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는 낮 열한 시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다. 잠에서 깼을 때는 미세한 두통을 느꼈다. 아스피린 한 알을 물과 함께 삼킨 그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보경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는 답장을 했다. 그녀와의 사이는 며칠 사이 금세 회복된 것 같았다. 이제 그녀를 피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는 이를 닦고 외출을 했다. 버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도착지에서 내린 그는 공기부터 들이마셨다. 다를 것 없는 도시의 공기가 왠지 상쾌하게 느껴졌다. 호주머니에 칼이 없어서 허전했다. 그는 동전만 딸랑거리다가 손을 뺐다. 그는 카페로 향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약속 시간이 이십 분이나 남았다.
그는 벽을 등진 구석 자리를 택했다. 미리 화장실에서 얼굴 상태를 확인했다. 세수를 하고 난 뒤인데도 눈곱이 껴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니까. 그는 종이 냅킨을 뜯으며 무료함을 달래는 중이었다. 별난 상념이 들었다. 그가 찢고 있는 냅킨은 사실 에드 게인의 집 안에 있는 안면 가면이었다. 시체의 얼굴에서 뜯어낸 인피.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지는 미라화 된 갈색의 피부 결을 느꼈다. 일종의 육포였다.
카페에 들어선 여자 친구를 확인한 순간 화수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찢은 것을 옆으로 밀어냈다.
“보경아, 왔어?”
그는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 들이고 온 보경을 힐끔 보며 일어나 주문을 했다. 그녀는 아메리카노였고 그는 라떼였다. 그는 따뜻한 종이컵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빨대를 살짝 물었다. 무진장 뜨거웠다.
왠지 그녀의 표정이 어두웠다.
“안 좋은 일 있어?”
그가 여친의 안색을 적극적으로 살피며 물었다.
“일은 무슨…….”
“어제는 잠이 안 와서 혼났어. 계속 잡생각이 드는 거 있지. 나도 대학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라고. 캠퍼스 생활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는 웃음을 섞어 말했지만 그녀는 일없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보경아, 대학 생활 어때? 재밌어?”
“그냥 그렇지 뭐.”
“그래?”
“공부하려고 다니는 거지 재미로 다니는 게 아니잖아.”
그녀의 쌀쌀맞은 태도.
“그야 그렇지만. 재밌으면 더 좋잖아.”
“좋은 친구는 많아.”
“교수는 어떻고?”
“교수님은…….”
“냄새나 풀풀 풍기겠지.”
그는 자신이 말해놓고 웃었다.
그녀의 가방은 옆에 있었다.
그는 찢어 놓은 냅킨을 한주먹에 쥐어 플라스틱 쟁반에 올렸다. 그리고 쟁반에 있던 새 냅킨을 두 장 빼서 컵 옆에 놓았다.
“자기.”
그녀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왜?”
“나랑 연락 안 하고 지냈잖아. 어땠어?”
“갑자기 그런 질문이 어딨어?”
그가 웃음으로 무마했다.
“궁금해, 난.”
“네 생각 많이 했지.”
“그래놓고 내 연락을 무시했어?”
“무시라기보다는 그 뭐냐, 무시는 아니었어. 너 왜 그래?”
“나 있잖아.”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참았다. 그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순간 그는 불안했다. 저쪽에 모인 여대생들이 그의 기분도 모르고 꺄르르 웃었다. 노트북으로 주식 동향을 살피던 한쪽에서는 좌절한 채 머리를 감쌌다. 화장실에서 손을 털고 나오는 중년 남자는 닦다만 휴지를 뒤 허리에 길게 매달고 있었다. 단순한 캡처 사진만으로도 야동 품번을 줄줄 읊으리만치 휴지 끈이 긴 남자가 아닌가.
“오늘은 이만 가볼게.”
그녀가 일어나더니 가방을 낚아챘다. 그녀의 냉랭함에 두려움을 느낀 그는 바로 뒤따랐다.
“보경아, 왜? 뭐 때문에 그러는데?”
그는 여친과 걸음걸이를 맞추며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가방을 뺏어서 자신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집까지 데려다줄게.”
그녀의 집까지 가는 동안 둘은 몇 마디 나누지 않았다.
“잘 들어가.”
“고마웠어.”
그녀가 말하는 타이밍에 대문이 찌잉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빨간 벽돌로 된 이 층 단독 주택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녀의 말과 행동 그리고 표정을 머릿속으로 되감아 보았다. 손끝에서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신경질적으로 동전을 짤랑거렸다.
그날 새벽녘까지 그는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잊고 자려고 했지만 웬걸 잠도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는 한 시간이 넘게 뒤척이다가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방 안을 서성이면서 핸드폰을 보았다. 연락이 오지 않은 걸 뻔히 아는데도 굳이 확인을 해야 했다.
