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종말의 일기(2)

　#8. 앞 장면의 연속. 타이탄의 장미장원

　 흑장미063은 자신과 자신의 선대들이 여러 세기 동안 꿈꾸어 온 세계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고 절망에 빠져 있었다. 타이탄은 하늘과 땅, 그리고 모성인 토성계 주위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은하연방 우주군 병사들로 가득했다.

　 하늘로부터 보병 전투용 장갑차들이 별처럼 낙하했다. 타이탄의 상공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여 놓은 은하연방 우주군 황금전함 함대의 본격 진공은 장관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타이탄의 시민들은 경치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자유가 이토록 허무하게 깨질 수 있는 것이던가. 우리가 누려온 비사법지역이란 적의 방관에 의존한 허상에 불과했구나.

　 이제 어떻게 되는가. 어찌해야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가. 시민들의 울분에 아랑곳없이 은하연방군 육전대의 상륙은 이어지고 타이탄은 은하연방 우주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타이탄의 지배자 장미장원은 가장 충격이 큰 곳이었다. 장미장원의 대외적인 창구인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첫째 주인 흑장미063은 시민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들 보다 몇 곱절 더한 좌절감을 맛보고 있었다.

　 반항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힘의 차이를 확인했을 뿐 무용한 저항이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남성이고 여성은 다만 그 남성을 지배할 뿐이라고 하더니…… 흑장미063은 지배할 남성을 갖지 못한 여성의 고독을 뼈저리게 느꼈다. 휘하에 두고 있던 용병 전력을 거의 희생시킨 후에 얻은 값비싼 교훈이었다.

　 역시 그를 찾아 도움을 청해야 하는가. 해적선 신천지호. 타이탄의 장미장원이 낳았고 떠나보낸 정인들이 있는 곳.

　 통신방법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타이탄의 장미장원이 우주에 갖고 있는 인연들을 활용하면 우주 전역에 자신들이 처한 곤경을 알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싫었다. 보낼 때 맹세하지 않았던가.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그때에 서로 존중할 수 있는 모습이 되어 담담하게 맞으리라 하고.

　 명목상으로는 아직 타이탄은 우주 유일의 비사법지역이었다. 은하연방군의 육전대와 장미장원의 호위병들이 치른 전투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소위 ‘어둠의 전투’였다. 때문에 은하연방 우주군이 상륙했지만 그들에 의해 생긴 피해는 전무한 셈이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자신들은 비사법지역인 타이탄에 불법적으로 상륙했던 많은 군사 단체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은하연방 육전대의 입장이었다. 장미장원의 용병들은 무단 상륙한 적에게 전멸을 당한 것이다-가 대외적으로 발표될 것이고, 무력이 해제된 타이탄은 무법자들의……생각하기도 싫은 결과였다.

　 류우459는 상륙 첫날에 주점‘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을 다녀간 후 소식이 없었다.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 원래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원한까지 깊어졌으니. 흑장미063은 너무나 어이없이 무너지던 자신의 부하들을 생각하며 그 뒤에 숨어 있을 류우459의 힘에 전율을 느꼈다. 우리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도 제법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장미장원의 호위병들은 우주 각 곳에서 크고 작은 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온 범죄자 출신으로 이루어진 용병들이었다. 장미장원의 여주인들은 그들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전투력을 극대화시킨 후 무장을 시켜 울타리로 삼았다. 지난 400여년, 용병들은 장미장원의 손발이 되어 비사법지역의 치명적인 약점인 범죄 단체의 발호와 범죄자의 폭주를 잘 막아주었다.

　 그 울타리가 사라진 것이다. 단 한 차례의 전투로 어이없이 와해되어 버린 용병들에 대한 실망은 미래를 잃은 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를 불러야 할까. 흑장미063은 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메탄으로 가득했던 타이탄의 대기를 산소로 교체하는 역사를 벌인 이들도 장미장원의 선대 여주인들이었다.

