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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초능력 소년
작가 : 하시문
작품등록일 : 2018.12.11

하도아- 영원을 살아온 초능력자다. 지적이고 냉소적인 그지만 남모르는 따뜻함도 가지고 있다. 절대 악인 ‘배키’를 제거하는 것이 그의 숙원이다.
박재성- 도아의 학교 친구다. 도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소심하고 부끄럼이 많은 아이인 그는 남을 해칠 줄 모른다. 그는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이수민- 도아의 학교 친구다. 내심 도아를 짝사랑하지만, 굳이 티 낼 만큼 지고 들어가는 성격이 아니다. 폐가 동호회를 주최한 장본인이자 배키가 된 중형의 마지막 희생양이다.
김중형- 민경의 스토커이자 배키가 깃든 인간이다. 은밀히 잠재해 있던 배키가 표면에 등장하고부터 살인귀로 변모한다. 대상의 머리를 먹을 때마다 그 대상의 기억도 훔친다.
성미온- 도아가 다니는 고등학교 1학년으로 도아를 좋아하고 있다.
보발- 한때는 르와 교도였다가 도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후부터, 500년 이상 도아를 보필하고 있다. 화수의 손에 죽게 된다.
벨즈- 그의 활동 주기는 24시간 중 단 3시간이다. 그 3시간 동안 짐승의 형태로 있다가 나머지 시간에는 바람이 된다. 그는 감시자다.
팽화수-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대상을 특정 짓지 않으나 남자만 노린다. 우연한 기회에 도아 일행을 만나고부터 도아에 대한 살해 의지를 가지게 된다.
강민경- 미래가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33살 여자다. 벨즈의 감시를 받는다.

 
1. 소년
작성일 : 18-12-11 21:28     조회 : 471     추천 : 0     분량 : 1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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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구 튜닝을 한 차가 구부정한 국도를 따라왔다. 하이빔이 길게 뻗어 나가는 만큼 나무 그림자가 커지며 물러났다.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불빛에 인영이 어렸다. 인영이 소년임을 파악한 뒤에도 운전대를 잡은 남자는 미처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다. 차는 붕 뜬 것처럼 순식간에 소년을 치고 지나갔다.

 “브레이크! 오빠, 브레이크!”

 조수석의 여자가 꺅꺅거렸다. 차 문을 요란하게 긁어댄 통에 손질을 받은 그녀의 인조 손톱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도 차는 십여 미터를 더 미끄러져 갔다. 질질 끌리는 고무바퀴에서 흰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차가 멈추자마자 남자는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변하는 듯했다. 아침에 로또 이 등 당첨금을 수령했을 때만 해도 좋았다. 징그럽게 괴롭혀대던 대부업자를 찾아가 씩 웃으며 육백만 원의 빚을 동전 무더기로 되돌려 주었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저녁에 갖은 술판에서 십년지기의 얼굴을 병으로 갈겼을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씨발! 아, 씨발!”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오는 보닛 옆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어떡해! 어떡해! 오빠……!”

 “시끄러!”

 “사람을 친 거야?”

 여자가 울먹였다.

 남자는 입고 있는 가죽재킷의 앞섶을 움켜쥐었다. 입에서 욕이 멈추지 않았다. 보닛을 주먹으로 내리치던 남자는 뒤늦게 뭔가를 깨달았다. 그는 앞범퍼를 확인했다. 그 시선이 왔던 길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는 한 손으로 차를 더듬으면서 달려갔다.

 “오빠?”

 “쉿. 쉿!”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 안의 여자는 몸을 돌려 좌석 사이로 고개를 내밀다가 여의치 않자 자신 없이 차 문을 열고 검은색 하이힐을 신은 다리로 길게 뻗어 나왔다. 그녀는 두 팔로 가슴을 안은 채 애인의 꽁무니를 쫓았다. 정신이 완전히 팔려 있던 남자는 뒤늦게 연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는 넋이 나간 듯 있다가 약을 한 듯한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없어! 아무도 없어! 아닌가 봐.”

 “아니라니?”

