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무슨 일보다 그 사람들이 연봉이 높다 보니까 그 회사에 용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돈의 기준에서 아래로 보기 때문에 생겨났죠. 그리고 퇴사하면 나도 너 정도의 일은 꿰뚫고 있다는 오만도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누님은 경험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이 일을 이 십 넘게 하면서도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잊어 버렸다는 거에요. 분명히 밥 먹듯이 한 일인데도 몇 달 만에 하면 허둥대더라 구요. 이 일을 갓 배운 신입사원보다 못할 때도 있고요. 방금 통화한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게 딱 이런 경우입니다. 예전에 내가 다했던 일이다. 아무 문제 없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현장을 다니겠냐? 직원들 컨트롤만 하면 되지.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럼 그 사람이 원하는 건 자리만 지키겠다는 말이네”
“그것도 아닙니다. 영업을 다니겠다는 말이죠. 회사 카드 들고”
“에이! 요즘 그런 데가 어디 있어?”
“못 믿겠으면 오늘 댁에 가셔서 부군에게 물어보세요. 허허”
식당에는 벌써 근식과 정미가 딱 붙어 앉아 소곤대고 있었다.
“와! 정미 누님! 요즘 뭐 좋은 걸 드시기래 얼굴이 아가씨처럼 변했어요. 어! 근식이 너는 얼굴이 왜 이래? 누가 네 기력을 다 뺐어 갔어?”
음흉한 눈으로 정미를 비꼬듯이 앉을 때까지 쳐다본다.
“너! 눈 돌려. 목소리도 낮추고”
“요즘은 자기 피알 시대잖아요. 누님이 못하는 걸 제가 나서서 광고를 해주면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 어디 씨~~ 아니지! 품격 없게 눈부터 흘겨요? 그나저나 지현아!”
얼른 실언을 무마하려고 지현이를 쳐다보면서 정미 눈을 피했다.
“뭐? 방금 하고 싶어했던 말 끝까지 마무리부터 해. 씨~~ 다음이 뭐야? 너! 시건방지게! 이 말하려고 했지?”
입술을 악 물고 노려보고 있었다. 방우가 시치미를 뚝 떼면서 정미 속을 한번 더 끌었다.
“먼저 왔으면 저놈 저거 좀 직접 먹이지. 그렇잖아도 지현이 시어머니처럼 보이는데 며느리만 계속 고기를 굽게 하니까 보기가 안 좋아서 그렇죠. 애가 못 보던 사이에 얼굴이 팍삭 갔네. 이제 재수씨한테 멀어질 때도 안됐냐?”
그때 지현이가 시원을 쳐다보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방우 앞 접시에 익은 고기를 올려 놓는다.
“어머님! 저는 괜찮아요. 아드님 많이 먹여요. 요즘 너무 비실비실해요. 밖에서 도대체 뭘 하고 다는 지”
시원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현을 한번 보고는 고개를 정미에게 향했다.
“내가 왜? 정미가 줘야지. 제가 기를 다 뺏어갔잖아. 왜 나를 보고 얘기해. 호호호”
지현이가 쌈을 싸 방우 입에 넣으려는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야? 저 놈을 저렇게 만든 게 누님이었어요? 좀 적당히 다루지. 저래가지고 걷기나 하겠어요?”
정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 근식아! 물! 누님 얼굴에 불똥 튄 것 같다. 빨리 꺼라”
정미가 인상을 찌푸려 방우를 노려보지만 방우가 긴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대로 뿌듯한 성취감 같은 걸 내세워 하는 것처럼 도도해 보이기도 했다. 방우를 복희로 착각한 것 같았다. 아님 방송을 해달라는 의미일 지도 모른다.
남자 둘이 여자 넷이서 만났던 나이트클럽에서와 달리 오늘은 조금 어색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다는 걸 시원은 느끼고 있었다. 그때는 그래도 호기심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생동감은 있었다. 그때 방우는 아예 합석도 하지 않고 다른 여자들과 춤을 추는데 정신이 팔려 있어도 오늘만큼 불편하지도 않았다. 차에서 새끼라고 한 사람에 대해 시원시원하게 욕을 할 때 조금은 불안 헸지만 이 자리까지 그 여파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측을 하지 못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과묵했는지 궁금해 지현에게 물어보려고 하다가 물어 볼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척거리더니 또 밖으로 나갔다.
“지현아! 제 원래 저렇게 말이 없었어?”
지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크게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우가 끼어 들었다.
“누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 놈 몸에 엔도르핀은 딱 5분밖에 효력이 없어요. 지금부터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잘 마시는 불상이라 생각하고 술잔만 채워주면 됩니다”
지현이도 거들었다.
“언니! 말 걸지 말고 가만히 놔두세요. 제 입 열기 시작하면 우리 전부 자야 합니다. 했던 말 또 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애에요. 자기가 귀찮은데 듣는 사람은 어떻겠어요. 옆에 있어도 없는 사람과 똑같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지난번에 말을 잘 하던데. 이해가 되지 않네”
숙이와 만났을 때가 떠올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때는 확실한 주제가 있으니 말을 했죠. 지금은 주제가 없잖아요. 그냥 한잔하는 자리잖아요”
“한잔하러 왔다고 술만 마셔?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도 하는 거지”
근식이가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누님! 저 친구는 구분을 확실히 합니다. 술 자리는 술만 마시는 자리. 대화하는 자리는 대화만. 뭐 그렇게 나름대로 구분을 해놓고 사는 친구입니다”
“예! 언니! 우리는 적응이 돼 그러려니 하지만 언니는 이상할 수 있어요. 적응이 되면 오히려 더 편해요. 제가 우울하고 적적할 때 가끔 같이 한잔하면 제가 입을 열기 전에는 절대 말을 안 겁니다. 혼자 한잔하고 싶을 때 같이 오면 오히려 더 편해요. 특히 우리 여자들은 혼자 술을 마시러 오고 싶어도 주변이 의식돼 못 오잖아요. 그땐 저놈이 최고에요”
“이해가 안되네. 한마디도 안 할 때도 있어?”
“당연하죠. 언니도 필요하면 부르세요. 그냥 수행 비서 하나 뒀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수행 비서는 어디 갔어. 나간 지 오래 됐는데”
시원이가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현이와 근식이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미도 이런 분위기가 어색한지 시원을 멀뚱히 보면서 머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방우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헛웃음을 치면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전혀 몰라! 언제 전화 왔던데?”
방우가 입술을 다물고 비스듬히 올려 웃으며 계속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친구야! 지난번에도 얘기했잖아. 너희 회사에 일을 하면 한 달에 삼백 만원 정도인데 차 포 떼고 나면 뭐 시무실비 정도밖에 안 남아. 그 남는 돈도 담당자와 소주라고 한잔해야지. 만약에 골프라도 치면 자칫 잘못하면 마이너스야. 그런데 어떻게 직원을 들여서 일을 하겠어. 내 생각엔 전부 그 사람 생각인 것 같은 데 관심 끊자. 너한테 피해주기도 싫다. 조용히 전무라도 달고 나와야지. 안 그래? 허허”
통화를 마친 방우가 시원이 옆에 앉아 소주를 한꺼번에 들이키고는 다시 잔을 채우려고 할 때 시원이가 소주병을 잡으려고 했지만 빙긋이 웃으며 자기가 따른다는 의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