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
담임이 교탁을 손으로 쳤다.
“방학 동안 공부 열심히들 했냐?”
아니요 하는 소리가 네 하는 소리에 묻혔다. 아이들이 킥킥 웃었다. 담임은 한숨을 지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모두 운동장으로!”
담임의 말에 아이들은 운동장의 이 학년 대열에 합류했다. 교장의 훈화는 언제나처럼 끔찍하게 지루했다. 재성은 친구들의 빈자리가 허전했다. 수민이도 없고 도아도 없었다. 단상에서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아이들이 우르르 자기 교실 쪽으로 흩어졌다. 그 틈에 섞인 재성은 자신을 기점으로 퍼져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수업 시간에 그는 수민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쉬는 시간에는 도아의 의자를 빼서 거기에 앉아 보았다. 차가웠다. 잠시 후 그는 자기 자리로 갔고, 방금까지 앉았던 도아의 의자에 손을 댔다. 마치 방금까지도 도아가 앉아 있었던 것처럼 따뜻했다.
“스무 살밖에 안 됐대. 살인범 말이야.”
“우리 학교 근처에서도 피해자를 물색했더라. 우리 중에 누가 표적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동권이 형이 살아날 줄은 몰랐어.”
화수는 경찰에 붙잡혔다. 동권의 증언 때문이었다. 동권이 병원에서 깬 건 보름 전이었다. 그가 의식을 되찾고 처음 한 소리가 살려줘 였다고 했다. 경찰이 급파되었고, 최면술사까지 등장했다. 기어이 동권은 기억 속 악마의 정체를 기억해 냈다. 화수는 밤길을 걷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에 잡혔다. 잭나이프를 꺼냈지만 반항을 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을 그었다. 치명상은 피했다. 그는 현재도 병원에 있고 치료가 끝이 나면 경찰에 인계될 것이다.
재성은 도아를 생각했다. 그날 이후 도아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통화는 했다. 도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하지만 재성은 그 속에서 고독을 엿보았다. 도아는 집에서 은거하고 있다고 했다.
“재성아 그런데 도아는 왜 학교에 안 나와?”
여학생이 말했다. 새삼 재성은 많은 게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아의 신변이 궁금한 사람들이 찾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나올 거야.”
재성이 자신 없이 말했다.
“뭐래?”
다른 여학생이 물었다.
“나올 거래.”
여학생들은 자기 자리로 가서 재잘거렸다. 수다에는 수민이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민은 가출을 한 거라고 여겨졌다. 그녀의 부모는 지금도 그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재성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한 방울의 이슬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녀는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그것은 배키라는 괴물에 의해서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너무 슬퍼서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도아 넌 슬프지 않니?”
그가 물었었다.
도아는 나쁜 기색 하나 없이, 글쎄라고 대답을 했다. 다른 사람과 비례해 감정 하나가 없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보발의 죽음에 크게 노하던 그였다. 그도 분명 수민의 죽음을 슬퍼했을 거란 게 재성의 생각이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재성은 창가로 다가갔다. 교실에는 혼자만 남아 있었다. 그는 어지럽게 놓여 있는 의자들을 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이 서로 밥을 일찍 먹겠다고 뛰고 있었다. 그는 밥 생각이 없었다. 배가 고프면 수돗가에 가서 물을 마실 생각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도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저쪽에서 전화를 받았다.
“재성이니?”
“뭐 하고 있어?”
“그냥. 넌.”
“벌써 잊은 거야? 지금 점심시간이잖아.”
“그래, 점심시간이겠구나.”
“내일은 학교에 나올 거지?”
“모르겠어.”
“나왔으면 좋겠어.”
“나도.”
도아의 말에 재성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너도 학교에 나오고 싶다고?”
“아마도.”
“나오는 거야, 알았지?”
“생각해 보고.”
도아가 뭔가를 마시는 소리가 났다. 재성의 생각을 알았는지 저쪽에서 말했다.
“지금 커피 마시고 있어. 보발이 해 준 것만큼 못하지만 맛있네.”
“다행이다.”
“뭐가?”
도아가 신경질을 섞어 웃었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지 마.”
도아가 경고하듯 말했다.
“학교에 와, 알았지?”
“생각해 본다니까.”
하지만 다음 날에도 도아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그리고 다음 날에도 도아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한날 밤이었다. 누군가 반지하의 방문을 두드렸다. 재성은 밥을 보리차에 말아 김치와 먹는 중이었다. 문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도아였다.
“도아야?”
“오랜만이지?”
“들어와.”
“나가자.”
둘은 여중학교로 향했다. 교문은 열려 있었다. 교실 몇 개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재성은 그네에 앉았고 도아는 그넷줄을 잡고 서 있었다.
“재성아 넌 할머니가 보고 싶지 않아?”
“가끔은 보고 싶어.”
“가끔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잃고 있어. 좋은 분이셨고 그녀를 정말 사랑했지만 그렇게 되고 있어.”
“이해는 돼.”
“수민이는…….”
재성은 입을 닫았다.
“불쌍한 아이야.”
도아가 말했다.
“정말 불쌍해.”
“보발도.”
“진짜 너무 불쌍해.”
“시간이 계속 가고 있어.”
“여름 방학이 금방 끝난 것처럼.”
“너도 곧 어른이 되겠지. 결국 다 잃게 될 거야. 추억이라는 이름만 남는 거야. 하지만 나는 어른이 되지 않아. 영원히 소년으로 살 거야. 그렇담 그들에 대한 기억도 그렇게 되겠지.”
“아니, 너도 나처럼 될 거야. 보통 사람처럼 사는 거야. 영원히 고통받게 둘 수 없어.”
“고통은 아니야.”
