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어? 배추가 뭐?”
“아니. 나비 이름 오늘부터 배추라고. 배추밭 옆에서 데려왔고, 진짜 배추랑 잘 노는 거 보니까 딱이네.”
“그럼 무밭 옆에서 데려왔으면 무가 되고, 고추밭 옆에서 데려왔으면 고추가 되냐? 넌 어째 그런 거 짓는 것도 그렇게 성의가 없냐? 어쨌든 끝까지 주인 안 나타나면 네 고양이니까 알아서 해.”
누나의 타박에도 다른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고양이의 이름은 그 순간부터 배추가 됐다.
물론 고양이는 배추를 부르면 자길 부르는지 한동안 못 알아들었다. 알아듣고서도 모르는 척했다.
못 알아듣는다고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걸 보면 고양이로 태어난 게 가끔 어이없는 일이 있긴 했지만,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
“배추야, 박배추. 이리 와. 맘마 먹자.”
“냐아옹”
“너는 어째 밥 먹자고 할 때만 네 이름을 알아듣냐? 아니 맘마를 알아듣는 건가?”
배추는 어느새 분유와 사료를 같이 먹을 만큼 자랐다. 이제 현지가 사준 생쥐 모양 장난감도 잘 가지고 놀았다. 먹거나 잠자거나 하지 않으면 주로 그걸 가지고 물고 뜯었다.
현수는 여전히 집사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먹어야 하는 시간에 충실하게 먹여주고, 변을 보면 바로 바로 치웠다.
가끔은 직접 종이로 장난감을 만들어서 놀아줬다. 물론 종이 장난감이라 금방 망가지는 게 문제였지만.
그 무렵 배추는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았고, 심심하지도 않았다. 고양이의 기억력이 원래 그런 건지 마음이 금방 식은 건지 엄마와 형제들은 벌써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이제 집사 남매가 가족이었다.
오늘도 분유에 섞은 사료를 먹고 그루밍을 했다. 그래도 이 정도 청결함은 유지해야 스마트한 고양이라 말할 수 있을 거 같아 꼼꼼히 핥았다.
잠시 후 소화를 시킬 겸 현수가 자기가 만든 장난감을 들고 나왔다. 그 장난감은 나무젓가락에 줄을 달고 끝에 종이 나비에 은박지를 감싼 모빌이 달려 있었다. 현수가 놀자는 듯 그 장난감을 흔들었다.
그럴 때면 배추는 현수의 성의가 괘씸해서 놀아주는 척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무아지경으로 그 종이 장난감을 쫓고 있었다. 역시 본능은 이성보다 강했다.
이제 배도 부르고 그루밍도 하고 운동도 하고 나니까 솔솔 잠이 왔다. 배를 시원한 바닥에 깔고 앞발로 머리를 받친 다음 쪼그려 앉았다. 모든 게 충족되고 나니 꿈속으로 직행하고 싶었다.
“진짜 배추 팔자가 상팔자다.”
마침 설거지를 마친 현지가 배추를 보며 말했다. 배추도 그 말에 동의하는 의미로 귀만 한 번 까닥해주고 제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꿈속에서 배추는 가끔 두 다리로 걷고 있었다. 이제 네 발로 다니는 게 익숙해서 두 다리로 서 있으면 꿈속에서도 어색했다.
오늘은 꿈속에서도 네 발이었다. 근데 그게 무척이나 불편했다. 아래를 내려 보니 앞발이 아니라 여자 사람의 손이었다. 뒷다리도 발로 서 있는 게 아니라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배추는 바로 꿈인지 깨닫고 평소 사람이 된 꿈을 꾸면 그렇듯 두 발로 서려 했다. 그러나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코와 목에 매운 기미가 확 스며들었다. 따갑고 답답해 죽겠는데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으! 이게 뭐야! 이거 꿈이잖아. 꿈인데 왜 진짜 고통스러운 건데?’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뜨고 주변을 쭉 돌아봤다. 사방이 뿌연 연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던 불이 점점 또렷해지더니 사방을 가득 메웠다.
활활 타는 불이 곧 덮칠 거 같았다. 너무나 무서운데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뜨거운 불지옥이었으나 몸은 덜덜 떨렸다.
‘제발 누군가 살려줘요. 제발’
그때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
“거기 누구 있어요?”
배추는 겨우 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봤다. 누군가 불을 뚫고 들어와 있었다.