 “봐. 사람을 쳤다면,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없잖아. 우리가 착각했던 거야. 술 때문이야. 아, 이래서 음주 운전은 안 되나 봐.”

 그렇게 말을 하지만 남자는 어째 자신이 없어 보였다.

 “분명히 사람을…….”

 “아니, 아니야. 새였겠지. 날아갔을 거야.”

 “새?”

 “새였어. 맞아. 새 맞아.”

 남자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사실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는 말이었다.

 

 담임이 처음 보는 얼굴의 남학생과 함께 교실에 들어왔다. 미소를 머금은 채 남학생을 힐끔거리는 담임의 얼굴은 마치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 난 아빠의 얼굴이었다. 남학생은 키가 큰 편이고 슬림했다. 재성은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았던 잘생기고 천하무적인 킬러를 남학생에게서 느꼈다. 짙은 눈썹. 천천히 감았다 뜨는 눈은 태양처럼 강렬했다. 하지만 놀랍도록 보들보들한 우윳결의 피부 때문인지 재성은 그에게서 강한 여성성도 느꼈다.

 남학생은 편안한 표정을 지은 채 교실을 둘러보았다. 관찰 대상과 눈이 마주치자 재성은 눈을 돌렸다. 동시에 자신의 옆자리가 비었음을 인지했다. 빈자리가 거기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 다른 데 또 빈자리가 없나 두리번거렸다. 없었다.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면서 그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전학생을 소개하던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을 마쳤다.

 “도아야, 할 이야기 있니? 해 볼래?”

 도아는 가볍게 미소를 띠더니 나란히 내리고 있던 손 중 하나를 교탁 위에 올렸다. 손톱이 잘 정돈된 손끝이 교탁을 슬며시 두드렸다.

 “하도아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간단한 인사였다. 저쪽에서 누군가 손뼉을 쳤고 다음부터 박수 소리가 우르르 쏟아졌다. 담임은 흡족한 듯 입가를 크게 올리며 도아의 어깨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도아가 재성의 옆으로 가 앉는 걸 말없이 지켜보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했다.

 재성은 후회가 되었다. 도아가 자기 쪽으로 오면서 눈인사를 보냈는데 그만 회피해 버렸던 것이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용기를 내고 옆을 힐끗 보았다. 도아는 앞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좇은 재성은 몇 자리 앞에 앉아 있는 수민이 도아를 향해 ‘안녕?’하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걸 발견했다. 도아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어깨를 들어 올렸다.

 솔직히 재성은 부러웠다. 그는 한 번도 여자에게 그런 따사로운 관심을 받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나 잘생겼다는 소리를 유일하게 해 준 여자는 할머니뿐이었다. 심지어 도아에게서 좋은 냄새도 났다. 걸핏하면 번지는 여드름 탓에 골머리를 앓는 자신과는 달리 타고난 도아의 피부는 언젠가 보았던 르네상스 조각상처럼 미끈했다. 이목구비의 대비와 머리에서 발끝의 비율을 보더라도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면 위화감을 느낄 법도 한데 오히려 재성은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도박꾼이 화투패를 소매 안으로 슬쩍 밀어 감추는 것과 반대로 그는 일 교시 국어 시간에 자신의 교과서를 도아 쪽으로 슬쩍 밀었다. 인사말이 목구멍에 울컥 치달았지만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고마워.”

 도아가 말했다.

 순간 재성은 감격했다. 똥이 마려운 듯 어색한 미소를 짓던 그는 도아와 눈이 마주치자 무의식적으로 쌓았던 경계의 벽이 일시에 와르르 무너짐을 느꼈다.

 “도, 도아라고 했지? 반가워.”

 “나도 그래.”

 도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재성은 덩치가 큰 편이었지만 순둥이 같은 인상이었다. 그런 스타일은 대게 일진의 샌드백이 된다. 솔직히 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티는 내지 않지만 움직일 때마다 오른쪽 팔의 멍이 이따금 그를 움찔거리게 했다.

 “잰 이름이 뭐야?”

 도아가 물었다.

 “누구?”

