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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줄 알았는데 민준에게 연락이 왔다.
민준은 군대에서 가끔 내게 전화를 했다. 우리 둘은 서로 헤어진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민준은 주로 훈련이 힘들다는 투정을 했고, 나도 학교 얘기나 하면서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만 한지 오래다.
심심하면 편지나 쓰라는 그의 말에 민준이도 말로는 헤어지자고 했지만
사실은 아직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자고 했을지도...
그래서 이렇게 계속 나한테 연락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오히려 어차피 헤어진 사이라고 생각하니, 민준의 눈치를 보는 일도 줄었고
좀 더 마음이 편한 것도 같다. 우리의 대화는 사귈 때와 특별히 달라진 점도 없어서
지금 이렇게 지내는 걸로도 충분했다. 가끔은 이런 어중간한 사이가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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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바람 속에 가끔씩 살랑대는 봄바람이 섞여 들어올 무렵
학교는 어김없이 개강했고 나는 2학년이 되었다.
이번 학기부터 아영이는 물론 수연이까지 같이 살게 되었다.
수연이는 술 약속이 많았는데, 같은 과가 아니니까 누구와 마셨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꼭 새벽에 우리 집 문을 두드려 대는 통에
몇 번 잔소리도 했지만 들어먹지를 않았다.
“나 잘 곳이 없엉 재워줘어~헤헤”
이러면서 안기는데 별 수 있나.
그렇게 매번 새벽에 와서 다음날 우리 집에서 씻고, 아침밥도 먹고
옷까지 빌려 입으면서 학교를 갔던 날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월세를 내고 같이 살자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그건 안 된다고 했다.
수연의 행동은 분명 민폐긴 했지만 나와 아영이 둘 다 수연이를 싫어하진 않았다.
친구니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막상 우리를 챙길 때는 살뜰히 챙겨 줬고, 셋이 놀러 나가면 마음도 잘 맞고 즐거웠다.
작년 유나와 싸운 이후 수연인 혼자 우리 집에 왔다.
“네가 서민준이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이것저것 묻지 않았던 수연에게 고마웠다.
그랬던 수연이 이번부터는 집에서 자취하는 걸 허락했다고 해서 셋이 같이 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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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디라고? 북강면?”
“북! 방! 면! 방석 할 때 ‘방’!!”
“아아~ 북방..면...”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민준이 불러주는 주소를 적어 내려갔다.
이제 면회가 가능하다고 하길래 그럼 갈까? 했는데 저렇게 순순히 주소를
불러 주는 걸 보면 싫지는 않은가 보다.
“준아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우유?”
“하여튼 우유 진짜 좋아한다니깐, 난 흰 우유는 별로 던데, 맞다 너 찹쌀떡도 좋아하잖아
이것도 사 갈게. 또 없어? 다 말해봐 내가 다 챙겨 갈게!“
나는 민준의 주소와 함께 먹고 싶다는 음식도 잔뜩 받아 적었다.
전화를 끊고 가는 방법을 찾아보니 첩첩 산중이라 막막했다.
여길 내가 갈 수 있을까...? 그래도 가야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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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 면회를 가기 전 날, 나는 마트에 가서 한가득 재료를 사 왔다.
일주일 전부터 저녁도 굶으면서 다이어트도 했다. 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야 하니까 빨리 자려고 팩을 붙이고 누워 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영이 들어왔다.
“나 왔다~”
“왔어~? 오~ 그건 뭐야?”
아영의 손에는 커다란 사탕바구니가 들려져 있었다.
“태환이가 주더라. 저번 주 화이트 데이였다고, 수연이는?”
“약속 있대~ 우리 과 김태환?”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팩을 떼면서 일어났다.
“응”
“걔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 아니야? 우리보다 2살 어린가?”
“그럴걸? 이거나 먹어”
“이건 또 뭐야 크리스핀? 대박”
“응 집에 가서 너네하고 같이 먹으라고 사 주더라”
아영이 침대에 걸터앉아 도넛을 입에 넣었다.
“야, 내려가서 먹어. 난 내일 먹을래. 남겨줘 나 다이어트 중이잖아”
“미친 내일 서민준 보고 나면 먹을 거면서 무슨 다이어트야”
“오랜만에 보는데 바짝 해야지 으으으 배고프다아아”
“윽 이건 또 다 뭐야”
냉장고 문을 열어 보고 아영이 질겁한다.
“내일 도시락 쌀 거... 헤헤”
“어휴.. 너도 참 지극정성이다. 헤어졌다며~ 남친도 아닌 놈을 왜 챙겨”
“그렇긴 하지만..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아직!”
“지랄한다”
“힝 너무해~ 나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데 잠이 안 와 어쩌지”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5시에는 나가야 첫차 타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헐.. 도시락은 언제 싸게?”
“2시에 일어나서 싸려고 했는데, 지금 잠도 안 오는데 조금 해 둬야겠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 상을 폈다.