그는 잭나이프를 들었다. 씨발, 윽윽거리며 허공에 대고 난자했다. 혀가 닭장에 갇힌 미친개처럼 닫힌 입속에서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부딪혔다. 그는 팔을 크게 휘두른 뒤 앞발로 미는 흉내를 냈다. 골반에서 다리 관절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열이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꺼냈다. 그리고 칼로 갈기갈기 찢었다. 이건 사람의 얼굴이었다. 칼을 주먹으로 잡은 그는 미친 듯이 그었다. 얼굴 뼈가 드러났다. 그가 윗니를 크게 꺼내며 크크 웃음소리를 냈다. 행위를 멈췄을 때는 청소가 필요할 만큼 집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는 찬물로 샤워를 하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방한가운데에 섰다. 욕이 나왔다.
-보경아 자니?
그가 새벽녘에 보낸 메시지였다.
-보경아 뭐해?
아침에 보낸 메시지였다.
-보경아 무슨 일 있어?
정오 무렵에 보낸 메시지였다.
-보경아 답장 좀 해.
두 시간 뒤에 보낸 메시지였다.
-백보경 답장 좀 하라고.
해가 질 무렵에 보낸 메시지였다.
그는 변기 앞에서 거의 씩씩거렸다. 소변이 마려워서 지퍼를 내렸는데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방광에 오줌이 찬 느낌은 있는데 망할 것이 줄기를 따라 나오질 않았다. 그는 성기를 확 잡았다. 목을. 사람의 목이었다. 그는 생각을 떨쳐냈다. 왜냐면 보경의 것이라서였다. 오줌을 누고 나온 그는 물에 젖은 손을 보았다. 보경의 목을 졸랐다. 비록 망상일 뿐이지만 그는 연인의 목숨까지 탐했던 것이다.
-보경아 내일 시간 돼?
답장은 없었다.
그는 잠시 누워만 있으려고 했는데 잠이 들었고 자정이 가까웠을 때 잠에서 깼다. 잠은 더 오지 않았다. 그는 핸드폰을 확인한 뒤 의자에 앉아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는 책을 꺼내 북북 찢어서 입에 넣고 씹었다. 늘어진 침이 반짝거렸다. 침이 묻은 것을 쓰레기통에 뱉었다.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그는 불안하게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 칼이 그를 불렀다. 그는 부엌 쪽을 보았다. 그쪽이 아니라고 칼이 말했다. 선반에 헝겊으로 싸놓은 칼, 잭나이프였다.
‘그래, 성능은 몰라도 사용하기엔 부엌칼은 너무 커.’
그는 얼굴을 가릴 수 있게 후드 티셔츠를 입고 마스크를 챙겼다. 모자도 있으면 좋았다. 마크 없는 모자 위에 후드를 덧쓰면 설령 CCTV에 찍혀도 그 흐릿한 영상으로는 인상을 파악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잘 안 입는 바지를 옷장에서 꺼냈다. 바지 역시 어두운색 계통이었다. 그는 잭나이프의 칼날을 한 번 꺼내보고는 접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바깥에서 그는 무작정 걸었다. 운동화가 발에 꽉 끼어서 아팠다. 신발장에 처박혀 있던 갈색 운동화였다. 그는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살집 많은 회사원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회사원은 담배를 사면서 웬일인지 알바생과 승강이를 벌였다. 회사원이 욕을 하며 편의점을 나왔다. 목소리가 더럽게 컸다. 멀대처럼 키가 큰 장발의 알바생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화수는 회사원의 걸음걸이를 눈여겨보았다. 술에 취한 건 아니었다. 욕심 많게 생긴 회사원은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라이터 불을 붙였다. 칙칙한 입술이 나와 담배 연기를 뱉어내는 것이 참으로 보기 흉했다. 화수는 바지에 손을 넣었다. 엄지가 버튼 위에 가 있었다. 누르면 나오고, 큰 변동 사항이 없다면 회사원의 물컹한 몸뚱어리에 박힐 것이다.
화수는 길가에 주차된 차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차창을 통해 회사원을 감시했다. 회사원은 어디 갈 생각이 없는 듯한 자세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물었다. 곧 화수는 그 이유를 알았다. 회사원 앞에 차 한 대가 섰고, 여자가 타고 있었다. 회사원은 차 문에 손을 갖다 댔다.
“안 열려. 안 열린다고.”
차에 탄 회사원은 운전석의 여자와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다가 서로 안았다. 차가 출발했다. 화수도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격자가 있나 해서였다. 살인자까지는 오버지만, 차 털이범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그는 또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 발길이 멈춘 곳은 노래방 건물 앞이었다. 이 층 계단에 불이 켜져 있고 사십대로 보이는 남자 몇이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 동네 양반들은 완전 전투민족이었다. 다시 보니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 끌지 말라고.’