“아니, 고통이야. 아픈 기억을 잊지 못한다면 끔찍한 고문이라고. 그들을 잃는 게 아니야. 하지만 잊지 않을 수도 없어. 안 그럼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을 가하게 되는 일일 거야.”
“재성이 네 말이 맞을 수도 있겠네.”
“역시 너도 수민이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럴 줄 알았어.”
재성은 진짜 기뻤다.
“그럴 지도.”
“도아야?”
“그래.”
“너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
“재밌네.”
“네 수발을 들지라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 더 많은 걸 너와 함께 즐기고 싶어.”
“그런 말을 듣게 될지는 몰랐는걸.”
“보발은 널 도련님이라 불렀지.”
“그래.”
“나도 그렇게 해도 될까?”
재성의 말에 도아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도아가 잡은 그넷줄이 출렁거렸다. 그는 그네에 앉았다. 그네가 가볍게 움직였다.
“왜지?”
“말했잖아. 너와 함께이고 싶다고.”
“끔찍한 생활일 지도 모르는데?”
“보발도 해냈잖아.”
“오백 년이 넘도록 해냈지.”
“나도 오십 년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것도 긴 세월이야.”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야.”
“오십 년이라고 했잖아?”
“대충 계산을 한 거야.”
“그래.”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어. 늘 가난하게 살았고 또 가난하게 살아갈 거야. 그런 내가 마음 둘 곳을 찾았어. 그게 바로 네 곁이야.”
재성이 힘 있게 말했다.
“재성아.”
“응?”
“우선은.”
“응.”
“그네나 타자.”
이 교시가 끝나 갈 때쯤 뒷문이 스르륵 열리고 도아가 들어왔다. 국어 교사는 교과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고 도아는 가방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의 도아 곁으로 몰려들었다.
“얘, 얘, 도아 얼굴 좀 봐.”
“도아 너 더 잘생겨졌다.”
재성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해졌다. 도아는 언제나 인기 많은 아이였다. 점심시간에 도아와 재성은 운동장을 나섰다. 사 교시부터 교실이 소란해졌던 것이다.
“저거 독수리 아니야?”
교사가 경고를 해도 아이들은 막무가내였다. 독수리가 반대편 건물 옥상에 내려앉은 탓이었다. 재성은 그것이 벨즈인 줄 알았다. 벨즈는 혼자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민경이 교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벨즈가 당신을 완전히 좋아하는군요.”
도아가 말했다. 벨즈는 사방에서 사진을 찍는 줄도 모르고 하늘을 빙빙 돌고 있었다. 어쩌면, 즐기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요.”
“충분히 했어요.”
재성이 말했다.
“근데 학교는 어떻게?”
도아가 물었다.
“그냥.”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벨즈 짓이군요. 그렇죠?”
“네, 사실이에요.”
“놀랍군요. 벨즈의 말을 알아듣는 인간이라니.”
“저도요.”
그녀가 도아의 눈길을 피했다.
“혹시 시간 되면 오늘 저녁…….”
도아가 얼른 말하는 바람에 그녀의 말이 끊겼다. 도아는 재성의 손을 잡고 있었다.
“되고말고요.”
막 도아와 재성이 민경과 만나기로 한 음식점에 들어가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미온이었다.
“어, 약속이 있어서. 아니야. 아니야. 그래, 알았어.”
도아가 전화를 끊었다.
“별장에 못 오게 한 것 때문에 아직도 삐져 있어. 귀여운 녀석이야.”
“사정을 듣고 나면 별장에 안 온 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텐데.”
재성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음식점에서 민경과 만난 그들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음식점에서 나온 뒤 가까운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갔다.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아가 계산을 했고, 거기서도 셋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다가 늦은 밤에 헤어졌다.
“재성아,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가도 돼?”
뜻밖의 말이라 재성은 조금 놀랐다. 솔직히 재성은 도아가 자신의 집을 불결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도아는 부자였고 귀티나 나는 아이였다. 활기차고 냉소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아이였다. 반면에 자신은 곰팡이와 함께 사는 반지하 인생이라며 줄곧 자괴감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불편한 밤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나란히 누웠다.
“비좁지?”
재성이 말했다.
“별로. 사실 약간.”
도아의 말에 재성이 키득거렸다.
“편하다.”
도아가 다리를 쭉 뻗었다.
“시간이란 거 되게 빠른 거 같다.”
“맞아, 재성아.”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가.”
“그래? 시간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니네.”
“못 이기겠다니까, 도아 너는.”
“별이 많다.”
“별?”
재성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풀벌레가 울었다. 곧 재성은 의미를 찾아냈다. 낮은 천장에 별 모양의 빛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별이 반짝이기도 했고 별똥별이 떨어지기도 했다. 달도 있었다.
“도아야……?”
“말해.”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
“내게도 귀신이 붙겠군.”
“진지하게 들어줘. 농담이 아니야.”
“이 집에서 나갈 수 있겠어?”
“으……, 응. 나갈 수 있을 거 같아.”
“같다라고 하면 안 돼. 나갈 수 있어야지.”
“나갈 거야.”
“우리 집에 가자.”
“좋아, 갈 거야.”
“도련님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어.”
“넌 도아니까. 하도아.”
“그래.”
도아가 벌떡 일어났다.
“도아야, 왜 그래?”
“잠이 안 와. 산책 가자. 네가 사는 동네를 두루 살펴보는 거야. 우린 이제 한집에 살 테니 여기는 추억으로만 가지고 있어야 해. 기억을 남기고 가는 거야. 늦은 밤이야. 사람도 별로 없을 거야. 도시만 있어. 우리만 있을 거야.”
“그래, 도아야.”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대문을 열고서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두 아이는 손을 잡은 채 웃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