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골프가 뭔지도 몰랐다. 물론 너도 잘 알지만 내가 골프를 모를 리야 없지. 단지 급성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기억상실이 되면서 골프도 같이 사라지는 바람에 잊어버린 거지. 그때 정말 비참하더라. 내가 죽고 난 뒤에도 그런 모욕은 절대 잊지 않는다. 그렇게 자기 마누라와 친구 앞에서 굴욕을 맛보고 며칠을 지내다가 골프가 뭔지 궁금하더라.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그때 운전하는 방법도 잊어버려 큰 형님이 차 키를 압류해버렸잖아. 그래서 걸어서 집 근처 연습장에 갔는데 거기서 연습하는 사람들이 모두들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어. 우리가 같은 서클이었다고 하더군. 같은 서클이면서 병문안 단 한번도 오지 않은 놈들. 친구들에겐 너 말대로 오지 마라고 해서 안 왔다지만 그 놈들은 아니잖아. 그때 돈도 몸도 다들 비슷하게 건강해야 어울릴 수 있다는 걸 또 새삼 깨달았다. 우리 동기 중에도 그런 친구가 있잖아. 축구를 그렇게 잘 하다가 교통사고로 걷는 것도 말도 어눌하게 하는 친구. 모두들 그 친구를 꺼려하더라. 되새겨 들어! 동생!”
그리고는 씁쓸히 웃으며 산 아래로 보이는 시내를 힐끔 쳐다보는 데 영철이 입술이 약간 위로 비틀어 올렸다. 그때가 떠오른 것 같았다. 영철에겐 섭섭할 수 있는 얘기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나온 세상은 뒤에서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앞에서는 모두 친절했다. 친 형제가 아닌 어머님처럼 대해 주었다. 그 후로 들리는 얘기들.
병상에서보다 퇴원하고 겪었던 취급! 한마디로 악몽이었다. 병상에서보다 퇴원하고 겪었던 취급! 한마디로 악몽이었다. 친했던 그렇지 않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원 후에 앞에서는 더 살갑게 대해 주었지만 뒤로 들리는 얘기는 전혀 반대의 태도. 악몽! 그 자체였다. 어머님으로 착각한 사실을 아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원히 기억상실증 환자로 살 줄 알았는데 지금 그들과 너무 똑같이 살고 있어서이다.
퇴원하고 그때 수리는 영철이보다 그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 당시에 수리의 복잡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수리의 업은 아주 좋은 먹이 감이었다. 사자나 호랑이도 아닌 고양이 새끼들이 갓 태어난 쥐 새끼. 수리를 먹으려고 달라 들었다. 그걸 영철이는 묵묵히 보고 있다가 단 칼에 쳐내줬다.
“그래! 그때 너하고 같이 골프 치러 다녔던 놈들 중에 한 놈도 병문안을 같이 가자는 말은 안 하더라. 그래서 너 퇴원하고도 골프 얘기는 일체 하지 않았지. 혹시나 또 그 새끼들과 또 어울릴까 염려돼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 새끼 때문에 네가 골프를 다시 시작했단 말이네. 그런데 그 돈 얼마야? 내가 갚아줄게. 진짜 더러운 놈이네”
“미쳤냐? 너도 제주도 가고 싶어? 내 돈으로 거기를 마음 편히 다녀 올 자신이 있으면 내가 당장이라도 갚을 게. 그리고 너는 벌써 내 돈으로 제주도는 아니지만 여행을 다녀왔어. ”
“내가 언제? 내 몰래 내 동생한테 돈 줬어. 왜? 오빠 행세하고 싶었어?”
다른 때 같으면 바로 날카로운 칼 날을 세우고나 돌멩이로 돌 직구를 던질 상황인데 의외로 차분하게, 그리고 씁쓸하게 말을 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재작년에 동기들 단체 관광 갈 때 전세 버스 비 내가 냈다. 그리고 한번 더 열 받았지. 총무가 그 돈을 돌려 준다 길래 왜 그런지 물었는데 그 놈이 돌려 주라고 했다 더라. 내가 자기한테 돈 빌린 사실도 얘기하고. 씁쓸하더라. 그런데 나는 그 놈이 이상해. 그 놈이 왜 나한테 돈을 빌려줬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어릴 때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무슨 이유로 찾아와서 친한 척 했는지. 정말로 돈을 빌려줬는지 정말 의문이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흔적이 없어. 퇴원하고 이런 일도 있었어. 그 놈하고 친하게 지낸 후배가 있었는데 그 놈도 내한테 돈을 빌려줬다고 달라고 해서 바로 갚아주고는 언제, 어떻게 빌려줬는지 물었는데 그 후로 내한테 연락을 끊어버렸어. 그래서 그 놈에게 그 얘기를 했어. 몇 푼 되지도 않는 액수가 똑 같더라. 둘이서 종종 만난다고 해서 두 놈 다 돈을 빌려 준 증거를 가지고 오라 했더니 그 놈도 요즘 내한테 연락을 안 해. 우습지? 허허허!”
“그 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맞지? 영식이 회사에 다니는 그 새끼! 내가 안다면 그 놈 밖에 없어. 어느 한 구석이라도 자기보다 못하면 바로 무시하고 매장해버리는 그 놈. 자기보다 잘 낫다 싶으면 거기 붙어 있다가 아니다 싶으면 거기도 매장 해버리는 그 놈 맞지? 그런데 그 놈이 왜 너한테 붙었어? 아무짝에, 별 볼일도 없는 놈한테. 이상하네! 이름이 뭐더라?”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 놈 이름을 몰랐는데 그 돈 때문에 알았어. 김성은이라고 들었어. 부동산하는 친구 있지. 그 친구가 그러더라”
“그래! 잘 알지. 그 친구도 그 애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들었는데… 허허허”
“허허허. 같은 생각이지? 잘난 놈 옆에 붙어 있고 싶어하는 그런 놈! 맞지?”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네가 잘 낫냐? 너는 가끔 그런 널 추켜세우는 그런 과대 망상 증에 걸린 것 같을 때가 있어. 아프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아프고 난 뒤에 그런 증상이 자주 보여”
“그렇게 꼭 꼬집어 말해야 속이 시원해? 그냥 발버둥친다고 여기며 그냥 넘어가면 안되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맞아. 그때 그 병으로 홀딱 망하고 난 뒤에 또 아팠어. 그땐 담낭염인데 지인은 물론이고 집안에도 알리지 않았어. 사람들은 내가 아프다고 하면 모두가 내 탓이라고 돌리며 비판을 하고 그 말을 듣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아픈 놈이 무슨 술을 마시냐? 담배는 왜 피냐? 스트레스 받지 마라!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잖아.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또 아팠다니? 왜 말을 안 했어?”
깜짝 놀라서 말을 막았다. 그리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노려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몰아 내쉬었다. 땅이 내리 앉을 정도의 한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는데, 그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 영철은 전혀 몰랐는데도 자기가 알면서도 병문안을 오지 않은 것처럼 죄지은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까짓 병문안이 뭐라고... 하는 생각을 가졌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계속 하던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