 재성은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눈앞에서 본 도아는 정말이지 미남자였다. 아이돌 가수라고 속이려 든다면 백이면 백 속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저기 중간에 머리 긴 애 말이야.”

 “수민이? 이수민이야.”

 “친해?”

 “나하고?”

 재성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야?”

 “응.”

 재성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거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전학생? 마침 잘 됐다. 이십구 페이지 한번 읽어 볼래?”

 교사의 말에 도아는 일어나 책을 들었다. 그의 또렷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이유 없이 실실 웃던 재성이 교사의 엄한 눈짓을 받아 시무룩해졌다. 도아가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너 목소리 되게 좋구나?”

 재성이 속삭였다. 아무렇지 않게 도아 같은 애에게 말을 건네는 자신의 모습에 일종의 감격을 느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도아의 책상으로 시끌벅적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도아의 면면을 뜯어보며 방방 뛰고 웃기도 했다.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도아는 절제된 대답을 해주었지만 말투만은 친절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갔다. 도아는 따스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자신의 자리인 창가에 앉아 있었다. 무심히 창밖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수민이었다. 그녀가 그의 바로 앞자리에서 의자를 빼 뒤로 보는 자세로 마주 앉았다.

 “안녕, 전핫생?”

 “전핫생?”

 “내가 전핫생이랬니? 전학생아.”

 “하도아라고 해.”

 “응, 알고 있어.”

 “소개하는 자리 아니었나?”

 “너 재밌는 애구나?”

 “내가? 별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에이, 전핫생 맞구나. 맞네.”

 도아는 말없이 수민을 바라보았다. 수민의 전체적인 인상은 도도함이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건 연한 화장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한 이목구비와 뚜렷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눈빛은 어딘지 차가워 보였고 금방에라도 담배를 물 것 같은 입술에서는 냉랭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숫제 잘 웃고 농담도 잘하는 듯했다. 그래선지 좀 독특한 느낌이 들었다. 나쁜 뜻은 아니었다.

 “너 어디 살아?”

 그녀가 말했다.

 “그건 왜?”

 “그냥 궁금하니까. 솔직히 너 언젠가 만난 느낌이 들거든. 뭐 기억만 안 난달 뿐이지 길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지.”

 “그랬을지도 모르겠네. 난 좀 먼 데서 살아.”

 그가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시선도 그것을 좇았다. 그녀는 마치 물체에 반응하는 아기 고양이처럼 그의 세세한 몸짓에도 반응을 했는데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방증이었다.

 “먼 데서 사는구나.”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뇌까렸다.

 “많이 먼 곳이야.”

 “그래 알았어.”

 “넌 어디서 살지?”

 그녀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물어봤으니 나도 대답해야 된다는 건가?”

 “네가 말할 의무는 없어. 신경 쓰인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난 XX아파트에서 살아. 네가 사는 덴 얼마나 먼데?”

 “시 외곽이니까 더 멀지.”

 “XX아파트 알아?”

 “아니.”

 “뭐야, 너.”

 그녀가 웃었다.

 오 교시는 음악이었다. 교사는 테너처럼 굵직한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오르간을 연주했다. 선율이 고르지 못함을 알고 있는 건 도아뿐이었다. 교사와 아이들이 각각의 대목을 번갈아 부르고 있었다. 도아도 노래에 동참했다. 시종일관 도아 이야기만 하던 여학생들이 불려 나가 땅콩을 맞았다. 육 교시는 체육이었다. 축구였다. 편 가르기를 할 때 제일 처음 뽑혀 나간 건 도아였다. 그는 정말 열심히 뛰었다. 한 번이지만 그가 힘을 실어 찬 공에 골키퍼가 겁을 먹고 튀었다.

 

 “보발, 내일부턴 직접 학교에 찾아오지 마. 어디 한적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어.”

 도아가 말했다.

 운전사의 눈이 잠깐 룸미러에 지나갔다.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눈빛이었다. 작은 머리 곳곳에 샌 머리칼은 그를 오십대 전후로 보이게 하지만 피부의 탄력으로 보자면 삼십대와 같았다.