“사, 살려, 주세…….”
그러나 그 사람이 다가오는 걸 보기도 전에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정말 죽은 듯이 정신을 잃었다.
***
순간 배추가 눈을 떴다. 다행히 보이는 세상은 싸구려 장판이 깔린 사람의 집이었다. 뜨거운 기미도 없었다. 근데 목이 여전히 답답했다. 현실인 거 같은데 현실에서도 죽을 것만 같았다.
“야아옹”
‘집사야 나 좀 살려라.’라고 혼을 실어 말했다. 그 작은 소리를 들었던지 욕실에 들어가 있던 현수가 서둘러 나왔다. 현수는 배추를 보자마자 놀란 눈으로 뛰어왔다.
“아니! 이 줄이 왜 목에 감겨 있어!”
배추가 잠결에 움직이다가 바닥에 깔아둔 장난감 줄을 목에 감고 있었다. 그 사이 현수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던 참이라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배추의 목에 감긴 줄을 현수가 급히 풀자 숨통이 트인 배추가 캑캑 기침을 해댔다. 현수는 지갑을 챙길 생각도 못 하고 바로 배추를 들고 나갔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아 마음이 급했다.
현수의 품에 안겨 집을 나오자 배추의 호흡이 안정감을 찾았다. 지금 어딜 가는지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지난번 설사 땜에 동물병원에 다녀온 후 계속 밖에 나오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집사야 나 이제 괜찮다. 내려놔라.」
현수가 여전히 불쾌한 자세로 안고 있는 게 불만이었지만 버둥거리진 않았다. 괜히 벌써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하면 아쉬운 건 저뿐이라 계속 기운 없는척 했다. 잠시 그렇게 가다가 아까 그 꿈을 생각했다.
「아! 불! 복권이라도 사야 하는데……. 집사야, 내가 꿈 팔 테니 진짜 장난감을 사내라. 쥐돌이랑 종이 나비 싫증 났다.」
고양이의 몸이니 돈이 있어도 살 수도 없어서 아쉬웠다. 지금 저를 안고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는 현수를 올려다보며 아쉬운 마음에 “야옹”하고 울었다.
“배추야. 많이 힘들어?”
“뀨…….”
아무 데도 안 아픈데 현수는 배추가 소리를 냈다고 더 난리였다. 이젠 속도를 더 높여서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려 멀미가 나기 직전 지난번 현지가 배추를 데려갔던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얼마나 속도를 냈는지 현수는 문 열고 나서 잠시 숨을 헐떡이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연이는 처음 온 손님이 이상한 모양으로 숨을 헐떡이자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저, 제 고양이가, 목이, 졸려서요.”
“예?”
연이는 바로 배추를 현수의 품에서 억지로 꺼내다시피 해서 봤다. 다행히 배추는 한눈에 봐도 멀쩡했다.
그제야 연이는 현수를 제대로 봤다. 머리가 젖어있어서 땀인가 했는데 샴푸 냄새가 확 났다.
‘이 사람 씻다 말고 뛰어 왔구나. 신발도 짝짝이야.’
얼마나 급했으면 이러고 왔나 싶어서 연이는 배추를 보다 말고 피식 웃었다.
“왜, 왜요?”
“네? 웃어서 죄송합니다. 근데 이 아기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정확히 무슨 일로 온 거죠?”
“제가 잠깐 딴 짓하는 사이 혼자 자다가 목에 줄이 걸려서요. 깽깽거리길래 바로 풀긴 했는데 기침을 많이 해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봐 주세요.”
“네. 그러죠.”
연이는 바로 자리로 돌아가 배추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배추는 지난번에 피를 뽑았던 수의사임을 알아보고 벗어나려 버둥거렸으나 의미 없는 몸부림이었다. 억지로 입까지 벌려야 했다.
“뀨!”
「오늘의 이 모욕과 수치는 잊지 않겠다!」
대충 검사가 끝나고 나자 수의사는 배추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물론 배추는 기분이 나빠서 꼬리를 좌우로 탱탱 쳐댔다.
“기도도 멀쩡하고 움직이는 것도 괜찮고 다 좋은데요. 아주 건강해요.”
“아, 정말요. 다행이다.”
연이의 말을 듣고 그제야 현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 어떤 여자분이 먼치킨인 줄 알고 데려왔던 그 아기 맞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