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는 난감했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일 학년 여자애들이 길을 막는 것이다. 가끔 그가 지나가면 쑥덕거리며 푼수가 되곤 하는 애들이었다. 하나같이 키가 컸는데 솔직히 날라리 같은 분위기였다. 좋게 말하자면 매력적인 여자애들이었다. 나중에 다 자라면 짙은 화장을 선호할 것 같다는 암시는 그로서도 가능했다. 그리고 거기서 머리를 밝게 물 들이고 살짝 웨이브를 넣으면 더 예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아 오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도아 오빠?”
“어, 안녕?”
그가 말했다. 취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일 학년 여자애들이 제일 예쁜 듯했다.
“나한테 할 말이, 있어?”
여학생은 다섯이었다. 끝에 두 명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웃었다. 여학생 중 하나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오빠 번호 좀 가르쳐주세요.”
그는 핸드폰을 받았다. 잠깐 딴생각을 했다.
“싫으세요?”
“아니.”
그리고 그가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그는 그녀의 이름표를 보았다. 성미온이라고 적혀 있었다. 도아의 이름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녀도 그의 이름표를 보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서로 꺅거렸다. 생각지 못한 일이라 그런지 왠지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그늘진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커다란 나무가 일정한 간격마다 있었다. 철봉이 있기에 가서 매달렸다. 발끝을 세우면 땅에 닿는지라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학교를 바라보았다. 내가 학교에 다니고 있구나 하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철봉에서 내려온 그는 손바닥을 코에 가져갔다. 쇠 냄새가 났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광경이 있었다. 저쪽에서 한 아이가 쭈그려 앉아서는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그쪽을 보니 키가 껑충한 아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거의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쏭길이! 김쏭길이!”
앉아 있는 아이는 일 학년인 김태균이었다. 지시를 받는 아이는 동급생 김송길이었다. 도아는 나무에서 물러나며 이름표에서 눈을 뗐다.
“쏭길아 돈 좀 있냐?”
“아니, 없는데. 진짜 없어.”
“이리 와봐. 새끼가 선수끼리 왜 이래?”
태균이 송길의 주머니를 뒤졌다. 손에 잡히는 것마다 꺼내어 확인하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양말 벗어.”
“양말은 왜……?”
“새끼가 말이 많아.”
송길은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었다. 그 동작이 너무나 굼떴다. 도아가 보기에도 돈을 감춘 곳이 양말 안인 것 같았다. 예상대로 거기서 천 원짜리 몇 장이 나왔다.
“이야, 이 상큼한 발 냄새 좀 봐라.”
태균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송길은 태균의 헛손질에 잔뜩 겁을 먹었다.
“새끼야 돈 없다며. 너 밑장빼기 했냐?”
태균이 돈으로 송길의 따귀를 쳤다.
“어허, 똑바로 서.”
“태균아 그만해. 돈도 가졌잖아.”
가만 놔두면 송길이 울 것 같았다.
“아직 아니지. 네 새끼 쪽 좀 줘야겠다.”
“그러지 마. 제발.”
“많이 컸네, 새끼. 이젠 나하고 달콤한 토킹어바웃을 나누려고 그러네.”
태균이 주먹을 들자 송길이 양팔로 배를 막았다. 그 모습을 본 태균이 킬킬대며 웃었다.
“로보캅 투! 터미네이터 투! 투캅스 투!”
태균이 투라고 말을 할 때마다 송길의 얼굴에 침이 튀었다. 송길이 최대한 몸을 낮춘 자세로 움찔움찔 침을 닦았다.
“너 이 새끼! 정의의 주먹을 받아라!”
장난스레 말하며 태균이 어깨 위로 주먹을 쳐들었다. 하지만 눈빛은 앞으로 송길에게 편치 않은 일이 벌어지리라 예고하고 있었다.
“악! 뭐야!”
그때 태균이 사색이 되어 황급히 귀를 털었다. 들고 있던 지폐에서 불이 붙은 것이다. 마치 라이터의 불 세기를 잘못 조절한 것처럼 불길이 확 올라와 그의 오른쪽 구레나룻의 일부를 태웠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지폐 조각은 땅바닥에서 완전히 검은 재가 되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일에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도아를 발견했다. 하지만 도아는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새끼! 다음에 쪽 당할 준비나 해라.”
태균이 자리를 떴다. 송길은 다시 신발을 벗어 대충 신었던 양말을 고쳐 신었다. 신발의 뒷부분을 구겨 신은 채로 갈 길을 갔다.
“재성아, 넌 왜 이리도 많을까.”
도아가 뇌까렸다.
도아가 받은 미온의 첫 메시지는 보발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왔다.
-오빠 뭐 하세요?
그는 신기하다는 듯 메시지 내용을 보발에게 말했다. 보발에겐 자랑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발은 순간 오백 년을 넘게 보필한 주인에게서 귀여움을 느꼈다. 솔직히 그는 좋아하는 이성이 생긴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들이 이런 마음일 거라는 생각을 은근히 했다.
“그건 도련님이 알아서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알긴 아는데.”
도아가 킥킥거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절대로 아니야.”