 “저 때문에 불편한 데라도 있으십니까?”

 “그게 아니라 아이들의 시선이 있잖아.”

 “그건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도아는 생각에 잠겼다. 살을 에는 감각이 얼마 전부터 더 강렬해졌다. 확실히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 어디, 배키가 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매만졌다. 배키의 녹슨 못으로 된 꼬리가 뚫고 들어온 자리였다.

 당시는 한국전쟁 때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무섭게 남진한 북한국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후방의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을 포함하여 김포 비행장과 수원에 교두보를 마련하였는데 그 무렵 영남 지역에서는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하고 위령제까지 지내지만 사실 범인은 배키였다.

 멧돼지의 모습을 한 배키는 거북선의 등딱지처럼 온몸이 못으로 뒤덮인 얄궂은 형태였다. 돌격만 해 댈 뿐인 배키의 단순한 공격은 도아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등장한 어린 북한 병사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도아가 된통 당했던 것이다. 소년병은 철퇴처럼 날아든 배키의 꼬리를 맞고 즉사했다. 도아가 미처 생각 못 한 변칙이었다. 쇠사슬처럼 늘어난 못 박힌 꼬리는.

 그러고 보니 보발의 모발 상태가 배키의 가시가 비슷한 상황이다. 못은 시커먼 것도 있었고 녹이 잔뜩 슬어 벌건 부스럼이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벌써 육십 년이 훨씬 흘렀군.’

 조용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배키였다. 어떤 녀석일까 궁금하면서도 몹시도 혐오스러웠다. 그는 배키 추적 중에 있었다.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악한 존재를. 거기에 하나 보태자면 친구를 찾고 있었다. 벨즈라는 녀석으로 짧은 시간 짐승의 모습으로 있다가 대게는 바람이 되어 대기 중에 흩어져 지냈다.

 좋은 식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아무튼, 골치 아픈 녀석들이었다.

 보발은 액셀을 밟은 구둣발에 힘을 실었다. 핸들 너머 계기판의 바늘이 목적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리는 검은색 대형차의 바퀴만큼이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도아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어냈다. 앞마당의 나무들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해는 저편 하늘 끝자락에서 동그란 원을 그리며 식어가고 있었다. 그가 창문을 살짝 밀었다. 아직은 차갑기만 한 봄바람이 머리를 흩트렸다. 그는 귀부인이나 사용할 법한 눈곱만한 커피 잔을 창틀에 올렸다. 창틀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잔을 위에서 거머쥐자 모락모락 올라오는 열기가 손바닥을 적셨다.

 “보발?”

 그가 보지도 않고 말했다. 보발은 양손을 포갠 채 문가에 서 있었다. 양쪽으로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도 그렇지만 집사의 가지런한 이는 언제 봐도 정갈했다.

 “저녁은 뭐가 좋겠는지요, 도련님?”

 “과자가 좋겠어. 기름에 튀긴 거로.”

 “몸에 해롭습니다.”

 보발이 즉시 답했다.

 도아가 몸을 살짝 돌려 뒤를 보았다.

 “알겠습니다.”

 보발이 머리를 숙였다.

 

 스무 명은 족히 쓸 수 있는 기다란 식탁은 물론 도아 혼자 차지였다. 하얀 식탁보 위에는 값비싼 촛대와 식기들이 놓여 있었다. 기름종이와 잼, 생크림, 우유, 과일주스, 물의 도움으로 배불리 먹은 도아는 거실로 향했다. 젖은 돌멩이 빛깔의 벽난로 앞에는 흔들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는 의자 위에 게으르게 몸을 뉘었다. 거실의 천장은 과장을 보태 바로크 시대의 대학 건물처럼 높았다. 그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면서 의미 없이 손가락끼리 맞붙여 딱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흡사 가스레인지 불꽃처럼 벽난로 안의 불덩어리가 까불기 시작했다.