이 층 불이 꺼졌다. 화수는 한 걸음씩 물러섰다. 한순간 가로등 불빛에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뒤로 더 물러났다. 남자 셋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하나는 다시 들어갔다. 남자 둘은 어깨동무를 한 상태로 비틀거렸다. 곧 택시가 왔고 그들을 태워갔다.
화수는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코 밑을 간질였다. 마스크를 다시 올려 쓰고 모자챙을 정돈했다. 몇 번 그는 멈췄지만 그때마다 훼방을 놓는 인물이 있었다. 헛걸음만 한 채 그는 계속 밤거리를 도보했다.
“간다니까, 가! 지금 집에 간다니까 그러네!”
사십대 중후반의 남자가 핸드폰에 대고 외쳤다.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넥타이는 방금 끌러서 재킷 안에 넣었다. 제대로 넣지 않은 것인지 몸을 움직이자 흘렀다. 남자는 전화를 끊고 동료를 향해 실실댔다. 화수가 자세히 본바 동료는 여자였다. 머리가 남자처럼 짧아서 화수의 입장에서는 헷갈렸던 것이다.
“벌써 들어가게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비교적 젊었다. 삼십대 초반 정도였다. 입술이 붉었다. 눈 화장이 진했다. 그런 것이 점점 화수의 눈에 들어왔다.
“진짜 피곤한 여편네라니깐!”
“어머!”
“우리 마누라 말이야. 미련해가지고 꼴도 보기 싫은 데, 그걸 확! 나도 우리 미영이만 보고 살고 싶단 말이야. 우리 미영이만.”
화수는 딸의 이름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해를 했다는 건 금방 파악했다. 여자가 대리기사를 부르려고 했지만 남자가 자꾸 만류했다.
“대리 필요 없어! 딱 열 발이면 집이야! 나는 내 차 운전대를 아무한테 안 맡기는 성미거든. 당신도 알잖아?”
순간 화수의 머릿속에 불이 들었다. 저 남자! PC방 화장실에서 곤죽이 되어 퍼질러 자던 그 회사원이었다. 그는 전율을 느꼈다. 좋았다. 아주 설렜다. 문득 영화 《데스티네이션》이 생각났다. 설령 운 좋게 죽음을 피해도 일시적인 것일 뿐 운명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은 속속들이 죽어 나간다.
너처럼.
남자가 스마트키를 누르자 삑삑 소리가 나며 차에 불이 들어왔다가 꺼졌다. 순간 화수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차는 남녀의 뒤쪽 십 미터 거리에 있었다. 그는 문을 열고 차 뒤에 탔다. 발을 두는 공간에 납작 엎드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열 발이면 간다, 열 발이면!”
“오빠 안 되겠어요. 제가 운전할게요.”
화수의 예상과 어긋나는 상황이었다. 그는 숨죽이며 바닥에 바짝 붙었다. 조수석에서 한 타이밍 늦게 문이 닫혔다.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남자가 차창을 열고 트림을 했다. 그리고는 웃었다.
‘오바이트 했다고 해도 믿겠다, 씹.’ 화수가 생각했다.
“담배 좀 피워야겠어.”
“그러세요.”
차가 움직였다.
남자는 담배 연기를 머금었다가 뿜어냈다. 다른 손으로는 여자의 허벅지를 짝짝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하지 마요.”
“뭐 어때서.”
남자가 능청맞게 말하며 눈썹 문신을 한 한쪽 눈썹을 올렸다. 여자는 한쪽 눈썹에만 쌍꺼풀이 있었고 눈이 컸다.
“난 당신이 좋아.”
“저도 오빠가 좋아요.”
“같이 살 수 없을까?”
“그런 말 마세요.”
“마누라하고는 이혼하면 되니까.”
그녀는 말이 없었다.
“오빠.”
“왜?”
우아하게 도로를 가로지르던 길고양이가 불빛에 놀라서 도망쳤다. 그녀도 브레이크를 밟으려던 동작을 멈췄다.
“왜? 왜?”
남자는 솔직히 여자가 돈 이야기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이런 관계라면 으레 진행되는 수순이었다. 일명 공사 친다라는 용어일 것이다. 결국 돈 때문에 이 망할 년이 접근했던 것이다. 남자는 술이 약간 깼다. 되새김질하듯 머금었던 담배 연기를 후 내뱉었다. 꽁초를 밖에 던졌다. 바람을 타고 후르르 날아갔다.
“우리 관계 다시 생각해요. 더 이상 안 되겠어요, 전.”
“뭐엇?”
