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은희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신랑이 오빠 일을 도와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해숙이와 인연을 끊으라고 말까지 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사람.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인 인걸을 오빠가 친구이면서도 가장 싫어하는 친구라고 했다. 이 사람의 성격이 서로 경쟁을 붙이고 이간질을 하는 친구라고 했다. 이 사람의 계략에 빨려 들면 꼭 무슨 마력에 빨리듯이 빨려 들어간다고 했다. 지금 해숙이 그러고 있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편이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걸이 비틀거리며 일어설 때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당신 왜 쓸데없는 짓을 해? 지금 그 새끼 만나고 있어?”
“해숙아! 오빠하고 한잔 더 하러 가자.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더 크게 훤히 들리라고 하는 말과 같았다. 있는 그대로 휴대폰을 통해 남편 귀로 들어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사람이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학교로 발령을 요청해서 온 사람과도 같이 보였다. 참을 수가 없었다. 어깨에 팔까지 걸치고 있었다. 이건 불 난 집에 부채질이 아닌 기름을 내리 쏟아 붓는 짓이었다.
“아니! 저한테 왜 이래요? 도대체 무슨 앙금이 있어가지고. 이 팔 내려요”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 믿기지가 않았다. 눈동자가 완전히 풀려있고 자기 몸도 주체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의도된 추태는 분명히 아니었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직 낮인데도 앞이 캄캄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조건 뛰었다. 그 방향이 집인지 어딘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뛰고 있었다.
그때 임정훈도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허공에다 퍼부으며 벌떡 일어섰다. 앞에 아무 차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내달렸다. 그때 휴대폰 벨이 계속 울렸다. 그 일 이후에 꼴도 보기 싫은 놈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에 계속 전화가 오는 것이 이상했다.
설마! 혹시! 한번 더 김성은을 믿어? 혹시 이 놈이 다시 추진하나?
전화를 받았다.
“임사장님! 오늘 잠시 시간 낼 수 있나요? 그때는 도와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진작에 사모님이 제 후배란 걸 알았으면 제가 발벗고 나섰을 건데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도움을 드리지 못했네요”
잠시 헷갈렸다. 그때 몰랐었나? 분명히 그 놈들 패거리들에게 낙오된 동기라고 들었다. 일단은 만나보기로 했다. 예상대로였다. 인걸이라는 동기의 부탁으로 예의를 차린 자리. 그 자리에 예의라면 당연히 술값도 내야 하는 데 술값은커녕 2차를 원했다. 역겨웠다. 지금까지 자기가 다녀본 가장 비싼 술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최고로 비싼 술과 옆에서 술잔을 채워 줄 젊은 아가씨들을 앉혔다. 그리고는 유유히 그 집을 나왔다. 술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바로 경철서로 데려 가라고 신신당부를 당부도 했다.
집안에 텅 비어 있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았다.
해숙이 도착한 곳은 너무 놀라서 이름마저 잊어버린 긴 풀들이 질퍽한 늪을 온통 뒤덮고 있는 강변이었다. 온 몸이 진흙으로 색칠해져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인걸이 갑자기 덮쳐서 무서워 뿌리쳤고 바로 그 뒤에는 켜진 휴대폰이었다. 어디까지가 남편 귀에 들어갔는지가 더 두려웠다.
두려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강변에 어느새 해숙은 웅크려 앉아 있었다. 오늘은 두려움이 컴컴한 어둠을 점령했다.
가끔 여기에 오고 싶은 적도 있었다.
풀벌레 소리와 노란 달빛에 은은히 흐르는 강물을 고요와 함께 밤을 즐기고 싶었다. 퇴근하고 몇 번이나 여기를 지나치며 걷고 싶었다. 남편과 다정히 손잡고 걷고 싶은 그 강변이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올 수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감히 여자의 몸으로 혼자 올 수가 없었다.
어둠이란 말 하나로, 두려워, 무서워, 단 한번도 여기에 혼자서 온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어둠, 어둠 속에 갑자기 나타날 강도, 날치기, 성 폭력범 보다 더 무서운 남편의 폭력을 피해 여기에 와 있다. 여기가 안식처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여기에 머물고 싶다는 소망밖에 없다. 아침이 두렵다. 살아 숨쉬고 맞이한 아침은 곧 죽음이라는 미래가 뚜렷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고개를 살짝 들어 불빛이 현란한 동네를 쳐다 봤다. 아직 이른 밤이어서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림자들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바삐 쫓아 다닌다. 마치 남편이 풀어 놓은 사냥개들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림자!
어릴 때 그는 항상 그림자가 되어 주었다. 물론 그 그림자가 자기를 위한 그림자가 아니란 걸 잘 안다. 그가 지어준 그림자는 그의 동생인 은희의 소유였다. 자신은 그 틈에 끼어든 것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그림자가 늘 편안하고 좋았다. 오빠가 한가지 큰 실수를 한 것은 그 그림자의 주인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은희에게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면 항상 불호령이 떨어졌고 절대 멀리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자신. 해숙에게는 달랐다.
멀리 벗어나면 항상 쫓아와서 그 곁에 두었다. 해숙은 그렇게 그 오빠의 그늘에 있었다. 오빠가 성장하면서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때도 오빠는 그 선배보다 자신이 먼저였다.
오빠의 크나큰 착각에 자신도 더 큰 착각을 했다. 해숙은 은희와 같은 피가 흐르지 않는 동생이었고, 어른이 되면 은희와 같은 피가 흐르는 아이를 간직할 줄만 알았다. 그래서 오빠가 은희보다 자신을 더 살뜰히 챙겨주는 줄만 알았다. 은희를 자기 친구에게 보낼 때까지 끝까지 지켜주듯이 자신도 보호받는 줄 알았다.
애당초 그런 어설픈 사랑도 아닌 사랑의 표현을 하지 말았어야지. 항상 앳된 나이에 누가 먼저 마음을 뺏어갔는가? 그러지 말았어야지. 눈물이 주르르 흘려 내렸다. 그러고 보니 공포에만 휩싸였지 눈물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리고는 화가 났다.
오빠는 성인이 돼서 그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언니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자신은 그 이전에 그 언니 때문에 상처를 갖고 지냈다. 누가 더 억울한가? 지금까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이 대하는 이유가 뭘까? 자기는 가정이 없는가? 그 놈의 짝사랑을 간직한 채 산다는 건 은희 새 언니에게 용서받지 못할 모독이 아닌가? 누가 더 마음을 흔들어 놨는가? 은희와 똑같이 동생으로 여겼다면 그때 똑같이 대했어야지. 무슨 이유로 잘못을 저질러도 단 한번도 채찍질을 하지 않았던가? 무슨 이유로 항상 감싸주다가 이렇게 매몰차게 자신을 내팽개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