상 위에 재료들을 올려놓으니 한 가득이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눈에 들어온 맛살을 들어 포장을 벗기며 물었다.
“그래서 김태환 걔는 어때?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 너무 마르긴 했지만”
“윽 난 과 씨씨는 싫어”
아영이 클렌징 티슈로 화장을 지우며 말했다.
“야 그런 것도 해보고 하는 거지, 걔 돈도 많아 보이던데”
“그런 것 같긴 하더라. 집도 강남이던데? KTX타고 학교 다니더라”
“헐 대박... 나는 무궁화호도 잘 안 타는데...”
“우리가 가난한 걸 수도 있어 이나야...”
“없이 사는 자취생한테 뭘 바라냐... 슬프다 빈부격차, 나 도넛 2개 남겨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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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재료만 손질해 두고 자려고 했는데, 손질에만 한 시간이 걸렸다.
이런 속도로는 도시락을 제시간에 못 싸겠다 싶어서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미리 해놔야 마음이 편해서 잠도 올 것 같았다.
“쏭 너 안 자? 12시 넘었어.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응 도시락만 싸놓고... 냉장고 위에 김밥 있으니까 내일 먹어”
“알았어 나 먼저 잔다~ 이 쪽 불 끈다?”
“응 잘자~”
김밥, 무쌈말이, 크로와상 샌드위치에 팽이버섯 베이컨말이, 치킨너겟, 각종 과일하고 샐러드...
6단 도시락이 완성 될 때 시계는 어느덧 새벽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화장도 하려면.. 4시엔 일어나야 하는데.. 2시간밖에 못 자겠네..
수연인 오늘도 안 들어오나”
나는 조용한 현관문을 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으..일단 자자 졸려...”
코를 드르렁 골며 자고 있는 아영의 옆으로 슬쩍 들어가 누웠지만
2시간 뒤에 못 일어나면 버스를 놓친다는 생각에 오히려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그래도 피곤했는지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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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4시
알람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서 아영이 깰까 얼른 알람을 껐다.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아서 더 피곤했지만 겨우겨우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을 위해서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새 구두도 신고, 양손 가득 도시락을 챙겨서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아서 어슴푸레한 시간에 집을 나섰다.
평소 같았으면 자고 있을 시간의 골목길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가로등도 아직 밝다.
낯설고 차가운 푸른 공기, 곧 민준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직 버스가 다니지 않을 시간이라 택시를 잡아서 전철역으로 갔다.
고속 터미널이 있는 역에 내려서, 고속버스로 3시간, 그리고 또 마을버스.
민준의 면회를 가는 길은 모자란 잠을 다 보충하고도 남을 만큼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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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짝으로 쭉 올라가면 군부대여~”
“아..예. 감사합니다아..”
힘없는 목소리로 버스기사 아저씨께 인사하고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자 아무 것도 없다. 분명 새벽 5시에 집에서 나왔는데
벌써 11시가 다 되어간다.
“들어가서 점심으로 도시락 먹으면 딱이겠네”
나는 손에 들은 도시락을 내려 봤다. 도시락 주제에 왜 이렇게 무거운지
도대체 이런 곳에 무슨 군대가 있다는 거야?
앗 저기다! 민준의 부대 이름이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나는 후다닥 거울로 얼굴을 체크하고 콩닥콩닥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면회 왔는데요.”
나를 힐끔 보더니 그 안에 있는 군인은 무표정으로 어딘가에 연락을 했다.
“신분증 주셔야 합니다”
검문소 같은 곳에 신분증을 맡기고 이름을 적고 옆에 있는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돗자리를 펴고 고기를 구워먹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렇게 불판까지 챙겨 와서 먹이는구나. 대단하다.
금방 민준이 대기실에 얼굴을 내밀었다.
“누나!”
“준아!”
민준이 군복 입은 모습이 어색한지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준아아~~ 보고 싶었어~~”
“오느라 힘들었지~ 고생했어. 여긴 자리가 없네.. 저쪽으로 가자 누나”
민준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말했다.
“아냐 하나도 안 힘들었어. 헤헤”
민준은 까매졌고 살이 조금 빠져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는 밤톨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했다. 민준의 손을 잡고 싶었는데
지금 내가 그래도 되나 싶어서 양손으로 도시락을 쥐고 어정쩡하게 따라 나섰다.
“얼~ 민준이 면회 왔냐?”
“이병 서 민 준. 네 그렇습니다.”
가는 길 민준이보다 선임인 듯 보이는 사람이 민준에게 말을 걸었다.
작대기가 3개... 상병이군, 군대 계급도 이제 척척이다.
군인 말투로 대답하는 민준의 모습이 왠지 낯설어서 간지러웠다.
“누구야? 여자친구?”
“아닙니다. 그냥 학교 선배..”
“아~그래 재밌게 놀아라~”
민준의 말을 끊으며 민준의 선임은 그냥 휙 지나갔다.