남자는 거의 뛰어오를 뻔했다.
‘뭐야? 이거?’ 화수는 눈을 찌푸렸다. 순간 자신의 처지를 연상한 것이다. 보경이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이 비슷한 뉘앙스를 준 건 사실이었다. 그는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소리를 내어 웃을 뻔했다.
“저도 결혼을 해야죠. 오빠도 가정에 충실해야 해요.”
“야, 차 세워!”
“오빠…….”
“세우라고 쒸뻘년아!”
차가 섰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헤어지자 이거 아니야?”
“오빠 우린…….”
핸들을 양손으로 잡고 있던 여자는 불시에 날아든 주먹에 얼굴을 맞아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쒸뻘년거리며 연신 손을 휘둘렀다. 뺨을 맞은 여자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여자는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남자는 방어하는 여자의 손을 쳐내고 마누라를 팰 때 주무기로 사용하는 소나기 펀치를 먹였다.
“쒸뻘년아! 개씨빨! 너 진짜 죽고 싶냐?”
남자는 손등을 긁혔다. 여자도 최대한 저항했다. 진정한 의미의 이종격투기였다.
‘뭐하는 짓들이야?’ 화수는 발을 꼼지락거렸다. 다리가 저렸다. 문을 열고 나가버릴까 하고 잠깐 혹한 게 사실이었다.
“그만해! 그만해요!”
여자의 입술이 깨졌다. 남자가 숨을 돌리는 틈에 여자가 운전석 문을 열고 탈출했다. 남자가 술에 취한 게 여자에겐 크나큰 어드벤티지였다. 남자가 몸을 던져 여자의 다리를 잡아챘다가 놓쳤다. 여자는 갑자기 마음이 변했는지 하이힐을 벗어 남자의 머리를 때려댔다. 남자는 죽겠다고 악다구니를 썼고 여자는 훨훨 날아갔다. 씩씩거리던 남자가 차에서 내리려다가 제풀에 넘어졌다.
‘가지가지 한다.’ 화수의 눈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다리에서 쥐가 나는 게, 일어나고 싶었다.
남자는 푸푸 거리며 일어나 양쪽 허리에 손을 올렸다.
“쒸뻘년아! 넌 절대 나하고 못 헤어져! 내가 이대로 끝낼 것, 끄억! 네 직장에 네 집구석에 다 소문내 버릴 거야! 유부남하고, 꺼억, 붙어먹은 년이!”
말을 끝낸 남자는 잠시 조용하다가 다시 트림을 꺼억 했다. 그것만으론 만족을 못 했는지 가래를 끌어모아 캬악 퉤 뱉고는 그 자리에서 오줌까지 누었다. 그리고 잠시 밖을 배회하다가 운전석에 들어와 앉았다.
벨 소리가 작정하고 계속되자 남자는 핸드폰에 대고 소리쳤다.
“아, 간다니까 그러네. 열 발만에 갈게!”
전화를 끊은 남자는 혼잣말을 두서없이 하다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몇 번 차가 덜컹거리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가 멈췄다가를 하다가 이윽고 정상적으로 움직였다. 화수는 아파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칼을 끄집어내려 하다가 놓쳤다. 불편한 자세로 팔만 이용해 주위를 더듬거렸다. 칼이 손에 들어오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화수는 룸미러를 통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도저히 바람을 피울 수 없는 면상이었다. 머리통이 컸고 눈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짧게 친 머리에서 앞머리만 가운데로 몰려서 길었다. 앞에서 하이빔을 킨 승용차가 다가오자 남자가 욕을 했다. 그러다가 뒤에 있는 화수를 발견했다.
“너 뭐야? 뭐야, 이 새끼야!”
“뭐긴.”
남자는 그 뒤에 이어진 화수의 말은 들을 수 없었다. 하이빔을 켠 승용차는 일부러 클랙슨을 길게 울리며 옆으로 획 지나갔다.
“뭐하는 새끼야?”
남자가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다.
“나? 저승사자.”
화수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리고 칼로 남자의 어깻죽지를 찔렀다. 폭 찌르고 푹 찔렀다. 남자가 나 죽는다는 식으로 비명을 질렀고, 칼로 인해 오른쪽 입가가 찢어졌다. 칼의 방향이 잘못 날아든 것이다. 화수는 좌석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남자의 앞가슴에 칼을 두 차례 박아 넣었다. 그 충격에 남자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는 불 꺼진 상가의 쇼윈도를 와장창 깨트리고 그 안에 처박혔다. 하마터면 화수는 크게 다칠 뻔했다. 미리 몸을 빼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는 칼을 회수하기 전에 한 번 더 남자를 깊게 찔렀다. 그리고 어둠과 하나가 되었다.
아, 가뿐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