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다시 잡히면 정말 죽을 거 같았다. 역시 반격은 몸이 두 배, 아니 세 배쯤 자랐을 때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 이 자리에서 살아남으려면 길은 한 가지 길뿐이었다. 삼십육계 줄행랑!
‘삼십육계가 뭐지?’
그 와중에 이 질문이 떠올랐다.
‘아! 삼십육 마리의 개! 삼십육 마리가 따라오면 정말 무시무시하긴 하겠네.’
배추는 제 나름대로 ‘삼십육계’를 ‘삼십육 개’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게 맞는 거 같았다. 꽁지 빠지게 도망가면서도 그런 결론을 낸 자신이 뿌듯했다.
잠시 그렇게 발이 이끄는 대로 삼십육 걸음쯤 달렸다. 아니 숫자를 알긴 하지만, 아직 못 세니 몇 걸음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한참을 달려 똥개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왔다. 잠시 멈춰 서서 한숨을 돌리고 똥개가 혹시 숨어서 쫓아오나 둘러봤다.
그런데 똥개는 보이지 않았으나 또 다른 문제가 생겨버렸다.
‘여기가 어디야.’
생전 처음 보는 곳에 도착한 배추는 갑자기 몰려드는 두려움에 움직일 수 없었다. 그냥 길 한 가운데서 마음속으로 집사를 부르며 두리번거렸다.
빵!
그때 뒤에서 오던 차가 클랙슨을 크게 울렸다. 깜짝 놀라서 몸이 붕 떴는데 덕분에 길 바깥쪽으로 비킬 수 있었다.
그놈의 똥개 때문에 동물병원은커녕 생전 처음 와본 곳에서 길을 잃었다. 밥 때도 지났고 치열한 전투를 치른 참이어서 배가 많이 고팠다.
게다가 아까 똥개한테 물렸던 뒷덜미가 상처가 났는지 쓰라렸다. 엄마가 물고 이리저리 옮길 땐 하나도 안 아프던 곳이었는데 똥개가 무니 아팠다.
배고프고 낯설고 뒷덜미가 아파서 서글픔이 몰려왔다. 왠지 슬퍼서 ‘야아옹’ 하고 길게 울었다. 어쩔 수 없이 이럴 때면 눈물 많은 새끼 고양이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야옹.”
「오빠!」
어디선가 짧은 ‘야옹’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뜻이 배추의 귀에 들어왔다. 누군가 배추를 오빠라 부르는 거였다.
배추는 귀를 쫑긋 세워 주변을 둘러봤다. 잘못 들었나 했는데, 다시 그 소리가 났다. 너무 배가 고파서 헛소리가 자꾸 들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 소리가 진짜였으면 했다.
배추는 짧은 앞발로 귀를 한번 긁어보고 눈물로 흐려진 눈도 닦았다. 그때 다시 ‘오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확실했다.
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갔더니 물건을 많이 쌓아놓고 문을 열어놓은 곳이 나왔다. 그 물건을 보자니 현지가 툭하면 먹으면서 입맛 다시는 저에겐 주지 않는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와! 우리 집 마녀가 이거 보면 여기서 살고 싶어 하겠다.’
배추가 조금 더 다가가자 배추보다 얼굴도 작고 덩치도 작은데 다리가 길어 키가 조금 큰 얼룩무늬 고양이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온몸으로 배추를 반긴다는 표시였다.
「오빠! 오빠!」
「어! 너 동물병원에서 봤던 그 꼬마! 너 이제 말하는구나!」
「응! 나 그 공주! 나 이제 커서 말도 해.」
「너 이름이 공주야?」
「이름이 뭔데?」
「사람들이 널 부를 때 쓰는 거.」
「응!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공주라고 불러. 그래서 나는 이름이 공주야. 근데 공주가 뭔지는 모르겠어.」
순간 배추는 왠지 울분이 차올랐다. 제 이름은 줘도 안 먹는 풀떼기랑 같은 이름인데, 이 꼬맹이의 이름이 공주라니.
그것도 그 고귀한 이름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고양이한테 그런 이름을 준단 말인가! 참 공주 팔자가 상팔자다 싶어 절로 부러웠다.
「너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아?」
「아니. 사람 엄마랑 사람 아빠. 친엄마는 괴물이 잡아먹었어.」
「괴물?」
「응. 저 괴물.」
공주가 지금 지나가는 차를 가리켰다.
‘이 아이의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구나. 하여간에 사람들은 왜 저런 쓸데없는 괴물을 만들어서. 아! 발이 두 개 모자라서 그런가? 그나저나 이 꼬마 안 됐다.’
배추는 위로의 마음을 담아 공주의 얼굴을 핥았다. 그때 배추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오빠, 배고파?」
「어. 좀 그러네.」
「그럼 내 밥 먹어.」
공주가 이끄는 곳으로 가니 집에서 먹던 불린 사료가 나왔다. 현수는 꼬박꼬박 분유에 타서 줬는데 이건 그냥 물에 불려서 고소한 맛은 덜했다. 그러나저러나 따질 수 없으니 일단 그거라도 먹으며 배를 채웠다.
「오빠, 밥 안 먹었어?」
「응. 내가 집을 나왔거든.」
「왜?」
「왜라니! 좁은 집에만 갇혀 있기 답답해서 그랬지.」
「나는 집이 좋은데.」
「그래. 공주 너는 집 나가지 마라. 집 나가면 개고생한다.」
왠지 조금 전 당한 일에 몸도 쑤시고 마음도 쑤셨다. 당장 현수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은근 차오를 거 같았다.