“가자 누나”
“..어? 어..”
학교 선배라니.. 맞아, 우리 헤어진 사이였지, 그럼 학교 선배가 맞지...
씁쓸하다.
“누나 오는데 얼마나 걸렸어?”
“음.. 거의 6시간?”
“와 진짜 멀다. 힘들었겠다. 우리 누나, 고마워요 그건 뭐야? 도시락?”
“응”
“나 주려고?”
민준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한다. 으... 귀여워...
도시락을 열어 보이자 민준이 감탄했다.
“우와~ 짱이다 누나! 이거 다 누나가 만든 거야? 짱 맛있다”
입이 미어터지게 먹는 준이를 보니 흐뭇했다. 그래, 이거면 됐지 뭐
“준이 네가 먹고 싶다고 한 거 다 챙겨 왔어~ 많이 먹어”
민준은 내가 만든 도시락을 싹 비웠다.
그리고 내 휴대폰으로 학교 사람들에게 연락도 하고 밀린 웹툰도 보면서 놀았다.
나는 옆에서 그런 민준이만 보면서 좋았고 아쉬웠다.
우리에게 허락 된 면회 시간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아쉽다.. 누나 조심해서 가. 여기 해 지면 추워 이거 가지고 가”
민준은 머뭇거리다 내 손에 뭔가를 쥐어줬다.
“나 이제 들어가 봐야 겠다. 누나 전화 할게”
민준은 나를 가볍게 안아 주고 서둘러 들어갔다.
민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뒤로 돌아섰다.
민준이 내게 주고 간 것은 핫팩과 별사탕이었다.
작고 투명한 포장에 들어 있는 별사탕...
훈련하면서 어떻게 보관을 했는지 깨진 곳 하나 없이 예뻤다.
나는 별사탕과 핫팩을 주머니에 넣고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20분 정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너넨 그래도 사귀고 있기라도 하지 난 이게 뭐야...
나는 민준의 말한 학교 선배가 마음에 남아 속상한 웃음을 지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아까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서 또 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기다리고,
고속버스에 올라서 창문에 머리를 부딪치며 졸다가 눈을 떴다.
아까 속상했던 마음이 지치고 지칠 즈음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아까 민준이 준 핫팩이 손에 걸렸다.
분명 아까 오는 길에 다 식어서 버리려다가 버릴 곳을 찾지 못해서
그냥 가지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아직도 따뜻했다.
그 핫팩의 온기가 아직 식지 않은 내 마음과 같아 보여서 더 서러워졌다.
학교 선배라고...?
진짜... 서민준 이 나쁜 놈, 이제 전화도 안 받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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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준이 넌 밥 먹었어? 나는 먹었지~ 헤헤”
“송이나 저거 또 서민준이랑 통화하냐?”
“그런 것 같던데?”
아영의 말에 수연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한다.
“이제 다시는 연락 안 한다고 술 처먹던 게 엊그제 아니었어? 저것도 병이야 병”
쯧쯧 거리는 아영에게 나는 손가락으로 쉿쉿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준이 너 휴가 언제라고? 그럼 우리 언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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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어. 그럼 다음 주에 보자”
“뭐래? 지혜 못 온대?”
“응 오늘 야근 한대.”
“그렇구먼. 괜히 양꼬치집으로 왔다. 걔가 먹고 싶대서 이쪽으로 잡았더니”
“하긴 걔 양꼬치 귀신이지”
“아 맞다, 너 옛날에 그 돈 많다던 후배는 어떻게 됐어?”
나는 칭다오를 따르면서 말했다.
“누구?”
“그~ 왜, 아 누구지 이름 기억 안 난다. 우리 과였는데...
막 너 화이트 데이 때 사탕이랑 무슨 도넛 줬던 애”
“아~ 김태환?”
“맞다 맞다. 기억력도 좋다. 걔 너한테 엄청 갖다 바치지 않았어?”
“그냥 뭐 내가 반응이 시큰둥하니까 걔도 점점 연락 안 하더라”
“아깝다 뭔가 사귀면 되게 잘 해줄 것 같았는데”
“딱히 마음이 안 갔어.”
“하긴 네가 싫음 그만이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다.
한 쪽에서 아무리 좋다고 외쳐도 상대방이 응답하지 않으면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일방적인 상황에서 좋다고 외치는 쪽이 얼마나 지치고 힘든지
상대방은 알고 있을까? 그를 사랑하면서 나는 행복했고 동시에 외로웠다.
짝사랑인 듯 아닌듯한 사랑이 나를 계속 잡고 있었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이제 그만하고 싶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 한 번에
지금까지 힘들었던 모든 것이 사르르 녹아 버려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
그가 내게 준 별사탕이 내게 그의 미소 같은 존재였다.
그 속에 담긴, 그가 나에게 건넨 작은 마음에 기대어 포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버티면서도 행복한 우리들을, 사랑 받고 있는 그들은 결코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