도아는 생각나는 대로 답장을 보냈다. 그녀도 곧잘 답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상황은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도아는 침대에서 돌아누우면서 생각했다. 이게 왜 이리도 신이 날까 하고. 그날 도아는 선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꿈도 네 개나 꾸었다.
다음 날 등교 하는 차 안이었다. 막연히 간밤에 떠올랐던 궁금증을 물어보는 도아였다.
“보발 궁금한 게 있는데, 여자는 어떻게 해야 되지? 여자의 근본은 무얼까?”
“좀 당황스런 질문입니다만.”
보발이 핸들에 있던 손 중 하나를 뗐다.
“그러니까 여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궁금해.”
“도련님을 생각하십시오.”
“나를?”
도아는 생각했다. 무슨 말일까? 놀리는 걸까? 덧셈 뺄셈을 배우고 있는 아이에게 곱셈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아껴주시면 된다는 말입니다.”
보발이 간략하게 말했다. 도아의 입장에서는 이게 뭔가 싶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어제 열한 시를 마지막으로 답장이 없네.”
도아의 말에 보발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 때도 있습니다.”
“나한테 싫증이 난 걸까?”
“그럴 리가요.”
“그럼 왜 답장이 없지?”
“그러게 말입니다.”
보발이 크게 웃었다.
“그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창 밖을 보았다. 그로서는 새로 발견한 보발의 흥미로운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교실에 입성하자마자 어디 도망갈 리 없는 짝꿍부터 눈으로 찾은 도아는 보발에게 했던 질문을 시도했다. 재성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고민을 들어준 친한 친구를 향한 의무감의 발로인 것도 사실이었다. 냉정히 놓고 보면 자신은 여자와 아무 상관 없는 천하의 찌질이가 아니었던가. 도아 같은 아이가 자신 같은 찐따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어불성설 같았다.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아, 내 생각에는 그렇다는 거야……!”
“열한 시에? 바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그건 모르는 일 같아. 개인적인 거니까. 특히나 여자는…….”
“재성이 네 여자 친구도 그래?”
“난 없어. 여자 친구 없어.”
도아가 보기에 재성이 어딘지 난처해 보였다.
“사귄 적은 있을 거 아니야?”
“한 번도…… 없어. 나 같은 앨 누가…….”
재성이 뒷말을 흐렸기에 나 같은 부터는 도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괜히 빼는 것 같아서 도아는 집중하라는 의미에서 재성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재성이 깜짝 놀라며 아프다는 제스처를 했다.
“어깨 다쳤어?”
“응, 그게 어쩌다 보니까.”
재성의 손이 아픈 어깨 쪽에 머물렀다. 재성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 순했다. 만약 카피바라를 인간화하면 재성처럼 온순한 얼굴이 될 것 같다고 도아는 생각했다.
“범식인가 하는 그 선배?”
도아가 눈치 까고 말했다.
“아, 아니, 응.”
“무슨 수를 써야 하지 않을까?”
“솔직히 대책이 없어.”
“그러다가 졸업하겠다.”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
“삼 학년들이 졸업하는 날까지 기다릴 거라고?”
“으, 응.”
“평화주의자인 건 좋아. 좋지만……!”
“나 평화주의자 아니야.”
“미안하지만 넌 절대적으로 평화주의자야. 극단적인 평화주의자. 일종의 병폐라고.”
순간 도아는 지금 내가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강의 평화주의자와 평화에 대해 토론하는 건 지독한 독재자와 독재를 논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게 도아가 느낀 바였다. 이런 벽보고 대화하기 유형은 속된 말로 암을 유발하는 것과 같았다.
도아는 삼 교시 쉬는 시간을 틈타 수민에게 접근했다. 모름지기 여자는 여자가 제일 잘 알지니.
“얘기 좀 할까?”
그는 포부 당당하게 복도로 수민을 이끌었다. 그는 몸을 획 돌렸고 그에 맞춰 그녀는 계단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일단의 아이들이 나선형 계단을 또르르 내려갔다. 그는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시간 내줘서. 영광이야.”
“바보. 근데, 무슨 얘긴데.”
“좋아! 여자 이야기야.”
“어머.”
“차근차근 설명할게. 어제 일이야. 일 학년 여자애 하나가 내 번호를 묻고 갔어. 어제 열한 시까지 카톡을 주고받았거든.”
“에?”
그녀는 실망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왜?”
“난 또 고백이라도 하나 했지.”
그녀가 웃음을 섞어 말했다.
“누구한테?”
“누구는 누구야, 나한테지.”
“내가 너한테?”
그는 놀랐다.
“왜지?”
“분위기가 딱 그렇잖아. 고백할 타이밍이었다고.”
“내가 했던 행동에 그런 게 다 있는 거라고?”
“이제 배웠니?”
“역시 여자라서 다르구나. 남자와는 느끼는 게 다른 모양이야. 배울 게 있는 것 같아. 인생 선배처럼.”
“여자한테 연애 배워서 좋을 거 없을걸.”
“남자한테 배우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너 걔 일 학년, 누구야? 누군데?”
“성미온.”