　 중간물질 인드라의 희소가치가 사라진 후 살아남기 위해 벌였던 크고 작은 사업들 중 가장 어려웠던 하나가 타이탄의 하늘에 별이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산소가 충만한 대기만이 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게 한다. 떠나가는 광부들을 붙잡을 수 없다면 지나치는 여행객들의 발길을 머물게 해보자. 산소와 별빛과 푸르름은 좋은 자원이 된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었다.

　 흑장미063은 심호흡을 해보았다. 이 맑은 대기를 맛보여 주고 싶었는데. 저 별빛도, 저 푸른 농장도, 모두 당신을 기다리며 오셨을 때 자랑하기 위해 꾸몄던 것인데. 모두들 떠나는 별에 최후까지 남겠다고 발버둥친 이유는 오직 하나 당신이 돌아올 곳을 만들어 놓겠다는 일념에서였는데……

　 은하연방군의 전차부대가 지나간 자국 속에 싹을 틔우던 보리가 짓눌려 있는 양이 보였다. 이 보리 알은 왜 이런 엉뚱한 곳에 떨어져 자라지도 못하고 짓밟혀 죽었는가. 그러고 보니 우리 역시 전차 바퀴 아래 보리 싹과 다르지 않구나. 이제 다 끝난 것인가. 역시 그를 불러야 하는가.

　#9. 앞 장면의 연속. 태양계 제6행의 위성 타이탄

　 은하연방 육전대의 병력에 의해 타이탄의 행정력이 장악된 후 시민들은 자유란 어떠한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법과 도덕, 윤리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시작한 타이탄의 비사법지역 추진 이후 시민들은 신분의 차이가 없는 사회에서 내 가정, 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성간 무역을 하는 무역상이 대부분인 시민들은 물건을 사고 팔 때마다 일일이 세금을 떼는 신 행정부의 관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우리가 이익을 나누어주어야 하는가?”

　 그들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우리가 너희를 보호해 주기 때문.”

　 기실 타이탄의 신 행정부는 은하연방 우주군 장교들로 급조되었으므로 오랜 세월 ‘일하면 봉급을 받고 봉급 가운데서 세금을 내는’ 관습에 익숙해 있었다.

　 은하연방 우주군 육전대가 상륙한 후 타이탄은 짧은 시간에 긴 변화를 겪었다. 시민들은 별 전체가 부자가 되기 위해 일했을 뿐 개인의 치부에 대해서 몰랐던 시대가 마감되었음을 주점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에 들려 여느 때처럼 장미주를 들려고 할 때 알았다. 정작 여주인들은 돈을 받지 않았지만 은하연방의 점령군은 타이탄 밖의 우주 안에서 가장 값비싼 술인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의 장미주에 우주 안에서 가장 높은 주세를 붙여 놓았던 것이다.

　#10.앞 장면의 연속. 타이탄의 장미장원

　 “그 사람, 왜 이리 우리를 핍박하는 거죠?”

　 엘리자벳032가 울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미장원의 네 여주인 중 막내로 재생될 때 가장 어린 몸을 받곤 하여 20대의 미모를 자랑하는 엘리자벳032는 외모만큼 여린 감정을 가진 소녀였다.

　 언제나 술손으로 빈자리가 없던 주점‘언제나 장미 피어 있는 곳’은 은하연방 우주군 육전대의 고급 장교 서넛과 외계에서 온 관광객 몇이 장미주를 홀짝거리고 있었을 뿐 정작 주인인 타이탄의 주민들은 찾을 수가 없었다.

　 흑장미063은 창을 열어 먼 우주를 보았다. 타이탄의 모성인 토성이 낮의 인공 태양보다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이 만월이 되는 날이었구나. 만월 아래 펼쳐진 우리 타이탄의 푸른 풍경은 우주 안에 소문이 높지. 저 경치를 함께 볼 때를 꿈꾸어 그 숱한 세월을 기다림 속에 지냈건만…… 산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초목을 심어 만든 700년 정성이 물거품이 되는가. 역시 그를 불러야 할까보다. 그것을 기대하여 저렇게 우리를 압박하는데. “도와주세요!”를 외치는 것은 저들의 뜻에 따라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그것이 발견되기 전에……

　#11. 앞장면의 다른 시각에서의 연속. 타이탄의 중간물질 인드라 광산

　 류우459는 부하들을 지휘하여 폐광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 옛날 타이탄이 태양계의 꿈의 별로 대접을 받던 시절에 그 동인이 되었던 중간물질 인드라를 캐냈던 자취인 폐광은 인드라의 희소가치가 사라진 후에도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끌어 우주 안에 유명한 관광자원이었다. 타이탄의 지하에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갱도마다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 죽은 유형수들의 사연이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지구를 찾아 인류의 영고성쇠를 실감하고 온 여행객들은 타이탄의 폐광에서 또 다른 감회를 얻곤 하였다.