 도아는 기지개를 켰다. 밖으로 나갔다. 색색의 꽃마다 냄새를 맡을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괜히 심술 맞게 정원수의 건강한 이파리를 따서 조각냈다. 누가 뒤에서 살금살금 걸어오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갑자기 뒤로 휙 돌았다. 나뭇가지를 젖혀 보기도 하고 몸을 숙여 그늘진 곳으로 불쑥 들어갔다. 숨바꼭질을 하던 그는 제풀에 지쳐 방금 딴 노란색 꽃을 코에 댄 채 말했다.

 “벨즈 여기 있지? 없어? 말을 해. 그래야 내가 알 거 아니야. 언제까지 숨바꼭질을 할 생각이야? 이제 그만둬. 넌 지치지도 않는 거냐?”

 그가 웃었다. 정작 자신이 말해놓고서.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는 옆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살결을 두드리는 이 바람이 벨즈가 아닐까 하면서.

 벨즈는 그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개념으로 따지자면 그림자였다. 그림자처럼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으니까. 그는 봄에서 태어났고 여름에서 자라 가을에 머무르다 겨울에서 완전한 인격체가 되었다. 지구의 돌, 흙, 물과 같지만 지성 체였고 생명을 부여받았다. 다른 인간들처럼 지구가 낳아 길렀지만 근본은 신과 같은 태고의 산과 바다였다.

 그가 스스로에게 하도아라는 이름을 부여했을 때, 벨즈는 그의 몸뚱어리에서 샴쌍둥이처럼 분리되었다.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분신에게 그는 벨즈라는 이름을 붙였다. 지중해로 흘러드는 나일 강을 따라 걸을 적에 벨즈는 무언(無言)과 같이 증발했다. 그리고 꼬박 하루 만에 사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원시인 사냥꾼을 피해 달아났다.

 “벨즈야…….”

 도아는 하늘에서 눈을 거두었다.

 

 인기척과 함께 어두웠던 거실에 불이 들어왔다. 말이 거실이지 호텔의 로비와 진배없는 이곳은 거의 돌과 나무로 구성되어 있었다. 벽에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액자들이 고화를 담고 있었다. 조각품들과 자물쇠로 잠긴 장 속 중세 무기들, 동서양의 갑주가 차지고 있는 벽면을 빼고 남은 장소에는 따로 서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고서와 두루마기 문서가 진열되어 있었다.

 벽난로 앞에 앉은 도아를 발견한 보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불 끌까요?”

 “아냐, 됐어.”

 보발은 발이 없는 사람처럼 어떤 소음 없이 도아에게 다가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도아 도련님?”

 보발의 물음에 도아의 인상이 활짝 펴졌다.

 “벨즈는 무슨 생각일까?”

 “걱정되십니까, 도련님?”

 “별로.”

 도아가 던지듯 말했다. 보발은 말만 그렇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도아가 몸에 힘을 싣자 흔들의자가 움직였다.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딱 소리를 내자 얌전했던 벽난로 안에서 깜부기불이 번쩍였다.

 “학교생활은 어떠셨는지요? 힘들진 않았습니까?”

 “좋았던 거 같아.”

 “도련님이야 워낙 적응력이 좋으시니…….”

 “칭찬이지?”

 “물론입니다.”

 “놀리지는 마.”

 “놀리다니요.”

 그렇게 대화가 끊기고 둘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도아는 몸을 일으켰다.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벨즈는. 이만 자야겠어.”

 “안녕히 주무십시오, 도련님.”

 “쉬어, 보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도아는 곧 잘 것처럼 침대에 누웠다. 침대가 푹 꺼졌다.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베개 위에서 그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환한 빛무리가 쓸려갔다. 그가 손장난을 치는 곳마다 빛의 물결이 맴돌았다. 푸르스름하게 물든 손톱을 보며 그는 미소 지었다. 손을 스윽 휘저었다가 손목을 휘감았다. 하지만 손에서 방사된 빛무리는 사라질 뿐 끝내 잡히지 않았다.