“아, 누군 줄 알겠다. 너도 걔한테 관심 있어?”
“글쎄, 나도 모르겠어.”
“그런 무책임한 대답이 어딨어?”
“사실인 걸 어쩌겠어. 나도 이런…….”
“처음은 아니잖아?”
도아는 어디에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 멋쟁이였다. 우울한 듯 보이는 깊은 눈동자는 일종의 동경심을 불러일으켰고 세련된 턱선은 알맞게 떨어지고 있었다. 지금 그의 태도에 그녀는 답답함을 느꼈다. 아이돌에게 느끼는 일종의 배신감과 실망감이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지금은 그게 먹힐 나이니까.”
“그런데 그걸 모르겠는데.”
문득 그는 대화가 이상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애초에 궁금했던 건 왜 미온이 열한 시 이후로 연락이 없는 가였다.
“근데 이런 이야기를 굳이 이런 데서 해야 했니? 애들이 보면 우리가 사귄다고 오해하겠다.”
“이런 이야기는 비밀스러워야 하잖아.”
“너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너야말로 귀여운 구석이 있지.”
“뭐니? 받은 만큼 돌려주기야?”
“아니, 칭찬이었는데.”
도아는 사 교시 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미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재성과, 수민과 나누었던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거 누가 풀어 볼까? 하도아?”
수학 교사가 불렀다.
도아는 칠판으로 걸어나가 단숨에 풀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교사가 아이들의 박수를 유도했다. 대단하다고 칭찬 일색이었다.
“이게 칭찬 거리야?”
도아가 책상 위에 양팔을 얹고 있는 재성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저거 진짜 어려운 문젠데, 저걸 어떻게…… 대단해, 너.”
수업 종이 쳤다. 미리 뜀박질을 준비하고 있던 아이들은 교사가 교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도아의 시선에서는 점심밥을 일찍 먹기 위해 저렇게 사력을 다하는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아가 급식소에 갔을 때는 줄이 피난민 행렬처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것 때문일 지도 모르겠네.’
밥과 반찬을 받은 그는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반찬과 국물이 조금씩 흘러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이었지만 그는 식사를 시작했다.
‘이보게들 식사 예절부터 배워야겠군.’
문득 그는 어딘가를 보게 되었다. 태균과 송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와 같은 테이블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당연히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송길은 국물만 숟가락으로 휘젓고 있었고 태균은 한 번씩 눈을 치켜뜨며 웃어댔다. 불에 탄 오른쪽 구레나룻이 눈에 띄었다.
“터미네이터 투! 투캅스 투! 로보캅 투!”
볼록했던 태균의 양쪽 볼이 푸욱 꺼지며 송길을 향해 음식물 찌꺼기가 튀었다. 송길은 얼굴에 묻은 음식물만 떼어 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로보캅 투!”
웃던 태균이 사레가 걸려 기침을 했다. 눈은 송길을 향해 있었다. 송길은 야단을 맞는 아이처럼 고개만 숙인 채였다.
“쏭길이.”
태균이 다시 기침을 했다. 기침이 멎자 밥알을 가득 퍼서 입안에 욱여넣었다. 얼마 씹지 않고 앞쪽을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밥알 몇 개가 양념 탓에 번들거리는 입술 밖으로 구더기처럼 삐져나왔다.
“투!”
태균이 기관총처럼 음식물을 퍼부었다.
“캅.”
공격 예정자의 눈이 커졌다. 간밤에 게임을 하느라 잠을 얼마 못잖다. 그래서 실핏줄이 올라와 있었다.
“스.”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이제 한 마디만 끝내면 되는 거였다. 그것은 스위치와 같은 작용을 할 것이다. 투라니, 참으로 입에 있는 걸 뱉기 좋은 단어였다. 그는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켜며 턱을 젖혔다. 재채기를 할 때와 비슷했다.
“투우!”
그와 동시에 음식물 쓰레기들이 휴화산의 용암처럼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벗어나지 않고 그 자리서 폭발했다. 마치 공중에서 폭탄을 폭파시킨 것 같았다. 음식물은 분비물과 함께 우산 모양으로 번졌다. 그리고 낙진처럼 가까이 있는 얼굴을 향해 날아 붙었다. 모두 태균이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쟤 좀 봐!”
“아씨, 더러워 죽겠네.”
“토했나 봐.”
급식실을 경악의 웃음바다로 만든 태균은 즉시 휴지를 찾아 도망쳤다. 그러다가 국만 남은 식판을 든 남학생과 몸통박치기를 했고 그것까지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 상태로도 급식실 밖으로 도망을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혼자 미끄덩해서 크게 넘어졌다. 급식소 전체가 거의 실성한 사람들처럼 웃어댔다.
“쟤 사 반 김태균이잖아?”
“일 학년이야, 쟤.”
송길은 멍한 상태였다. 태균이 앉았던 최악의 항공 사고 자리만 제외하고 식판을 든 아이들로 착착 채워졌다. 송길에게 말을 거는 아이는 없었다. 송길은 식판에 눈을 고정시킨 채 오물오물 음식물을 씹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도아가 생각하기에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