　 류우459가 한 부하에게서 새로운 갱도의 발견을 보고 받은 것은 흑장미063과의 최후의 담판을 끝낸 직후였다. 조건을 받아들이겠는가 아니면 멸망하겠는가의 최후통첩에 흑장미063을 비롯한 장미장원의 여주인들은 싸늘하게 웃을 뿐이었다. 류우459는 그녀들의 웃음에서 700년 전의 자신이 겪었던 수모의 자취를 발견하고 일순 타이탄의 폭파를 명령할 뻔했었다.

　 이 따위 위성 하나쯤 없애고 외계의 어느 곳에 다시 꾸미는 일은 어려운 일도 아닌데 내가 왜 망설이고 있는가. 700년 전에도 저 여인들은 저렇게 싸늘한 미소와 함께 배신을 선물하지 않았던가. 정을 붙일 그 무엇도 주지 않은 여인들에게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음은 무엇을 기대해서인가.

　 이 무슨 부끄러운 집착인가. 부하가 가져온 보고를 빌미 삼아 장미장원을 나오면서 류우459는 모멸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폐광 안은 온통 죽은 자의 세상이었다. 특별히 무덤을 만들지 않는 타이탄의 시민들이 노환으로 죽은 전생의 몸을 폐광 안에 버린 탓에 타이탄 역사 700년 동안 살았던 모든 인간의 주검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무엇이든지 관광자원으로 만들어 내는 것으로 소문이 높은 타이탄의 상인들이 죽은 자들의 시신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곳곳에 세워 놓았으므로 그들의 눈에 생기가 없음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갱내는 온통 사람으로 가득 채워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청정한 공기라는 것도 불편한 것이로군. 덜컥 무너져 내리는 시체를 피하며 산 사람처럼 전혀 손상되지 않은 시신의 얼굴을 본 류우459는 낮게 중얼거렸다. 인간은 죽어서 땅으로 가고 땅은 다시 인간을 위한 식료를 내어 인간을 키우고…… 그게 우주의 섭리였을 텐데 인간은 언제부터 영원히 부패하지 않는 육체를 남기게 되었을까.

　 무너져 온 시체의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보며 류우459는 또 한 차례 자조 속에 빠져들었다. 흑장미 가계의 여성이로군. 우주 안에 단 하나뿐인 직계 유전의 산물이니 선대 흑장미의 시신이겠지. 700년의 세월 동안 스스로 유전자를 조작하여 최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물답게 과연 절색이로군. 죽은 자가 되어 저토록 창백해 놓으니 더욱.

　 여인의 시신은 치부를 가렸을 뿐인 전라였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자연이고 자연의 백미는 사람이다. 그 옛날의 소위 파괴예술가들이 했던 말인데 이토록 완벽하게 이루어 놓았구나. 그렇다고는 해도 무서운 여인들이다. 자신의 주검까지도 관광자원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곳입니다.”

　 안내를 맡은 부하가 목소리를 높였다. 갱도의 한쪽 벽이 열려 통로를 만들고 있었다.

　#12. 앞 장면과 같은 시각. 타이탄의 장미장원

　 “발견됐나 봐요.”

　 엘리자벳032가 울상으로 말했다. 방안의 전면을 차지한 스크린에 류우459가 부하들과 더불어 시신의 동굴을 지나 새로운 갱도로 들어가고 있는 양이 비치고 있었다. 끝인가. 그를 돕기 위해 해온 일들 중 가장 보람된 일이 그것이었는데. 흑장미063은 눈을 감고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