 그는 팔베개를 한 채 천장을 보았다. 그렇게 학교에서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아는 깨끗한 교복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빳빳한 셔츠를 입고 단추를 채웠다. 교복 재킷에 한쪽 팔씩 집어넣은 후 그 거칠거칠한 면을 손으로 쓱 쓸어 보았다. 그는 거울 앞을 뜨다 말고 제자리에 섰다. 목깃을 고치다가 괜히 씩 웃어 보았다. 마치 희극 배우가 표정 연습을 하는 것처럼.

 “바보 같잖아.”

 그가 중얼거렸다.

 “진심 바보 같아. 혹시 너 바보냐?”

 거울 속 인물이 대답해 줄 리 만무했다. 앵무새처럼 그의 말만 바투 따라 할 뿐이었다.

 “멍청이.”

 그는 방을 나갔다. 커튼이 묶여 있는 커다란 창가에는 햇빛이 나뭇잎처럼 쌓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햇볕이 들어앉은 흡혈귀들의 산란 장소였다. 언젠가 꾼 꿈에서는 아무리 걸어도 이 거실이 끝나지 않았었다. 현관문을 열자 하늘과 나무들이 한 폭에 들어왔다. 그르렁거리고 있는 검은 자동차 옆에서 보발이 점잖게 기다리고 있었다. 포마드로 넘긴 그의 머리는 윤기가 흘렀지만 얼굴은 푸석푸석한 느낌을 주었다. 가끔 도아는 충실한 집사에게 나이 탓이라고 놀리지만 진정 나이가 많은 쪽은 당연히 도아 자신이었다.

 학교는 차로 사십 분 거리에 있었다. 전에 그가 이야기했던 대로 보발은 학교에서 떨어진 장소에 차를 세웠다. 방과 후에도 같은 곳에서 기다릴 참이었다. 보발과 목례를 나눈 도아는 좀 걸어야 했다. 학교의 위치는 상가가 즐비한 곳에 비하면 외진 장소였는데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학교 주변 일대가 온통 학생들이 피다 버린 꽁초 일색이었다. 극악은 꽁초와 함께하는 가래였다. 그는 가래가 너무도 싫었다.

 도아는 교문에서 아이들에 섞였다. 자신이 소속한 곳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호흡을 들이키며 점점 커지는 학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계단과 복도를 지나 교실에 들어섰다. 복도에서 옆 반 아이들이 쿵쿵 뛰어다녔다. 그는 여전히 친구들의 시선을 많이 받았다.

 그는 뒤쪽 자기 자리로 향했다. 재성은 아직 안 온 듯 보였다. 책상에 실내화 발자국이 나 있었다. 그게 재성 대신이었다. 재성은 담임과 겨우 몇 분 간격으로 교실에 들어서는 데 성공하여 지각을 면했다. 간밤에 잠을 설쳤는지 무척 피곤해 보였다. 그는 일 교시가 끝나자마자 교실을 나섰는데 들어올 때는 어째 표정이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도아가 물었다.

 교실이 떠들썩했다. 남학생 둘이서 먼지를 뿌리며 서로를 쫓아다녔다. 여느 쉬는 시간처럼 교실 안에는 여러 개의 파가 갈렸다. 게임, 연예인, 이성, TV, 싸움 거기에 야한 이야기까지 보태졌다. 앞문 쪽에 걸려 있는 벽거울을 보며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거리를 재면서 머리 손질하던 수민과 도아의 눈이 마주쳤다. 수민도 도아도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재성은 도아의 눈길을 피했다. 심각한 고민거리가 있는 것이다.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돼. 소문 같은 건 내지 않으니까.”

 “소문?”

 재성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종이 쳤다. 윤리 교사가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토시를 한 손에 교과서와 대나무 회초리를 들고 있었다. 회초리는 심기가 불편할 때면 곧잘 교탁을 때리는 용이었다. 곳곳에서 의자 당기는 소리가 났다. 재성은 교과서를 찾아 꺼냈고, 도아도 포기했다.

 “자, 어디까지 했더라. 저번에 어디까지 했지?”

 “이십이 페이지요.”

 학생 하나가 답했다.

