2차 은하대란의 최종전에서 받았던 수모와 흑장미 가계가 추구하는 바를 순간적으로 연관시켜 생각한 탓이었다. 놈! 내가 여자들을 차지한 후에도 그렇게 태연한 척 할 수 있나 보자!
배양기의 문이 열리고 흑장미를 선두로 여인들이 문을 나섰다. 아마도 흑장미063의 후신이 될 여인은 전신이 노출되어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듯 똑바로 걸어서 류우459에게 다가왔다. 걸음걸이의 동작 하나마다 미모를 배경으로 하는 교태가 엿보여, 여인이 류우459의 마음속 연인임을 알고 있는 부하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기어코 살려냈군요.”
여인의 말이었다. 류우459는 엉뚱한 답변을 하고 있었다.
“그대는 흑장미 가계의 기억을 전부 이었나?”
류우459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지고 있구나. 남성은 세계를 정복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영원히 정복당하는 존재라고 하더니.
“저는 처음부터 흑장미064가 되기 위해 조제되고 있었어요. 기억을 잇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흑장미064는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깨끗한 목소리로군. 이것도 남성의 주의를 끌려는 교태의 한 가지인가. 아니면 갓 재생된 탓의 치기? 700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에도…… 류우459는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우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 협정을 깼지? 은하연방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비사법지역의 인증을 받은 것을 잊었나? 저들을 길러 우주로 내보낸 건 당신들이었지?”
류우459가 질문과 함께 눈길을 보낸 곳은 배양기 속에서 성숙되고 있던 김진욱 가계와 그의 동료 해적들의 후신들이었다. 재생 의료학의 전문가인 류우459의 부하들은 김진욱과 그의 동료들의 전라의 모습을 배양기 속 수정관 안에 드러내 놓고 있었다.
흑장미064는 김진욱의 후신이 들어있는 배양기 쪽을 돌아보며 핑그르르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17. 어느 우주의 어느 장소. 우주선교선 장미13호. 수선013과 론775의 대화. #1의 시간이 지난 연속
-왜 저 여인들이?
-집념이었겠지. 울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명고를 스스로 울려보는 절박함……
-……
-사랑은 무슨 변화든지 가능하게 만드네. 특히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일 경우……
-……
-계속 지켜보세.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신을 대신하여 종말의 증인이 되는 것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