그렇게 지겨웠던 분유에 불려 고소한 맛이 추가된 사료조차 그리웠다. 어쨌든 지금 집까지 어떻게 찾아가느냐가 제일 걱정이었다.
「오빠. 개고생이 뭐야?」
「응? 개들이 집 나가서 하는 고생일걸?」
「어? 옆집 정육점 멍구는 고생 안 하던데. 맨날 나갔다가 밤에 들어와.」
인간들의 말은 어쩌면 이렇게도 거짓말이 많은가. 개는 집 나가도 냄새로 다 찾아올 수 있는데 뭔 고생임? 아! 냄새?
생각해보니 배추의 후각도 개 못지않다는 걸 순간 깨달았다. 현지가 퇴근하고 올 때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알았고, 현수가 방 안에서 방귀를 껴도 방 밖에서 참 구리구리했다.
배추는 새삼 여기는 어디인가, 내 집사의 집은 어디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후각 신경에 초집중을 했다. 코를 벌렁벌렁 킁킁댔는데 얼마 후 다시 울상이 됐다.
‘이놈의 세상엔 냄새가 너무 많다. 내 집사의 집 냄새는 어디에 숨어져 있는 거냐!’
서러움이 복받쳐 다시 ‘이애옹’하고 울었다. 그때 가게 안쪽에서 후덕해 보이는 아저씨가 나왔다. 아무리 봐도 왕으로는 안 보이는데 공주는 그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르면서 얼굴을 남자의 다리에 비볐다.
“어! 공주야. 친구 온 거야? 길냥이 새끼인가? 여보, 이리 나와 봐.”
남자는 공주의 뒷덜미를 쓰다듬으면서 아내를 불렀다. 역시 가게 안쪽에서 남자만큼 오동보동한 아줌마가 나왔다. 아줌마는 배추를 이리저리 보더니 손뼉을 한번 쳤다.
“어! 나 이 냥이 본 적 있어요.”
“어디서?”
“요 앞 동물병원에서. 우리 공주한테 되게 다정했던 냥인데.”
“다른 고양이를 보고 헷갈린 거 아니야? 주인 있는 고양이가 왜 혼자 돌아다녀. 그것도 이런 새끼가.”
“이 고양이 맞아요. 등하고 이마에 무늬도 똑같고, 무엇보다 다리가 짧아서 헷갈릴 수가 없어요.”
“오! 그렇네. 다리가 유난히 짧긴 하네.”
공주의 엄마는 배추가 반가워서 배추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 손이 닿는 순간 따끔해서 앞발로 공주 엄마의 손을 밀었다. 배추의 반응에 공주 엄마는 배추 뒷덜미의 이빨 자국이 살짝 나 있는 걸 바로 발견했다.
“어! 이 야옹이 다쳤네요.”
“어디가?”
“여기 봐요.”
배추가 뒷덜미가 아파서 약간 몸부림을 쳤는데, 공주 엄마는 상처를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 오히려 우악스럽게 잡고 털을 눕혔다.
“진짜네. 가서 호오시딘 좀 가져와 봐.”
“새끼 고양이한테 사람 약 발라줘도 될까요?”
“아, 그런가? 그럼 그 동물병원 데려가 봐. 혹시 그 병원 고양이면 거기 선생이 알아서 하겠지.”
“알았어요. 가게 좀 잘 보고 있어요.”
아줌마는 바로 공주의 이동장을 가지고 나와서 배추를 넣었다. 처음엔 안 들어가려고 했는데, 공주가 들어가서 그냥 따라 들어갔다.
“공주 너는 안 들어가도 되는데. 이리 나와.”
“친구랑 떨어지기 싫은가 본데, 그냥 데려갔다가 와.”
“알았어요. 오, 둘이 들어가니까 꽤 무겁네.”
그렇게 공주와 함께 이동장을 타고 조금 갔다. 아깐 많이 뛴 거 같았는데, 이동장으로 이동하니 정말 얼마 안 되는 거리였다. 조금씩 익숙한 집 냄새도 나는 거 같아서 여기서 내리면 집까지 찾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근데 사람과 말이 통하질 않으니 공주 엄마가 가는 대로 그냥 있었다. 아까 혈투를 벌인 그곳에 가까이 가자 그 똥개의 냄새가 이동장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쫄아서 공주 뒤로 숨었다.
「아! 멍구다!」
「멍구?」
「우리 옆집 정육점 개. 내 친구야.」
멍구는 분명히 아까 배추한테 이를 드러내고 물어서 공중으로 던져버린 사나운 개였다. 근데 공주네 엄마 앞에서 꼬리를 흔들어댔다. 게다가 이동장 안에 공주를 보면서도 좋아서 헥헥댔다.
‘뭐, 저런 이중견(犬)격 개시키가 다 있어!’
멍구가 공주를 보고 좋아하다가 뒤에 배추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갑자기 짖었다. 놀란 배추가 잠깐 그 안에서 폴짝 뛰었다.
“멍구! 아가 야옹이들한테 왜 그래! 짖지 마.”
공주 엄마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볍게 튕기자 짖는 것도 금방 그쳤다. 역시 어디에나 뛰는 뭐 위에 나는 뭔가가 있다.
그와 반대로 뛰는 뭐 아래 기는 뭔가 있는 법이다. 뛰는 멍구 아래 깔린 게 저라는 사실에 무척 기분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