 교사는 다짜고짜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토시 위에 분필 가루가 떨어졌다. 도아는 노트를 펼치고 심이 굵은 볼펜으로 그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영부영 사 교시까지 지났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쳤다. 도아는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하지만 재성은 고개를 숙인 채 앉아만 있었다. 유일하게 그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건 요란하게 떠는 다리였다. 도아가 책장을 덮어주자 그 위에 깔고 있던 팔을 재성이 치웠다.

 “난 좀 있다가 가려고.”

 “점심시간인 건 알지?”

 “응…….”

 도아가 칠판을 보자 분필이 붕 떠올랐다. 마치 유령이 끽끽 웃기라도 하는 듯 칠판에 글자가 새겨질 때마다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학교 폭력 신고 1

 분필은 남은 글자를 완상시키지 못하고 툭 떨어졌다. 대신에 칠판지우개가 활약을 펼쳤다. 친구에게 심술 맞게 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도아가 교실을 나가고 재성이 고개를 들었을 때 칠판은 깨끗했다.

 도아는 천천히 식사를 끝냈다. 엄청나게 맛없는 식사였다. 딴생각을 하던 도아는 걸음을 멈췄다.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 일어나 나가는데 누군가 의도적이게도 다리를 내민 것이다. 그는 바지통을 바짝 줄인 다리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시선을 움직였다. 다리의 주인은 팔도 머리도 두꺼웠다. 삼 학년인 듯했다. 초록색 이름표에는 김범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도아는 다리를 피해 돌아갔다.

 “어이.”

 도아는 말없이 뒤돌아보았다.

 “사람 처음 보냐?”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가던 길을 갔다. 그러자 뒤에서 욕이 나왔다.

 “저 새끼가.”

 그가 범식을 다시 만난 건 점심시간이 이십 분 남은 운동장에서였다. 그는 따스한 햇볕을 즐기며 학교 담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래가 확 날라 오는 것이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 모래 알갱이가 촤악 부딪혀 떨어졌다.

 “손 빼.”

 도아는 말소리가 들리는 장소를 응시했다. 범식과 그의 일행이 엇다리를 짚은 채 서 있었다. 일행의 입술은 특히나 거무튀튀했다. 도아는 일행의 이름표를 간단히 확인했다. 이동권. 그리고 방금까지 하던 대로 벽을 따라 걸어갔다.

 “저 새끼 지금 나 무시하는 거냐? 어이! 어이!”

 범식이 동권의 손길을 뿌리치며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뛰어 찬 자리는 벽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도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찍이서 바라볼 뿐이었다.

 “너 씨발, 오늘 뒤진 줄 알아라!”

 범식이 달려와 도아와 팔목을 거머쥐었다. 곧바로 한 대 치려는데 교감의 승용차가 교문을 통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얼마 전에 뽑은 은색 벤츠인데 조수석 부분에 스크라치가 나 있었다. 때문인지 차에서 내린 교감은 쩝쩝거리며 오만상을 다 쓰고 있었다.

 한눈을 팔던 범식은 하던 일을 마저 하려 했다. 교감 앞에서 난동을 부릴 순 없으니 겁만 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잡고 있는 건 동권의 팔이었다. 둘은 이렇게 생긴 얼굴도 다 있구나 하는 듯이 서로를 확인하는 동시에 뒤로 확 물러났고, 도아는 긴 다리로 축구 골대 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오늘 어떠셨습니까?”

 보발이 물었다. 껌을 권하려다가 도아가 거절했던 것을 기억하곤 그만두었다.

 도아는 버튼을 눌러 자기 쪽 차창을 닫았다. 나풀거리던 머리칼이 제자리를 찾았다. 도아가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었다.

 “괜찮아. 그래지고 있어.”

 보발이 핸들을 오른손으로 꺾었다. 만원인 시내버스가 옆에서 지나갔다. 도아가 차창으로 몸을 기울였다. 승객들 틈에 껴 있는 재성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재성임을 확인하자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재성은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도아에겐 그렇게 보였다. 그는 차창을 향해 손을 오므렸다가 펼쳤다. 그러자 버스 창문에 주먹만 한 성에가 끼었다. 하지만 재성은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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